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몽골제국군의 세계 초강대국 금나라(大金) 정복전쟁사 5
1219년부터 전개된 전개된 칭기스칸(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이 총지휘한 군사 원정대가 중동·서아시아의 원정은 마침내 성공하여, 당시 중동과 서아시아의 최강의 군사 패권국이었던 호라즘 제국(خوارزمشاهیان)을 정복한 후 몽골제국의 군사 정복지로 전락시켰다. 그런데 칭기스칸이 호라즘 정복(1219년 ~ 1221년)에 주력하는 동안 몽골제국군의 주력군들이 서아시아 정복 전선에 투입되어 있는 사이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서하 제국(白高大夏國, Tangut Empire)에 주둔하던 몽골제국군의 일부 주둔군인들의 폭력적인 식민 통치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하(西夏)는 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몽골제국의 군사 식민지로 전락한 제국으로서, 1217년부터 몽골제국이 서아시아 정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서하 군대를 강제 징병하는 식민 정책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해왔으며, 1219년에도 칭기스칸이 호라즘 원정을 지휘하러 출격할 때에도 몽골제국이 서하 군대를 강제 징병하려 하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게다가 서하는 칭기스칸이 총지휘한 군사 원정대가 호라즘 제국 정복에 주력하려고 나가 있는 틈을 타, 은밀하게 금(金)나라와 송(宋)나라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여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하기 위해 해방책을 도모(圖謀)했다.
칭기스칸은 이를 식민지 서하의 반란으로 간주하고 서하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과 진압(鎭壓)을 결정했다. 그리고 1225년, 중동과 서아시아의 군사 패권국이었던 호라즘 제국 정복을 완수한 칭기스칸은 4년 후 약 18만 병력의 군사 원정대를 이끌고 ‘제2차 서하 원정 및 학살 작전'을 대대적으로 개시하였다.
이때 칭기스칸은 이 학살 작전에 투입된 진압군에 군령(軍令)을 하달해 서하의 군대뿐 아니라 서하 제국(白高大夏國, Tangut Empire) 내 모든 반란 세력과 저항 세력들을 포함한 일반 백성 전원까지도 철저히 학살하여 인구 전체를 완전히 말살하라고 엄명(嚴命)을 내렸다.
칭기스칸이 '서하'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말살'하라고 군령을 하달한 요인은, 칭기스칸이 세계 정복을 위해 다른 제국으로 원정할 때마다 배후에서 서하 제국이 계속 독립운동을 시도하면 골칫거리가 되기에 이를 없애기 위함이었고, 더 나아가 세계 정복을 위해서는 지구 끝까지 진군해야 되는 칭기스칸의 계획을 위해서는 서하의 모든 백성들을 말살하여 그 영토를 ‘세계 정복로(世界征服路)’로 사용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제일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하여 몽골제국군은 호라즘 정복을 빠르게 완수한 후 산서성(山西省)을 우회하여 서하 제국의 가장 견고한 방어 요새인 '카라호토(ᠬᠠᠷᠠ ᠬᠣᠲᠠ, 黑水城, Kara Khoto, 흑수성)'를 기습 공격으로 신속히 함락시킨 후,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며 서하의 모든 요새들을 차례로 파괴하였다. 몽골제국군의 제1차 서하 원정의 군사적 목적이 단순히 정복과 식민지화에 있었다면, 제2차 서하 원정의 군사적 목적은 재정복뿐 아니라 파괴와 학살, 곧 서하 제국 그 자체의 말살이었다. 즉 서하라는 제국 자체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절시키는 것이 주된 군사적 목적이었다.
특히 몽골제국군이 수주(肅州)·간주(甘州) 등등의 여러 주요 성(城)·도시·요새들을 함락시킨 후에는 반드시 괴멸(壞滅)적인 학살과 파괴가 뒤따랐다. 예를 들어 1227년 5월, 몽골제국군이 주도인 수주(肅州)를 재정복한 직후에는 『몽골비사(蒙古秘史)』 등에 「몽골제국군이 서하의 모든 군인과 민간인, 그 밖의 백성 전원을 모두 학살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226년, 세계 최강대국 몽골제국군의 6차 서하 제국 침략이 전개되어 중국 서북의 요서(遼西) 지역 양주(梁州, 현재 산시성·윈난성·구이저우성 전역)까지 점령하였다. 1227년 초에는 몽골제국군이 은천부(銀川府)와 영주부(靈州府, 현재 산시성 린우 시)를 거쳐 서하 수도권 일대의 비옥한 오르도스 평야, 즉 황하 북안(黃河北岸)까지 진격해, 그해 여름에 서하의 수도성(首都城)인 '흥경성(興慶城, 현재 중국의 닝샤 은천시)'을 최종 포위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서하 제국의 제9대 군왕 '헌종(獻宗, 이덕왕 李德旺)'이 전사했고, 조카 이현(李睍)이 제10대 군왕으로 다급히 즉위했다. 그러나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제국군에 더 이상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한 서하 제국은 결국 1227년 9월 최종 항복했다.
