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세계 군사 최강대국 대몽골제국군의 카라키타이 제국 정복전쟁사
'거란계 카라키타이(Kara-Khitai, 서요[西遼]) 제국'은 한때 10세기 말부터 11세기까지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거란제국이 금나라의 대영웅 '완안 아구타(完顏阿骨打, 완안 아골타) 장군'이 지휘하는 철부도 기마군단 돌격대에게 정복당하자, 이에 마지막 황제 야율대석(耶律大石)이 가까스로 일부 군단들과 함께 황궁을 탈출한 후, 1124년에 소수의 최정예 병력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건국한 대제국으로, 건국 후 한때 중앙아시아ㆍ서아시아ㆍ중동ㆍ남아시아 전역들을 정복ㆍ식민 지배하면서 가장 막강한 군사적 패권을 장악한 다민족 패권국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거란계 서요 제국은 '발라사군(발라사군(巴辣薩昆), 현 키르기스스탄 토크마크 인근)'을 제국(帝國)의 수도성(首都城)으로 지정하였다. 당시 '셀주크 튀르크 제국은 1071년 8월 26일 서구 유럽의 최강 제국이었던 동로마 제국과의 총력전인 만지케르트 전투(Μάχη του Μαντζικέρτ)에서 크게 승리'해 지역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141년 9월, 거란계 서요 제국군이 셀주크 제국을 침략하여 일으킨 '카트완 전투(卡特萬之戰)'에서 셀주크 군대를 완전히 학살하였고, 이로써 셀주크 제국은 사실상 멸망하였고, 셀주크 제국이 가지고 있던 패권을 거란계 서요 제국이 그대로 빼앗아 간 것이다.
이렇게 서구의 유럽보다 훨씬 더 군사력이 막강한 셀주크 튀르크 제국보다도 훨씬 더 군사력이 막강한 '거란계 서요 제국'은 중동과 서아시아의 최강 이슬람 제국인 호라즘 대제국, 동·서 튀르크계 카라한(喀喇汗) 제국, 고창 위구르 제국(Kingdom of Qocho, 고창 회골[高昌回鶻]), 카를루크(Karluk) 제국, 칸갈리(Kankali) 제국 등을 식민지로 거느릴 정도였다. 그러나 12세기 때부터 칭기스칸의 세계 정복이 본격화되면서 카라키타이 제국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당시 '거란계 카라키타이 제국(서요 제국)'은 몽골계·튀르크계 북방 유목민 군벌 세력들이 군사 지배층으로 군림했고, 이슬람을 신봉하던 정주민이자 피정복민들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12세기 때부터 군사 정권 내부가 극심한 군사 반란과 군사 내전, 암살 등등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특히 '1210년대에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나이만족(Найман)' 출신의 태자 '쿠츨루크(屈出律, Küchlüg)'가 휘하의 튀르크 기병군단들을 이끌고 카라키타이 제국으로 침투하였다.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을 통일한 직후, 서하 제국 정복 후, 금나라 정복을 위해 몽골제국군의 군사 원정대를 이끌고 금나라 원정 중이었다. 그동안 몽골제국 본국에서는 이전에 정복당한 튀르크계 유목세력들의 군벌 잔당들이 대반란을 일으켰다. 몽골제국군은 중앙아시아의 몽골대초원 전역의 모든 튀르크계 유목세력들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그 기병대들을 대몽골제국군에 강제 편입시키고 그들의 군대 수장들을 전사 또는 암살하였다. 하지만 일부 튀르크계 수장의 최측근 세력은 가까스로 피신해 칼을 갈고 있었고, 마침내 칭기스칸이 몽골제국군을 이끌고 금나라 원정을 하느라 본국에서 부재(不在)하던 틈을 타 피정복민 튀르크계 잔당 군벌들이 '무장 반군'을 조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대표적인 반란의 주동 세력은 '튀르크계 나이만족(Найман)'과 '메르키트족(몽골어 : ᠮᠡᠷᠬᠢᠳ, 한자 : 蔑兒乞)'이었다.
