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카페 사장이 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선택지 안에 없었던 소상공인으로 살고 있지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내려고요.
한 때 꼬마빌딩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에 편승해 꼬마빌딩을 짓기 시작하여, 카페를 운영하는 일상을 공유하려 합니다.
오늘따라 시계침이 더디게 움직인다.
'어떤 사람일까? 오래 일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마침 카페 문이 열리고, 앳된 여성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다.
"면접 보러 왔어요."
"어서 와요. 이리로 앉으시구요, 차 준비할게요. 뭐 드실래요?"
"그럼, 물 한 잔만 주세요.."
나도 지금까지 몇 번의 면접을 보았지만 어떤 면접이든 목을 바짝 마르게 한다.
어색한 공기를 깨는 첫 질문이 시작된다.
“찾아오는 데 어렵진 않았죠? 집이랑은 가까운가요?”
겉보기에 시시해 보이지만 사실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작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집과의 거리’는 곧 ‘지속 가능성’이니까. 30분 이상 걸리면? 그러면 마음은 있어도 오래 버티기가 힘들다.
버스를 놓쳐서, 사고로 길이 막혀서, 또는 늦잠을 자서 제시간에 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고 당혹스러웠던 경험이 있으니 도보 또는 버스를 타더라도 집이 가까운 사람을 뽑아야겠다는 것은 그간 쌓인 중요한 선벌조건이다.
질문이 이어진다.
“이전에도 카페 경험이 많으시던데, 그만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돌아오는 대답은 가지각색이었다.
“사장님이 여름에 전기 아낀다고 에어컨을 못 틀게 하셔서요.”라는 생각지 못한 답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역시 직원이 갑이 시대, 다른 건 아껴도 전기세는 아끼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중 다수는 매출 감소로 인한 근무 시간 축소였다. 사장의 고충은 사장만 안다고 주 15시간 이상이면 주휴수당을 줘야 하니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근무시간을 줄이고 15시간을 넘지 않도록 여러 명의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 것이 경제적이기도 하고 대체 근무를 편성하기에도 수월하다. 하지만 직원 입장에선 더 많은 시간, 주휴수당까지 챙겨주는 곳에서 일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 나는 주휴수당을 주는 것을 선택했고, 그것이 직원들이 오래 일하게 하는 힘이었다고 믿는다.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희 매장에 있는 디저트는 모두 이 안에서 만들어요. 그래서 베이킹 경험이 있으면 좋고, 없더라도 배우려는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해요.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서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죠?'
“그리고 매장이 작아도 남녀 화장실을 따로 두고 있어요. 그래서 마감 때마다 화장실 청소를 꼭 해야 해요."
카페 일은 단순히 커피만 내리는 일이 아니다. 손님이 머무는 공간을 늘 깨끗하게 유지하려면, 그 뒤에 숨어 있는 궂은일들을 마주해야 한다.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 뒤에 감추어진 일 들고 힘들어하다가, 결국 몇 달을 채우지 못하고 작별을 고하는 경우도 있다.
10여 명의 직원과 만나고 헤어졌다.
카페가 평생직장이 될 수 없으니, 이별은 항상 예정되어 있었다.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전공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방황하던 MJ.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하지?”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이 제일 좋아하던 베이킹을 떠올리고는 과감하게 휴학계를 내고 이력서를 내밀었다. 캘리그래피를 배워 메뉴판을 뚝딱 만들어 오기도 하고, 쉬는 날 다른 카페에서 맛본 신메뉴를 직접 재현하며 “요즘 이게 대세예요! 사장님 우리도 이런 거 해야 돼요.”라며 새로운 트렌드를 전해주기도 했다.
1년쯤 함께 일했을까. “이만큼 재미있는 일을 다시 찾기 어려울 것 같아요.”라며 카페 창업을 결심했다.
"조금 더 경험을 쌓아보는 건 어떨까? 학교도 졸업해야 하고" 라며 조심스레 조언했지만, 이미 머릿속에 매장 인테리어부터 메뉴까지 구상이 완성돼 있으니 들릴 리가 없었다. 자금 문제로 입지는 포기했지만, SNS에서 입소문만 타면 구석진 곳이어도 찾아가는 시대이니 그 아이의 감각이라는 잘 해낼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빵 터지는 일을 일어나지 않았고,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남들보다 훨씬 빨리 시장을 경험해 봤고, 창업의 속살을 직접 겪어보고는 '가장 좋아한다던 일'이 '이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었다.
'취업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그때까지만 도와줄래?'
때마침 일손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소진되어 풀이 죽은 아이가 자연스럽게 사회로 나올 힘이 생길 때까지 곁에서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직원들이 다시 돌아오는 건 나로서는 큰 선물이다.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은 이미 ‘밖의 세계’를 맛본 사람들이라, 일의 무게를 다르게 이해하고 훨씬 성숙해져 있다. 게다가 그들의 경험담이 나에게도 운영 팁이 되기도 하니 이만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일찍 결혼해 서른 살에 이미 초등학생 딸을 둔 Y.
‘아줌마’라는 공통점 덕분에 나는 그녀와 유난히 잘 통했다.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를 때 가진 것 없이 덜컥 결혼을 했고, 운 좋게 청약에 당첨되긴 했지만 없는 사람에게는 그마저도 마냥 기쁨이 아니다. 70% 대출을 어깨에 얹고 남편은 좀 더 많이 버는 일을 찾다가 택배를 시작했고, 그녀도 대출이자를 갚기 위해 일을 쉴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일의 제약으로 근무 시간을 맞춰주는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오래 붙잡아도 경력만큼 급여가 쌓이지 않아 고민했다.
"우리 집을 살릴 방법은 저밖에 없어요. 자격증을 따서 더 큰 빵집에서 일하면서 경험을 쌓으려고요. 내 장사를 해야겠어요."
쉬는 날마다 학원에 다니며 제과제빵사 자격증을 따고, 그걸 바탕으로 큰 베이커리 카페에서 2년쯤 경력을 쌓은 뒤 동네에 작더라도 자기 가게를 열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참 단단했다. 솔직히 말하면, '계속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싶지만 월급 인상에도 한계가 있으니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이를 붙잡는 건 어른의 몫이 아니었다. 오히려 웃으며 보내주고, 그 길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헤어짐은 언제나 아쉽고 쓰라리지만, 누군가의 앞날을 위해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결국 내가 카페를 하며 배운 또 하나의 역할이었다.
장사를 하다 보니,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좁은 바 안에서 부대끼며 일하다 보면 그들의 삶이 나에게 온다. 문을 열고 반가운 얼굴로 '사장님~'하고 놀러 오면 '어, 왔구나. 요즘 어떻게 지내!' 하면서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하며 수다를 떨 정도는 되니 이만하면 멋진 이별이다. 예정된 이별이라, 그만둔다는 직원의 말에 '올 것이 왔구나'하고 받아들이며 잘 보내주려고 하니 그들도 나를 응원해 주는 감사한 관계가 하나 둘 쌓여간다.
나는 장사를 통해 사람을 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