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만 종료하려다 두뇌를 종료시켜버렸다.
영국 대학교의 마지막 학년을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불안을 '강제 종료' 한 채 살아봤다.
한국의 병원에서 처방받은 조울증 약을 복용하자 감정이 둔탁하게 무뎌졌다.
겉으론 여유로워 보였지만, 사실은 게을러지고 있었다.
시험을 망쳐도 불안하지 않았고, 문제를 풀어도 성취감이 없었다. 과제로 나온 어려운 문제를 오래 고민해보지 않고 금방 포기해 버렸다.
정말 솔직히, 내 머리가 양자역학 강의 앞에서 한계에 부딪힌 줄 알았다.
병원에서는 그 게으름도 '병이 치료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학점이 떨어지는 게 내 잘못이 아니라니!"
"게다가 곧 나아질 거라니!"
지쳐있던 내게, 그 말은 너무 달콤했다.
"뭔가 좀 이상해도, 치료는 잘 되어가는 중이겠지?" 나는 덜컥 믿어버렸다.
너무 믿어버린 나머지, 의사가 상담 때마다 집요하게 포교활동을 해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겨 버렸다.
그렇게 한국에서 조울증 치료를 받다가, 2021년 9월, 석사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치료 전, 걱정도 의욕도 둘 다 넘쳤던 나는, 기특하게도 영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수리물리학 석사 코스를 골라놨다. 입학해 보니 주변에는 온통 전공 덕후들 뿐이었다.
나는 겨우 '2차원 구' 문제를 풀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교수님께 질문했다.
"n-차원으로 일반화하면 어떻게 되나요?"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도 못지않은 물리 덕후였는데, 더 이상 그들의 열정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가 따라주지 않았다.
메모리가 부족한 컴퓨터처럼, 자꾸 멈춰 섰다. 한창 수식을 전개하다 보면,
"뭐 하던 거지?"
잠시 멈추고 문제를 다시 읽는다. 멈춘 부분으로 돌아오면,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방금 내가 쓴 식조차 낯설게 보였다.
양자장론 시험을 치던 날 문제가 터졌다.
A4용지 한 장 가득 물리량을 구해놓고, 막상 앞장에 써둔 수식의 어느 부분에 이 값을 대입하려 했는지 헷갈렸다.
시간이 부족했다. 하나하나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결국, 그럴듯해 보이는 곳에 대입하고 답안지를 제출했다.
그 순간 내가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과 겹쳐 보였다.
예전에는 '기억도 없으면서 메모 하나 믿고 행동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직접 겪어보니 알 것 같았다.
기억이 안 나면, 그냥 눈앞에 보이는 걸 믿고 그게 사실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다.
우울한 마음이 들수록 한국에서 챙겨 온 조울증 약을 더 먹었다.
시험이 끝난 후엔 게으름이 극에 달했다. 기운이 없다는 핑계로 하루에 14시간씩 잠들었다.
쏟아지는 과제를 감당할 물리적 시간이 부족해졌다. 결국 휴학을 결심했다.
1년짜리 석사과정은 그렇게 2년짜리가 되었다.
한국에 도착한 나를 보고 부모님이 말씀하셨다.
"힘들게 진학한 학교에 두 배나 오래 다닐 수 있어서 좋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다른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는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조울증이 아니라, 우울증이네요."
"게다가 오르필이 증상을 악화시켰습니다. 솔직히, 전 병원에서 왜 이 약을 처방했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첫 병원의 검사 결과를 살펴봤다.
2020년의 나는, 명백히 우울증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첫 병원에서는, 이미 낮아진 에너지를 더 떨어뜨리는 약을 처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속이 후련했다.
나는 매일 오답노트를 채우고 있었다.
내 적성이 문제인가, 머리가 나빠진 건가, 아니면 애초에 꿈이 너무 컸던 걸까.
사실은 한참 다른 문제를 붙잡고 있었던 거다.
그제야 제대로 된 문제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내가 양자장론 문제를 풀던 만큼이나 아주 천천히 풀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