중앙아시아의 모든 튀르크계 유목세력들은 이미 몽골제국에 정복되어 몽골제국군 기병대에 강제 편입되었으나, 튀르크계 나이만족과 메르키트족의 일부 군벌 잔당세력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격노(激怒)'한 칭기스칸은 휘하 '토크차르 장군'을 진압군의 총대장으로 임명하여 '무장 반군'을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킨 튀르크계 유목세력들이 있던 제국 본국으로 급파하였고 반란군들을 순식간에 진압하고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진압군이 도착하기 직전, 나이만족의 태자 쿠츨루크는 토크차르 장군의 진압군대를 피해 가까운 이웃국가, '거란계 카라키타이 제국'으로 탈출하였다.
그런데 이때, 세계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꾼 대사건이 발생했다. 카라키타이 제국에 무혈입성한 나이만족의 쿠츨루크 태자가 당시 카라키타이 제국의 건국황제 야율대석의 손자이자 2대 황제 야율이열의 군사적 후계자인 제3대 황제인 '야율직로고(耶律直魯古)'를 축출하고 군권(軍權)을 완전히 장악해버린 것이다.
1177년, 서요 제국에서는 태후 야율보속완이 소알리랄(蕭斡里剌) 장군의 아들 소타로불(蕭朶魯不) 장군을 검으로 참살(斬殺)하였다. 이에 격분한 소알리랄 장군은 야율보속완을 검으로 척살(刺殺)하였다. 이후 소알리랄 장군은 야율직로고의 맏형인 야율모를 강제로 황제로 즉위시키려 했으나, 초강경파 군벌들이 행동을 개시해 즉시 야율직로고를 재빠르게 황제로 추대함과 동시에 야율모와 소알리랄 장군을 즉시 참수하였다. 결국 야율직로고는 유일하게 생존한 황족으로 최종 승리하여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야율직로고가 황제로 즉위하였을 때 거란계 서요 제국의 식민지였던 호라즘 샤 제국, 서 카라한 칸국, 위구르 제국 등이 독립되는 등, 이로써 서요 제국은 식민지들을 잃으며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1200년에 즉위한 호라즘 샤 제국의 알라웃딘 무함마드는 호라산 이남와 이란·아프가니스탄 지역에 활발한 원정과 통치를 실시하여 국력을 증강하였다. 그는 거란계 서요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전역의 해방과 독립을 목표로 삼고, 마와라안나흐르 지역의 서 카라한 제국의 통치자였던 우스만(Uthman Ulugh Sultan, 1204년 ~ 1211년 재위)과도 연합하여 대규모 반란을 모의하였다.
게다가 1208년, 거란계 서요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란 지역에 주둔해 있던 서요 제국 총독이 갑자기 암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고 만다. 이를 신호탄으로, 호라즘 제국과 서 카라한 제국 연합군은 서요 제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되기 위해 시르다리야강을 도하(渡河)하여 서요 제국에 선전포고하며 총력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서요 제국의 식민지 피정복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격노(激怒)한 서요 제국군은 호라즘 제국-카라한 제국 연합군을 전멸시키고 양국의 독립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1211년, 호라즘 제국의 샤 알라웃딘과 서 카라한 제국의 우스만이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연합하여 독립 항쟁을 선포하였다. 이에 거란계 서요 제국군의 황제 야율직로고는 휘하 타얀크 장군이 이끄는 진압군 등을 친히 이끌고 사마르칸트를 포위공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야율직로고 황제가 서요 제국의 식민지 반란 진압을 위해 출병한 틈을 타, 당시 서요 제국의 황제의 사위가 됐던 나이만족 태자 쿠츨루크가 본국 서요 제국에서 대반란을 일으켰다.