당시 몽골제국군의 서하 제국 재정복 때 세계 최대의 대사건이 발생했다. 몽골제국군이 서하 제국을 침략하여 1227년 8월 서하의 수도성(首都城)인 흥경성(興慶城, 현재 중국의 닝샤 은천시)에 대한 포위 작전을 전개하며 서하 제국을 군사적으로 재정복하기 직전 칭기스칸이 사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세계 군사 패권제국 대원제국(大元帝國)의 세계사서(世界史書) 《원사(元史)》는 칭기스칸의 사망일을 1227년 8월 25일로 전술했으며, 세계 군사 최강대국 대몽골제국의 분열제국들 중 하나인 일 칸국(ᠬᠦᠯᠦᠭ ᠦᠨ ᠤᠯᠤ)의 식민지인 페르시아인 출신으로 일 칸국의 제7대 칸(황제)인 '가잔 칸(Ḡāzān Khan)'의 황명(皇命)을 하달받아 세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사(世界史, 세계접경사, 《집사, Jāmiʿ al-Tawārīkh》 포함)'를 저술한 페르시아(이란)의 세계사가(世界史家) 라시드 앗 딘(Rashīd al-Dīn)의 『자미 알-타와리흐(Jāmiʿ al-Tawārīkh)』에서도 「세계 정복자 칭기스칸(世界征服者 成吉思汗)의 사망일은 1227년 8월」로 기록했다.
또한, 근대시대 18세기의 대영제국(영국)이 1768년부터 출판한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Encyclopædia Britannica)》에서도 이 세계사적인 대사건을 「세계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인 대몽골제국의 칭기스칸이 1227년 8월 18일 서하 재정복 원정 중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계 군사 패권제국 대원제국의 세계사(世界史) 《원사(元史)》의 전술에 따르면, 칭기스칸은 서하 제국을 완전히 말살할 군사적 목적 하에 서하 제국 재정복 작전을 전개하며 수도인 흥경성을 향한 포위 공격을 지휘하던 1227년 8월 18일 ~ 25일 동안 극심한 고열과 싸웠다고 전한다. 따라서 그의 사인(死因)은 병사(病死)와 과로사(過勞死)가 복합된 결과라는 것이 세계 역사학계에서 가장 지배적으로 유력한 정론이다.
게다가 실제로 칭기스칸은 세계 정복 전쟁을 전개하던 도중에 흑사병에 걸렸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친히 세계 정복의 최선봉대장 및 돌격대장으로서 앞서 진격하며 항상 최전선에서 세계 군사 원정대를 총지휘했으며, 호라즘 제국 정복을 완수한 직후에도 몽골제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독립하기 위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서하 제국을 향한 재정복전에 곧바로 출병하여 군사 원정대를 진두지휘하느라 숨 고르기할 시간도 없었기에 계속된 세계 정복 전쟁을 총지휘하느라 누적된 피로도가 극강을 달리는 데다가 흑사병까지 겹치면서 병사(病死)와 과로사(過勞死)가 겹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세계 군사 최강대국 대몽골제국의 식민지인 페르시아의 세계사가(世界史家) '아타말리크 주바이니'도 「세계 정복자 칭기스칸의 죽음은 흑사병과 악조건에서 비롯된 불치병(不治病)」이라고 표현해, 역시 병사(病死)와 과로사(過勞死)를 시사했다.
물론 다른 견해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당시 세계 최강대국 대몽골제국의 세계 정복자의 죽음이다보니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추측들이 난무했는데, 대표적으로 중세 유럽의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에서는 「세계 최강의 정복자인 몽골제국의 칭기스칸이 서하 정복 중 암살당했다」고 전하며, 마르코 폴로는 「서하 군사 원정에서 무릎에 화살을 맞아 상처가 감염되어 전사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 17세기 대청제국(청나라)의 사료에는 「몽골제국군의 전쟁 포로로 전락한 서하의 왕족들이 서하 제국을 재정복한 몽골제국군에 대한 증오심에 은밀하게 암살자를 매수하여 칼로 암살했다」는 전설을 전술하기도 했다. 물론 이 견해들은 세계 역사학계에서 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세계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인 칭기스칸의 죽음은 병사(病死)와 과로사(過勞死)'로 보고 있다.
최근 세계 전쟁사학계에서는, 세계 최강대국 대몽골제국군이 세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균전 무기로 사용했던 흑사병(페스트)을 전 세계에 확산시킨 것이 양날의 검이 되어, 적군들도 전멸시켰지만 아군까지 더 나아가 칭기즈칸까지 흑사병에 걸리게 한 것이라는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다. 어쨌든 세계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은, 세계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인 칭기스칸이 서하 정복 도중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세계 정복자 칭기스칸은 본인이 죽는 와중에도 유언을 남겼으니, 『몽골비사(蒙古秘史)』와 후대 서하의 기록인 『서하서사(西夏書事)』에 따르면, 그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서하의 모든 성·요새·도시 안의 군인과 군민들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을 철저히 말살하라. 내가 죽더라도 학살을 계속하여 사멸(死滅)시켜라.(make everyone in their cities vanish keep up the slaughter as long as I live)」라고 군령을 유언으로 남긴 채 사망했다고 전술되어 있다(『몽골비사(蒙古秘史)』, 『서하서사(西夏書事)』).
