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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Jul 08. 2024

영국에서 우울증을 진단받다

2018년에 영국의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우울증과 불안장애, 약간의 공황장애로 불편을 겪었다. 하지만 주변의 많은 유학생 친구들이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는 생각 못했다. 4년 전, 그러니까 2020년에 정신과에서 약물, 상담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다른 이유에서였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스스로를 '조금 예민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 정도로 여겼다. 시험공부를 잘 해내지 못하거나 과제를 제때 제출하지 못하는 상상을 하면, 막연히 '세상이 두 쪽 날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고작 내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 어떻게 '세계 멸망' 같은 중대한 문제에 영향을 주는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내 신체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앞둔 것처럼 반응했다.


2020년 2월에 학교에서 프로그래밍 수업을 들었다. 종강 한 달 전에 기말 과제가 공개 됐는데, 그날 밤부터 '내가 이 과제를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숨이 막혔다. 턱을 괴고 모니터를 노려보는데 갑자기 손목에 뭔가가 타고 내리는 느낌이 났다. 손, 발에서 흐를 만큼 땀이 나고 있었다. 코드를 써야 하는데 땀 때문에 키보드를 치기 힘들었다. 같은 증상이 매일 저녁 나타났다. 결국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심리 상담을 받겠다고 결심했다. '심리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이 증상 때문에 과제를 못 끝낼 경우에 학교로부터 참작받기 위해서 공식 기록을 남겨놓고 싶었다.


상담 당일, 대기실에서 문진표를 작성했다. 평소 느끼는 우울, 불안 증상에 대한 질문이었다. 완성된 문진표를 확인하자마자 상담사가 '약물치료를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물론 당시 내 계획은 '증상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뿐이라서 일단 '가능한 약물치료는 피하고 싶다'라고 했다. 하지만 상담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 치료가 가능한 수준은 이미 한참 전에 넘은 것 같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학교 근처 병원(General Practitioner)과 연결시켜 주었고, 6주간 인지행동 치료 (CBT) 세션도 예약해 줬다. 조금 못마땅했지만 상담사의 태도가 강경해서 알겠다고 하고 상담실을 나왔다.


다행히(?) 영국의 느린 의료 시스템 덕분에 진료를 받기 전 귀국하게 되었다. 병원 예약을 기다리는 3주 사이에 영국에 코로나가 대유행했고, 학교가 모든 강의를 온라인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정신과 진료는 미뤄둔 채, 인지행동 치료만 온라인으로 계속 진행했다. 그리고 몇 주 뒤, 학교로부터 다음 학년도 온라인으로만 수업을 진행하겠다는 메일을 받았다. 영국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학년을 한국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갑자기 '상담사가 그렇게 심각하게 말했는데, 한국에 있을 때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아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 근처에 가장 빨리 진료받을 수 있는 정신과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조울증'과 '불안장애'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 후 약 4년간 정신과에서 약물, 상담치료를 받았다. 치료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던 중에 약 부작용 때문에 휴학하기도 했고, 첫 진단이 오진이었다는 사실을 2년 만에 깨닫기도 했다. 앞으로 내가 4년간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견딘 과정을 남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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