쿠츨루크 장군은 호라즘 샤 제국의 알라웃딘 무함마드와 은밀히 공모하여 서요 제국령 마와라안나흐르 서부와 파미르 고원 동부 지역을 서요 제국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키려 결의하였고, 오트랄 유역에 있던 옛 서요 제국 황제들이 그동안 이슬람 제국들을 약탈해서 빼앗아 수집한 보물창고를 이번엔 역으로 자신들이 훔치고, 제국의 수도 발라사군을 노렸다. 하지만 이때 미리 첩보를 수집한 야율직로고 황제는 말머리를 돌려 식민지 반란 진압군들을 이끌고 귀환하면서 쿠츨루크의 반란군까지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발라사군에서도 그동안 야율직로고 황제의 폭력적인 식민지배로 인해 학살당했던 이슬람교도 피정복민들이 무함마드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야율직로고 황제는 수도 발라사군으로 입성해 직접 식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국의 수도를 함락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거란계 서요 제국의 군사력은 압도적으로 막강했지만, 군인 지배층인 거란족의 인구는 엄청나게 극소수였다. 소수의 거란족 기병군단이 다수의 피정복민들을 폭압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형국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반란이 일어나자 억압받던 식민지 피정복민들이 동시에 곳곳에서 일제히 들고일어난 것이다. 아무리 세계적으로도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서요 제국의 기병 군단이라 할지라도 소수의 병력만으로 동시다발적인 식민지 반란들을 모두 진압하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야율직로고 황제는 비록 폭군에 가까운 황제였지만 군사적 능력만은 매우 뛰어난 천재적인 황제였기에 이 불가능한 일을 해내었고, 제국 수도 발라사군을 16일간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키고, 식민지 반란군들을 전부 학살하며 수도를 재탈환하였다. 그러나 비극은 이때 발생했다. 막상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야율직로고 황제였으나 쿠츨루크 장군으로부터 탈환한 보물의 분배와 처리를 둘러싼 군 내부 갈등으로 군인들과 불화가 발생하여 격노한 야율직로고 황제는 발라사군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진압군에게 철군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막상 서요 제국의 진압군대가 제국 수도에서 철군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쿠츨루크가 빠르게 반군을 재정비하여 역습하여 야율직로고 황제를 포로로 생포했다. 이로써 결국 카라키타이 제국의 제3대 황제 야율직로고는 군권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세계적으로 막강했던 대제국의 황제(야율직로고)가 반란을 일으킨 식민지들을 완전히 진압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군 내부 갈등으로 인해 결국 반란이 재발하여 황제가 실각한, 모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쿠츨루크 장군의 군사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거란계 서요 제국의 동쪽 식민지인 위구르 제국이 서요 제국을 배신하고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에 항복하여 자진 식민지로 편입되는 대사건도 발생했다. 이로써 거란계 서요 제국은 자신들의 식민지들인 호라즘 샤 제국, 서 카라한 제국, 위구르 제국 등등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와 중동에서 가장 막강한 주요 3개 제국들과 그 민족들이 동시에 식민지에서 해방'하는 실책을 저지른다.
하지만 카라키타이 제국의 군사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제4대 황제로 즉위한 쿠츨루크 장군의 폭정은 더욱 더 심해졌다. 대표적으로 그의 폭정들은 종교적인 성향이 강했는데, 네스토리우스파(景敎)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튀르크족인 쿠츨루크는 서요 제국 내의 이슬람교도 피정복민까지 무차별적으로 강제 개종시킨 후 이에 대해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가혹하게 학살하는 등 극단적인 종교적 차별 및 폭압정책을 개시했다. 이로 인해 피정복민들의 반감은 극도로 높아졌고, 13세기 초 서요 제국은 이미 격렬한 군사 반란과 군사 내전, 암살로 분열 직전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몽골제국군의 카라키타이 제국 정복을 정당화할 명분을 확립하였다.