또한, 실제로 『서하서사(西夏書事)』에는 「수주를 함락시킨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군은 서하의 모든 군인과 민간인을 전멸시켰다(軍民盡屠之). 염주(鹽州) 전역이 백골로 뒤덮여 수천 리에 걸쳐 붉은 영토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21세기의 세계 역사학계들에서도 세계 정복자 몽골제국의 칭기스칸의 서하 제국 재정복 및 대학살 파괴 작전에 대해, 예를 들어 대표적으로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University of Cambridge)의 세계사 연구진들은 「세계 최강대국 대몽골제국군의 학살 작전은 세계 정복전을 수행하면서 광범위했지만, 당시의 정복전쟁 관례 범주에서 이루어진 것」고 설명했다.
이렇듯 세계 최강대국 몽골제국군은 서하 제국을 재정복한 후 '흥경성(興慶城)'에 재입성하자마자 서하 제국에 남아 있던 모든 생명체들을 전부 다 대학살하여 '서하 제국'이라는 제국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절(滅絕)시켰다. 이로써 탕구트계의 역대 제국들 중 가장 최전성기를 달리던 '서하 제국'의 계보는 완전히 끊겼고, 21세기 현대시대까지도 서하 제국의 후예는 지구상에 단 1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중동과 서아시아의 군사 패권국이었던 호라즘 제국에 이어서 서하 제국까지도 정복한 몽골제국은 칭기스칸의 사후 1229년, 그의 셋째 군사 후계자 오고타이(烏古台, ᠣᠭᠣᠲᠠ, Ögedei) 칸이 '대칸직(ᠬᠠᠭᠠᠨ, 大汗, 대제[大帝]직)'을 승계하며 몽골제국의 전군(全軍)의 군권을 장악하였다. 호라즘 제국, 서하 제국을 정복하면서 몽골제국의 군사 원정대를 총지휘할 군사적 총사령권(總司令權)을 차지한 제2대 대칸 오고타이 대칸은 1230년, 당시 세계 정복자 칭기스칸의 호라즘 제국, 서하 제국 정복전쟁 때 활약했던 군사 원정대의 주력군대를 이끌고 1230년, 먼저 금나라를 한창 정복 중이던 무칼리(ᠮᠣᠬᠣᠯ, 木華黎) 장군의 군사 원정대와 합류한 직후 금나라 정복을 완수하기 위한 금나라 정복 작전을 계획했다. 당시는 호라즘 제국과 서하 제국까지도 정복하며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군림하던 몽골제국군의 군기(軍氣)가 본격적으로 세계 최절정의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시대였다.
금나라 제9대 황제 애종(哀宗)은 몽골제국의 군사 원정대의 주력군의 금나라 군사 침략에 맞서 마지막 사생결단의 항전(抗戰)을 결심하고 총동원령(總動員令)을 내려 대제국의 존망이 걸린 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해 국력을 총집결시켰다.
애종은 전군의 전력을 총집결시키기 위해 대제국(금나라)의 '군법(軍法), 형법(刑法), 사법(司法)' 등을 대대적으로 법제를 강화시켜 군율과 처벌을 강화해 내부를 단속하고 감시하는 한편, 반대파 황족들을 기습 체포하여 참수형을 집행하며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이처럼 금나라는 멸망의 위기에 몰려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격변의 시대에 뛰어난 명장(名將)이 출현하듯 난세 중에 난세였던 당시 금나라에 '이란 사파비 제국의 나디르 샤(نادر شاه افشار)'나 '송나라의 악비(岳飛) 장군'과 같은 위대한 명장(名將)인 '완안 진화상(完顔陳和尙, 1192년 ~ 1232년, 완안 진화상 역시 한자식으로 음차한 이름으로 실제 여진식 본명은 다름)'이라는 금나라 최고의 명장(名將)이 강림했다. 그는 금나라 역사상 최강의 전쟁기계 '사묘아리(斜卯阿里) 장군' 이래 가장 뛰어난 군인이었다.
물론 금나라의 황족 출신 장군이었던 완안 진화상 장군에게는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정치적 위기의 순간은 있었다. 그의 친형 '완안사열(完顔斜烈, 완안 시리에, Wányán Xiéliè)'은 이미 약관(弱冠)이었던 20세 전후부터 수많은 전쟁터들에서 승승장구하면서 군공을 세웠고 계속해서 군 계급이 진급을 거듭하였고 당시 금나라 최고위 군직(軍職)인 ‘군원수(軍元帥)’ 계급까지 올랐으나, 이후 강등되어 ‘총령(總領)’으로 임명되고 하남(河南, 현재 중국의 허난성)의 방성(方城, 현재 중국 허난성 난양 시의 현급 행정구역인 '팡청현')에서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였다. 그렇게 총령 계급을 수행하던 완안사열은 이후 최종적으로 금나라 군대의 최고 군검찰관인 '제공(提控)'이라는 특수 군직에 임명되었는데, 제공은 엄격한 군사법과 군율을 유지하며 위반자를 처벌하는 막강한 군사적 권한을 가진 군 계급이었다.
