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지금 1학기 1차 고사, 그러니까 예전의 중간고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합니다.
시간은 시험 기간을 향해 빠르게 흐르고, 해야 할 일은 쌓여만 가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요.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학원으로 향합니다. 직전 보강이 잡히는 경우도 많고요.
더 좋은 결과를 위해 더 많은 것을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학원 선생님들의 마음, 저도 잘 압니다. 저 역시 한때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학교, 학원, 집을 오가는 무한 반복의 일정 속에서 아이들은 바쁜 하루를 기계처럼 소화해냅니다.
교실에 들어서면 책상 위에는 영어, 수학 문제지가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쉬는 시간에 풀다 만 문제를 수업이 시작되어도 계속 이어가는 아이들.
거기까진 괜찮아요. 수업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마무리하고 책상에 넣는다면요.
하지만 그 행동이 계속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서랍에 넣으세요”라는 말이 있어야만 정리를 하거나,
때론 그런 말조차 무시된 채 수업과 숙제가 엉켜버립니다.
작은 실랑이는 이렇게 시작되곤 해요.
저는 진로교사입니다.
진로는 시험을 보지 않는 과목이기에 아이들에게는 늘 중요도가 밀릴 수밖에 없지요.
삶에서도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나뉘듯, 수업에서도 그 우선순위는 뚜렷하니까요.
하지만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학원 숙제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그것을 수업 시간에 몰래 해결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가끔은 이런 상황 속에서 너무도 당당한 아이들을 마주치기도 해요.
“오늘까지 꼭 해야 해서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복잡합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하게 돼요.
그 당당함은, 정말 수업 중에 발휘되어야 할 종류의 것일까?
당당함은,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선생님께 질문할 때,
잘못을 인정하고 “죄송해요, 수업에 집중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요즘 아이들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을 고르고, 거기에만 에너지를 쓰겠다는 거죠.
맞는 말이에요. 모두 잘할 수 없다면 시간 대비 효율을 높이는 전략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필요 없는 것'으로 단정짓는 오류를 범하곤 해요.
방과 후 특강이 자신의 관심과 관련 없다고 생각되면 pass,
교과가 진로와 직접적인 연계가 없다면 pass.
하지만 ‘선택한 것을 깊이 있게 하라’는 말이, ‘선택하지 않은 것은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한 시간의 진로 수업으로 아이들의 모든 고민을 해결할 순 없어요.
하지만 그 한 시간이 매주 쌓인다면, 가랑비에 옷이 젖듯 아이들의 마음에 스며들 수 있다고 믿어요.
진로 수업은 진로를 결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다양한 삶을 만나고,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탐색하는 시간이지요.
지금은 목표가 없을 수도 있어요.
그렇더라도 눈앞의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태도는 반드시 그 아이의 자산이 됩니다.
그 성실함이 쌓이고 관성이 될 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만나면, 그 위력은 정말 강력하겠지요.
우리가 10대 시절에 정한 목표대로만 살아가지 않듯, 아이들도 지금의 관심이 바뀔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것을 찾아가려는 아이들은
무엇을 하든 결국 해낼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믿음이 있어, 일주일에 한 시간뿐인 제 수업이 아주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