한편, 1206년 '세계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로 군림하게될 칭기스칸(成吉思汗, 몽골어 : Чингис хаан)'이 몽골제국의 대칸으로 즉위하자마자, 그의 군사 원정은 동아시아에서 서쪽 중앙아시아로 계속 이어졌다. 중앙아시아는 대몽골제국군의 세계 정복로(路)의 고속도로가 되는 지역이었다. 칭기스칸은 세계 최강의 기병군단을 구축하여 만호제(萬戶制)로 편제하고, 세계 최정예 부대를 신속히 파견할 수 있는 최고의 효율적인 군사원정 체계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몽골제국은 1211년부터 금(金)나라와 서하(西夏) 제국 등 주변국을 차례로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세계 정복을 시작하기 위해 곧이어 카라키타이 제국과 중앙아시아 전역을 정복 대상이 되었다.
'쿠츨루크(屈出律, Küchlüg) 황제'는 몽골제국의 중앙아시아 정복 과정에서 몽골제국군의 카라키타이 제국 정복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카라키타이 제국은 주변 몽골계·튀르크계 군벌들과 혼인·군사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당나라 시대 때의 고선지 원정대의 연합군이었던 카를루크(Karluk) 세력도 있었다. (그 유명한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의 원정대의 동맹군이었던 이민족 군대도 카를루크였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 직전 카를루크가 배신하며 이슬람 연합국 측에 가담하면서 751년 고선지 장군의 원정대의 중앙아시아의 탈라스강을 점령 시도를 저지한 바 있다.)
그러나 쿠츨루크 황제는 1216년에 중앙아시아의 카라키타이 제국에 근접한 현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북서부의 현급 시인 쿨자 시이자 중앙아시아 천만산맥의 북로에 있던 옛 오아시스 도시국가인 '알말리크(阿力麻里, Almaliq)'를 공격하여 거 주둔군 지휘관이자 군벌 세력의 군대 수장을 암살하는 도발을 감행했다.
당시 알말리크는 몽골제국의 군사 식민지들 중 하나였으므로, 쿠츨루크의 '알말리크(阿力麻里, Almaliq)' 공격은 몽골제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세계 초강대국인 금나라를 정복하던 중에도 거란계 서요 제국을 침략하기 위해 군사적 명분을 찾고 있던 칭기스칸으로서는 이를 카라키타이 제국 정복의 명분으로 삼고 신속히 군사 작전을 수립(樹立)하였다.
또한 쿠츨루크 황제의 폭정으로 서요 제국 내 거란군의 군사통치하에 있던 북방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유목민들과 이슬람계 피지배민들은 이미 극도의 반발심과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카라키타이 제국 내의 이러한 군사적 정황들을 칭기스칸은 첩보를 통해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1218년 초, 칭기스칸은 카라키타이 제국 원정을 위해 군사 원정대 2만 명 병력 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하고, '제베(哲別, 몽골어 : Жэбэ) 장군과 수베게테이 바가토르(忽速猛里, 몽골어 : Сүбэдэй) 장군'을 군사 원정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제베 장군과 수베게테이 바가토르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 원정대는 몽골제국군의 서부 직할령에서 출병하여 톈산(천산)산맥과 알타이 산맥을 계속하여 돌파하면서 서진해 들어갔다.
군사 원정로(路)를 따라 진군하면서 도중에 투르크계 위구르군과 후속 합류한 몽골제국군은 '알말리크(阿力麻里, Almaliq)'를 순식간에 포위섬멸하여 정복한 후, 이어서 1218년 봄 카라키타이 제국의 수도 발라사군(巴辣薩昆, Balasagun)을 포위 공격하였다. 발라사군 침략전투에서 몽골제국군은 카라키타이 제국군 약 3만 명 병력들을 대량 학살하고 요새를 함락시켰으며, 카라키타이 제국군 지도부는 패주하였다. 결국 쿠츨루크 황제 자신도 최정예 군단 대부분 전사하면서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몽골제국군의 군사적 목적은 단순히 카라키타이 제국 정복에만 그치지 않고, 카라키타이 제국을 세계 정복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는 것에 중요도가 있었다. 이미 식민지 서하 제국 반란 사건 때처럼 몽골제국의 세계 정복전 때 정복한 식민지의 반란이 또 다시 발생할 경우 곤란했다. 따라서 이미 정복한 정복지의 대규모 반란이 재발(再發)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발라사군 함락 직후 칭기스칸은 종교적 관용을 선언하여 현지 이슬람교도들의 반란을 차단하고자 구축하였다. 그리고 이어 1218년 말기, 몽골제국군은 쿠츨루크를 추격하여 현재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주의 타림 분지에 위치해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의 카슈가르(喀什噶爾)까지 진격하였다.