한마디로 '제공(提控)'이란 군직을 정의하면 금나라 군대의 군검찰(군사검찰)이자 엄격한 군기와 군법과 군율 집행 담당 고위직었다. 군대들의 군 기강을 확립하고 군부대의 군법을 수행하며, 군대 내의 군법 질서 유지를 담당하던 고위급 특수 군직(軍職)이었기에 군대 기강과 질서를 엄격히 유지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통상 특정 군단의 군법・치안 강화 및 유지를 감독하며, 군법에 따라 군율을 위반한 군인들과 장교들을 처벌하는 군사적 업무까지 수행했다. 따라서 금나라의 군단들의 군대 기강 확립 및 전투력 유지를 위해 임무를 총괄하던 '군사경찰(헌병대)'이자 '군검찰단' 같은 군법 감독관이 바로 '제공(提控)'이었다. 그렇기에 제공은 군 계급에 비해서 '실권'이 엄청나게 막강한 군직이었다.
물론 현대시대 국가들의 군 검찰 체제에서는 수사, 기소, 재판이 분리되어 있지만, 당시 중세시대 금나라의 군검찰인 '제공(提控)'은 군대 내에서 군법과 사법권까지도 행사하는 막강한 군직이었다는 점에서, 군사검찰, 군 헌병대에 비견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적 권한을 가진 군직이면서도 오히려 현대시대의 군검찰보다도 훨씬 더 막강한 군사적 권위와 영향력을 지녔다.
1225년(정대 2년), 제공(提控)의 임무를 수행하던 완안사열 장군이 전투 중 당한 부상으로 병세(病勢)가 심해졌고 이렇게 병마와 싸우면서 직무를 잠시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가뜩이나 바빴던 제공(提控)의 군사적 업무가 밀리면 큰일이었기에 애종 황제는 동생인 완안 진화상 장군에게 제공의 군사적 권한을 위임하여 직무대행(職務代行)으로서 하남 방성(方城)을 군사적 거점으로 지휘하며 군대 내 군법, 군율을 집행하도록 맡겼다.
그러던 중 하남 방성 주둔군과 국방 경비 부대 사이에 언쟁이 발생했고, 장교와 군단장의 언쟁은 군영에 빠르게 보고되어 '제공'의 임무를 수행하던 완안 진화상 장군은 사건 조사 후 신속히 군법에 따른 엄벌을 명령했다. 이 처벌을 받은 장교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사망하자, 사망한 군인의 가족은 분노하여 완안 진화상 장군이 군사 감독관의 권력을 행사하며 군법에 입각한 처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원한으로 처벌했다고 조정에 거짓 고발했다. 결국 완안 진화상 장군은 감옥에 구금되었고, 당대 완안 진화상 장군보다 훨씬 군 계급이 높은 장군들과 군 관료들은 완안 진화상 장군이 과연 '제공'의 임무를 계속 수행할 정도의 군사적 능력이 있는지, 그가 제공이라는 군 계급의 군사적 지휘권을 넘어선 군법을 적용해 군사적 권한을 남용했는지, 금나라는 항상 엄격한 군기와 군율을 유지해야 됐으므로 완안 진화상 장군의 이러한 군사적 행동이 위법인지 아닌지 여부를 두고 참수형을 집행할지 판단하기 위해 상부의 재판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가 바로 완안 진화상 장군에게 있어 정치적인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완안 진화상 장군이 평소에도 참군인 정신으로 무장하며 군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군인이었음을 보여주는 한편, 군지휘관으로서 융통성 결여를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당시 금나라 황제였던 애종(哀宗)은 세계 최강대국 몽골제국의 무칼리 장군의 군사 원정대가 금나라 정복을 하기 직전인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제국 전역에 총동원령을 내려 금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지닌 장군들을 계속해서 수색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중 애종은 '완안 진화상 장군'을 발견하고 '그의 뛰어난 군인 정신과 군사적 역량'에 주목했다.
그렇기에 애종은 계속해서 완안 진화상 장군에 대한 사면을 추진하면서, 금나라의 최고위급 군 장교들과 군 관료들에게 완안 진화상 장군이 다시 군역을 이행해야 된다고 설득하면서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지만 끝끝내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던 중 그의 친형 완안사열이 전사하자 애종은 이 기회를 이용해 황제의 권력을 총동원해 완안 진화상 장군에 대한 특별사면령을 발동했다. 애종은 명장이었던 그(완안 진화상)의 형(완안사열)이 전사했으니 완안 진화상 장군을 사면하여 그 후임을 맡서 군대의 실질적 지휘관을 맡아야 된다는 명분으로 특별사면령을 강행한 것이었다.