1218년 말기, 제베 장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쿠출루크를 참수하였고, 그의 목을 몽골제국군의 전리품으로 삼아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자발적인 강제 복종을 요구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ㆍ서아시아ㆍ중동ㆍ남아시아 전역을 정복ㆍ식민 지배했던 거란계 서요제국의 마지막 제4대 황제는 참수되었고, 오스만 제국과 룸 셀주크 튀르크 제국의 전신인 셀주크 튀르크 제국을 멸망시켰던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한 서요(西遼) 제국' 자체도 몽골제국에게 정복당했다.
이때 카슈가르에서도 쿠츨루크 황제의 폭정에 대한 군중의 분노가 일자, 그는 다시 산악지대로 도주하였고 몽골제국군은 끈질긴 추격 끝에 1218년 말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인 서남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북동부의 와한 계곡의 '바라흐샨(巴達赫尚)' 산악 지대에서 쿠츨루크를 제압·체포하였다.
1218년 말기, 제베 장군은 즉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쿠츨루크에 대한 참수형을 집행하였고, 그의 목을 몽골제국군의 전리품으로 삼아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유포하며 몽골제국에 대한 자발적인 항복을 강요 및 협박하였다. 이로써 거란계 서요 제국의 마지막 황제 쿠츨루크는 제베 장군에 의해 참수당하였고, 카라키타이 제국과 아프가니스탄 자체도 몽골제국에게 완전히 정복당했다.
1218년 몽골제국군의 카라키타이 제국 정복의 결과로, 제베 장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쿠츨루크를 참수하자, 카라키타이 제국은 몽골제국의 군사 식민지로 전락하고 몽골제국의 직할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카라키타이(西遼) 제국 전 영토는 완전히 정복되었을뿐만 아니라, 카라키타이 제국군대들 중 가장 강력한 군단들은 곧바로 몽골제국군의 최정예 이민족 부대에 편입되어 세계 정복전에 투입되었다.
예를 들어 카라키타이의 막강한 군인 귀족들은 몽골제국에 투항한 후 몽골제국군의 이민족 부대 병력으로 재편성되었고, 몽골제국군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일부 소수의 서요 제국의 다른 군벌 세력은 남서쪽 페르시아 제국의 케르만(克爾曼) 지역으로 도주하여 '후서요(後西遼)'라 불리는 '케르만 제국(케르만 쿠틀루크 칸국, قراختاییان کرمان)'을 세웠다. 또한 발라사군 등 주요 군사요새들에는 몽골제국군의 주둔군들인 다루가치 주둔군들이 상시 주둔하며 군사 전진 기지로 활용되었다.
이로써 카라키타이 전역은 대몽골제국군의 세계 정복의 고속도로이자 전진기지가 되어 수많은 북방 유목제국들은 물론, 중앙아시아·중동·서아시아·남아시아 등등등의 광범위한 지역들을 연결하는 군사 전략적 거점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대몽골제국군의 카라키타이 제국 정복 직후 몽골제국령 카라키타이에 자신들의 군사적 식민 통치기구 '총관부'를 설치했다.