황제 애종의 이 군사적 결정은 금나라의 수많은 군부 세력들이 군법 위반을 명분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애종을 참살(斬殺)하거나 사살(射殺)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무리한 강행이었다. 황제인 애종을 제외한 모든 군벌 세력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게다가 아직 군법 판결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서 황제의 권력을 총동원해서 황제가 금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군법마저 위반하여 장군 하나를 위해 특별사면령을 발동하는 권력을 행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황제가 위법까지 저지르면서 완안 진화상 장군을 위해 특별사면령을 내리는 강행돌파를 한 것이었기에 평소에 황제에 대해 군사 정치적으로 반대파에 서있던 군벌 세력들은 이 기회를 명분 삼아 곧바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금나라는 세계 최강대국 몽골제국의 무칼리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 원정대가 금나라를 정복하기 직전인 상황이었기에, 아무리 황제에 대한 반대파라고 해도 군부 세력들은 더 이상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기도 전에 금나라가 정복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즉, 극도로 엄격한 군대 군율과 군기를 자랑했던 금나라였기에, 황제가 본인의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 완안 진화상 장군을 위해 특별사면령을 하달하는 모험을 강행했음에도 군사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당시 세계 최강대국 몽골제국군의 무칼리 장군이 금나라를 정복하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기에 애종(哀宗)의 반대파 군벌들조차 군사 반란을 일으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을 의미했다.
이 사건 이후, 특별사면된 완안 진화상 장군은 전사한 황족과 유능한 군인, 장군들이 빠진 상황에서 금나라의 군사력을 다시 보강하기 위해,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제국군의 침략, 군사 원정, 식민지배를 피해 서쪽과 북쪽에서 금나라로 도망친 전쟁 포로들 중 '중앙아시아 서부의 튀르크계 위구르족(위구르어: ئۇيغۇر, 튀르키예어: Uygurlar)', '몽골대초원에서 활동하던 튀르크계 나이만족(Найман)', '티베트계 강족(羌族)', '중국의 한족' 중에서도 전투력이 막강한 군병들만을 조직해 '충효군(忠孝軍)'을 편성했다. 이들은 모두 전투력은 용맹하고 막강했지만 엄청나게 공격적이고 호전적이며 사나웠으나, 완안 진화상 장군은 그들을 잘 통솔하여 혼성 기병대로 훌륭하게 운용 조직했다.
충효군의 총사령관(총령)으로는 애종이 가장 신임하는 장군 '완안합달(完顔合達) 장군'과 '이랄포아 장군'이 임명되었으며, 완안 진화상 장군은 완안합달 장군과 이랄포아 장군의 휘하에 소속되어 작전을 수행했다.
그렇게 금나라 황제 애종은 '섬서성(현재 중국의 산시성[중국어 간체자陕西省], [중국어 정체陝西省])' 일대에 장군들까지 수도로 소집해 완안 진화상 장군을 비롯한 금나라에 있는 모든 명장들을 총집결시키면서, 중동과 서아시아의 군사 패권국이었던 호라즘 제국을 정복한 후 서하 제국까지도 재정복하면서 곧이어 금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출격할 세계 최강대국 몽골제국의 오고타이 대칸이 총지휘하는 군사 원정대의 대공세에 대비했다.
게다가 애종은 이번에 몽골제국 오고타이 대칸의 군사 원정대의 금나라 정복전쟁이 금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최종전(最終)임을 예견했던 듯, 애종은 섬서성(산시성) 전역에 특별사면령과 세금 면제령을 동시에 내리는 등 과감한 조치를 취하면서 전군의 군기(軍氣)와 투기(鬪氣)를 극단적으로 고취시켰다.
세계 최강대국 몽골제국의 오고타이 대칸의 본격적인 금나라 정복전쟁에 앞서 1228년 초, 몽골제국의 정찰군 대장이었던 하급군인이었던 '티라운 장군'이 휘하 8,000명 병력의 소규모 기병대만을 이끌고 '금나라의 남쪽 대창원(大昌原)'을 기습 공격했다. 이때 금나라는 완안 진화상 장군이 이끄는 충효군으로 몽골제국군에 맞서 '대창원 전투(大昌原戰鬪)'를 전개했고, 이 대창원 전투는 몽골제국군이 금나라를 침략한 후에 일으킨 수많은 전투들 중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던 금나라군이 유일하게 몽골제국군의 침략으로부터 저항하고 버티는 데 실패하지 않은 전투이기도 했다.