대몽골제국군의 카라키타이 정복전쟁은 세계 정복사에서 가장 중대한 분기점 중 하나로 분석된다. 당시 몽골제국은 제베 장군와 수베게테이 바가토르 장군이 이끄는 2만 명 병력 규모의 세계 최정예 군사 원정대만으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신속히 정복하였다. 이는 세계 최강의 돌격기병대를 앞세운 몽골제국군의 세계 최강의 압도적인 기동력, 세계 최강의 체계적이고 철저한 기병군단 지휘 체계, 세계 최고의 철두철미한 첩보전들을 모두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몽골제국군은 정찰전과 심리전을 적극 활용하여 적장(敵將) 쿠츨루크 황제와 같은 주요 군지휘관을 정밀 타격함으로써 카라키타이 제국을 단기간에 효과적으로 빠르게 정복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의 인디애나 대학교의 중앙 유라시아 연구학과의 중앙아시아 연구학의 명예 교수이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종신 강사이기도 한 세계사의 유명 석학인 '데니스 시노르(Denis Sinor)'는 이 정복전쟁사를 두고 「카라키타이 제국은 당시 중앙아시아·서아시아·중동·남아시아의 최강 군사 패권국이었는데, 이 카라키타이 제국을 세계 최강대국 대몽골제국군이 정복한 해는 1218년으로, 바로 쿠츨루크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제베 장군에 의해 참수된 때」 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제국군이 원래 쿠츨루크 황제 참살이라는 군사적 목적에 의해 기동(機動)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카라키타이 제국 전역까지도 모두 정복하였다고 평가했다.
한편, 카라키타이 정복은 또한 대몽골제국이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이후의 세계 정복을 빠르게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카라키타이 제국을 정복한 후 몽골제국군은 즉시 동쪽으로 기동하여 호라즘 정복(1219년 ~ 1221년)으로 전력을 이동시킨 후 곧바로 착수하였다. 따라서 군사적 관점에서도 카라키타이 정복은 몽골제국이 세계 정복 목표를 신속히 실행하는 데 기반을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카라키타이 정복 과정은 몽골제국군의 파괴적 군사전략과 공포전술을 잘 보여준다. 몽골제국군은 정복 후 정복대상의 주요 성과 요새, 대도시들을 파괴·학살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예컨대 쿠츨루크 황제 참수형 후 그의 목을 군대 앞에 전시하여 주변 국가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저항 의지를 꺾었다. 이러한 공포 전술은 이후 몽골제국군의 세계 정복 전쟁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카라키타이 정복전은 몽골군의 세계 최고의 혁신적 군사 전략과 전술이 드러난 사례이다.
이는 먼 훗날 대몽골제국의 식민지배하에 전락한 페르시아 제국 출신의 '라시드 알딘 파들알라 하마다니(رشیدالدین فضلالله همدانی)'의 뛰어난 세계사적 재능을 인정하여, 몽골제국 일 칸국의 카잔 칸이 명령을 하달하여 '세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사(世界史)'인 『집사(集史)』 (※『세계접경사』)를 집필하도록 명령했는데, 이 『집사(集史)』에 기술한 대몽골제국군의 거란계 카라키타이 제국 정복 전쟁사에서도 이러한 대몽골제국군의 세계 최강의 군사 전술들을 자세히 볼 수 있다.
현대의 세계 사학자들은 카라키타이 정복을 몽골제국의 세계정복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한다. 예컨대 카라키타이 제국 정복을 대몽골제국의 세계 정복이 본격화된 시기로 보며 그 의의를 강조한다. 요컨대 1218년 카라키타이 정복을 통해 몽골제국군은 중앙아시아에 세계 정복로(路) 및 군사적 교두보를 확실히 확보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이슬람 제국의 최강 패권국이었던 호라즘 제국, 아바스 제국 정복 등 이후의 세계 정복 전쟁을 빠르게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카라키타이 제국 전역이 몽골제국의 식민 통제 아래 편입됨에 따라 중앙아시아·서아시아·남아시아 전역이 대몽골제국의 식민 통치 체제하로 전락했으며, 대몽골제국은 서역 전선에서 확고한 식민 지배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