비록, 단 한 번 저항한 것뿐이었지만 이 대창원 전투는 마치 근현대시대에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군들을 상대로 1857년 '나나 사히브'라는 지도자와 그 밑의 세포이들이 완벽한 대승을 거둔 '칸푸르 포위전'과 똑같았다. 늘 패배하던 군대가 단 한 번의 반격에 성공함으로 가뭄에 단비를 맛본 기적과도 같은 전투였던 셈이다. 이 '대창원 전투'라는 저항의 성공은 금나라 군인들로서는 마지막 희망을 주는 기적과도 같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1231년, 몽골제국의 제2대 대칸인 '오고타이 대칸(ᠥᠭᠡᠳᠡᠢ)'은 금나라를 단순히 침략하고 점령하고 주둔군인들이 주둔하는 것만으로는 금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거나 굴복시키고 항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는 몽골제국군은 금나라의 수많은 영토들을 정복하고 군사 식민지로 두었으나, 그렇게 금나라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 일정 부분 살려두면 곧바로 다시 군을 재정비하고 잔존 세력을 모아 독립 반란을 일으키면서 계속해서 항쟁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에 오고타이 대칸은 금나라를 완전히 파괴해야 정복이 완성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왜냐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같은 해 1231년, 세계 최강대국 몽골제국의 제2대 대칸 오고타이 대칸이 총지휘하는 군사 원정대가 본격적으로 금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금나라 침략이 시작되면서 금나라에 대한 세계 최강의 대공세를 전개되었다.
당시 금나라는 이미 수도를 남경(南京, 개봉[開封], 현재 중국의 난징[南京])으로 3번째 천도한 상태였다. 몽골제국군의 계속된 남진으로 금나라는 결국 2번째 수도성인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현재 중국의 베이징]’를 몽골제국에게 정복당하고, 3번째 수도성인 남경으로 천도한 상황이었다.
개봉 북쪽에는 그 악명 높은 '황하강(黃河江)'이 흘렀고, 서쪽에는 협곡의 난공불락의 최대의 전쟁 요새 '동관성(潼關城)'이 건설되어 위치해 있었다. '동관성'은 금나라 최고의 방어 요새로서 험준한 산악 지형에 자리해 있어서 마치 거대한 만리장성이나 마찬가지인 천혜의 난공불락 요새 그 자체였다. 게다가 동관성의 바로 남쪽에는 금나라와 '남송(南宋)'의 '국경'이었다. 이는 몽골제국군이 계속 남진하는 등 금나라의 영토들을 정복하면서 금나라의 영토는 남송과의 국경지대까지 밀려날 정도로 크게 축소된 결과였다.
게다가 황하강의 중하류에는 태산들이 가로 막고 있었고 태산을 우회해서 남진한다 해도 수많은 강과 호수, 수로 등이 마치 거미의 성에서 펼쳐져 있는 거미줄처럼 동관성뿐 아니라 황하강에서부터 사방팔방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는 산악 지대(山岳地帶)가 국토(國土)의 대부분인 한반도와는 달리, 극저온 건조한 평야 지대가 절대다수(絕對多數)인 중국 대륙은 기병대들이 날뛰기 좋은 그야말로 야전, 백병전에 걸맞는 지형이었기에 몽골제국의 기병대 같은 중앙아시아계 유목제국의 기병대들이 전쟁하기에 가장 최적화됨과 동시에 이런 기병대들의 침략을 방어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지형이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금나라는 광대한 중국 대륙을 샅샅이 수색하고 뒤지고 뒤져서 찾고 찾은 끝에 찾아낸 가장 최고의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하기 가장 적합한 위치가 바로 황하강에 가까운 위치였고 그곳에 동관성(潼關城)을 건설한 것이었다. 즉, 이 동관성(潼關城)의 함락은 곧 금나라의 멸망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금나라 황제 애종은 '완안합달 장군'을 선봉으로 주요 장군들에게 20만 대군을 지휘케 하고, 동관성(潼關城)과 하중부 전역의 황하 유역 일대에 집중 배치하여 '남경(개봉, 開封)'으로 침략하는 유일한 침략로(路)를 사수(死守)해 우주방어를 하게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상대는 세계 최강의 무적의 군대였던 몽골제국군이었고, 오고타이 대칸은 금나라를 완전히 파괴하기로 결단한 이상 속전속결로 침략을 전개하였다. 그의 지휘하에 몽골제국군은 빠르게 봉상부(鳳翔府)를 함락한 후 경조부(京兆府)까지 함락하며 산시성 전역과 황하 유역까지 차례로 모두 정복하였다.
바로 이때, 오고타이 대칸은 우회작전을 전개하며 부장 투루이 장군으로 하여금 동관성을 우회하여 '한수(漢水)강'의 상류를 따라 '동주성(東州城, 현재 중국의 산시성)'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1230년 말 ~ 1231년 초, 몽골제국군은 동관성 인근의 동주성(東州城) 일대를 노려 일부 기동 병력을 유인했다. 동주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금나라 황제 애종은 이랄포아 장군과 완안합달(完顔合答) 장군에게 대군 지휘권을 위임한 후, 완안 진화상 장군을 총사령관인 완안합달 장군의 직속 작전 참모장(作戰參謀長)으로 임명하여 동주성으로 급파(急派)하여 사수하게끔 군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오고타이 대칸이 계획한 '유인 전술(誘引戰術)'이었다. 투루이 장군은 완안합달 장군과 완안 진화상 장군과 이랄포아 장군의 이끄는 대군(大軍)이 몰려오자 기다렸다는듯이 순식간에 매복 공격을 준비했고, 금나라 대군이 동주성에 도착했을 때 몽골제국군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총사령관인 완안합달 장군은 세계 최강의 기동력을 자랑한 몽골제국군이기에 이미 동주성을 돌파해 개봉(開封)으로 직공(直攻)하고 있다고 판단했는지 도착한 즉시 곧바로 다시 왔던 길을 이용해 개봉(開封, 카이펑)으로 회군했다.
그러나 때는 1231년 1월, 세계적으로 극강으로 맹렬한 동장군이 이끄는 춥고 혹독한 혹한과 칼바람을 동반한 대폭설이 '금나라 대군단(大軍團)'의 회군을 공격했다. 제아무리 추위에 강하다는 금나라의 여진족 출신의 기병군인들이지만 이 세계사적으로 기록적인 극한의 추위에 시달리면서 결국 균주성 근처의 '삼봉산(三峰山)'에서 잠깐 회군을 멈추면서 재정비 작업에 들어갔지만, 대폭설이 이어지면서 눈보라를 동반한 하얀 안개가 삼봉산 일대의 시야를 뒤덮었고 3일간 계속된 대폭설과 혹한의 극강 추위가 계속되고 있던 그때, 대폭설과 짙은 칼바람의 눈보라 안개를 동반하며 날뛰던 동장군을 격파한 투루이 장군이 휘하 4만 병력의 기병대를 이끌고 '삼봉산(三峰山)'에서 금나라의 15만 대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기후로 악명 높은 북반구의 몽골대초원은 기온이 영하 50도에서 70도까지 내려갈 정도였다. 이러한 세계 최악의 극한의 환경에서 맹렬하게 날뛰던 동장군의 칼바람과 싸워 이긴 몽골제국 군인들에게 추위는 늘 쉬는 숨결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이었기에, 금나라의 군인들이 삼봉산에서 몰아치던 혹한의 추위에 얼어 죽어갈 때 몽골제국의 군인들은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더 기력(氣力)이 넘쳤던 것이었다.
투루이 장군의 4만 병력의 기병대가 금나라의 15만 대군을 전멸시킨 이 전투가 바로 금나라의 최정예 군단들을 모조리 전멸시킨 '삼봉산 전투(三峰山 戰鬪)'였다. 이 전투로 금나라의 최정예 주력 부대는 전부 다 전멸당했고, 완안합달 장군과 완안 진화상 장군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장군들이 전사했다. 총사령관인 완안 합달 장군과 그의 참모장인 완안 진화상 장군만이 소수 병력을 거느리고 균주성(均州城)으로 후퇴하는 데 가까스로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랄포아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고 투루이 장군은 그에게서 각종 군사 기밀들을 수집(蒐集)한 후 곧바로 참수(斬首)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군사 작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했던 오고타이 대칸은 금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인 완안합달 장군과 작전 참모장인 완안 진화상 장군이 균주성으로 퇴각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몽골제국군의 주력군들을 이끌고 황하강을 신속히 도하해 삼봉산을 침략한 후 균주성을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금나라 대군(大軍)의 총사령관인 완안합달 장군과 금나라 최후의 명장이자 최후의 불꽃인 완안 진화상 장군까지 모두 전사하였다.
금나라의 제9대 황제 애종은 그야말로 금나라의 명군 중에 명군이었다. 황제는 사생결단으로 대제국을 지키려 하였으나 대진운(對陣運)이 최악이어도 세계에서 가장 최악이었으며, 침략해온 침략군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무려 세계 최강의 제국이 침략을 해왔다. 그는 황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했으며 금나라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위법까지 저지르면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때로는 본인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군사 쿠데타의 위험성이 있더라도 모험을 하면서 금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력투구(全力投球)를 했던 그야말로 명군 황제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대패했고, 더 이상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1232년 3월까지 금나라의 수도 개봉(開封, 카이펑)을 제외한 모든 성들은 이미 몽골제국의 군사 정복지로 전락했다. 이제는 단순히 주둔이 아니라 그야말로 탈환이 불가능한 몽골제국의 영토로 완전히 '강제 병합'된 것이다. 지방에서 사병대로 반군들을 조직해 황제를 구출하려던 금나라 장군들도 간혹 있었으나, 그들마저 사전에 첩보를 입수한 몽골제국의 기병대들에게 개봉(開封)에 도착하기도 전에 각개격파 당하며 끔찍하게 학살당해 전멸하였다. 더 이상 금나라에는 희망이 없었으며, 이제 누구도 황제를 구원해 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망국의 황제였던 애종에게는 비참한 최후만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어서 1233년 1월에 금나라의 수도성인 개봉(開封) 바로 남쪽 귀덕부(貴徳府)까지 몽골제국군이 포위하자, 애종은 개봉에서 후퇴해 귀덕부로 이동하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바로 근처에 있는 성이었기 때문에 귀덕부 역시 몽골제국의 주둔군들이 포위하고 있는 건 매 한가지였다. 마지막 남은 금나라의 수도 방위군들이 화약무기인 화창(火箭)과 대포를 이용해서 수도를 방어하고 있었지만 함락되기 일보직전이었다. 6월에는 귀덕부에서 바로 옆에 있는 채주성(蔡州城)으로 피신했지만 그곳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로 몽골제국의 주둔군들이 주둔해 있는 곳이었다.
1234년 1월, 몽골제국의 오고타이 대칸은 금나라의 황제 애종에게 항복을 강요하며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고 몽골제국의 군사 식민지 금나라의 총관(총독)으로 임명해 주겠다」는 협박을 가했다.
그러나 애종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였다. 애종은 죽는 순간까지 황제로서의 자존심만은 지킨 것 같다. 비록 본인이 전사하는 한이 있어도 금나라 황족을 보존하려, 세계 최강의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끝까지 죽지 않고 저항하며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며 끝까지 충성을 다했던 마지막 친위대장인 '완안승린(完顔承麟) 장군'에게 금나라의 황제직을 선위하였다. 그가 바로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말제(末帝)’였다.
1234년 2월, 금나라의 황제 애종(哀宗)은 항복을 강요하는 몽골제국의 주둔군에게 마지막 저항의 의미로 항복 대신 스스로 자결한다.
그렇게 황제의 친위대장에서 순식간에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등극한 군인 출신의 황제, '말제(末帝)'는 어떻게든 세계 최강의 주둔군들의 포위망을 피해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오고타이 대칸이 이끄는 군사 원정대들은 개봉(開封)을 포함해서 귀덕부, 그리고 채주성(蔡州城)까지 전부 다 정복하면서, 이후 몽골제국의 추격군들에게 채주성에서 포위당한 말제는 체포당했고 황제가 된 지 수 시간 만에 참수당하며 중국 역사상 가장 재위 기간이 짧은 황제로 등극한다.
세계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거란제국(요나라)'을 여진족 기병대의 대영웅 '완안 아구타(完顔阿骨打)'가 이끄는 기병대들이 침략, 정복하여 멸망시키자, 거란제국 최후의 황제 '야율대석(耶律大石)'은 패잔병 군인들을 이끌고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정복하여 튀르크어로는 '코즈 오르두(Koz Ordu)'로도 불리는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와 이식쿨호 사이에 위치한 '발라사군(튀르키예어 : Balasagun)'을 수도로 삼아 '서요(大遼, 대요, 카라 키타이) 제국'을 건국하였다.
당시 유럽 최강의 제국인 '동로마 제국(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을 '말라즈기르트 전투(그리스어 : Μάχη του Μαντζικέρ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박살낼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한 '알프 아르슬란(آلپ ارسلان)'이 지휘했던 튀르크계 대제국 '셀주크 튀르크(Büyük Selçuklu İmparatorluğu) 제국'을 침략한 거란계의 서요 제국군에 의해 사마르칸트 북쪽의 '카트완 대평원'에서 '1141년 9일 카트완 전투(Battle of Qatwan, 중국어 : 卡特萬之戰)'이 일어났고 수많은 셀주크 제국군들을 대량 학살하며 거란계 서요 제국이 셀주크 튀르크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서아시아·유럽·중동의 패권을 장악한 거란계 서요제국의 최전성기 시대였던 10세기 ~ 11세기의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거란제국(요나라)를 정복할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했던 '완안 아구타(完顔阿骨打)'의 막강한 여진족 기병대들이 1115년에 건국한 대제국, '금나라'는 그렇게 마지막 황제들인 '애종(哀宗)'의 '자결'과 '말제(末帝)'의 '참수'와 함께 거란제국(요나라) → 여진제국(금나라)로 이어지던 북중국 제국의 계보는 완전히 끊겼으며, 세계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금나라의 마지막 남은 허난성(河南省), 안후이성(安徽省), 강소성(江苏省, 장쑤성) 이북의 영토들마저 몽골제국의 군사 정복지로 강제 병합되었고, 이렇게 금나라의 모든 영토들은 몽골제국의 영토로 영구히 강제 정복당했다.
이로써 중동·서아시아의 군사 패권국이었던 호라즘 제국·서하·금나라를 완전히 정복한 몽골제국은 '세계 최강대국 몽골제국(몽골어 : Дэлхийг хамгийн хүчирхэг улус Mongɣol Ulus, 중세 튀르크어 : Dünýäniň iň güýçli döwletleriniň biridir: Mongol Ulus)'에서 '세계 최강대국 대몽골제국(중세 몽골어 :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 몽골어 : Дэлхийн хамгийн хүчирхэг улс Их Монгол Улс, 중세 튀르크어 : Dünýäniň iň güýçli döwletleriniň biridir: Yeke Mongol Ulus)'으로 등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