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몽골제국군의 세계 초강대국 금나라(大金) 정복전쟁사 4
무칼리 장군이 지휘하는 4만 병력의 군사 원정대는 칭기스칸의 군령대로 계속해서 남진하며 1217년 혹한의 겨울 때 대명부성(大名府城) 정복을 시작으로 치주성(淄州城), 익도부성(益都府城), 동주성(東周城), 밀주(密州城) 등등을 차례대로 정복했고, 1218년에는 '태항산(타이항산, 太行山, Taihang Mountains, 중국 대륙의 산시성과 허베이성의 경계를 이루는 광활한 산맥으로, 전체 길이는 남북으로 400km이며, 베이징, 허베이, 샨시, 허난 4개의 성에 걸쳐 있는 천혜의 전쟁요새) 서쪽'까지 진격하여 '서경성(西京城), 대주성(代州城), 혼주성(渾州城), 태원부성(太原府城), 분주성(汾州城), 곽주성(霍州城), 평양부성(平陽府城), 택주성(澤州城), 로주성(潞州城) 등등'을 전부 다 정복했다.
그러나 무칼리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 원정대가 정복한 시베리아 만주의 '대요수국(大遼收國, 後遼國, 후요국) 내부'에서 몽골제국군에 대항하는 군사 반란이 발발하자 무칼리 장군은 휘하의 하급 장군을 분견대장으로 배속(配屬)하여 동경으로 파병하였다. 그런데 무칼리 장군이 파병한 분견대가 대요수국의 군사 반란을 진압하자 퇴각하던 거란군 패잔병 군단들은 한반도의 '고려(高麗, Goryeo)'까지 남진(南進)하여 강동성을 함락시킨 후 주둔하게 된다.
그렇게 1216년 때, 그러니까 고려로 치면 고종 3년 봄부터 몽골제국의 무칼리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 원정대가 이미 정복했던 대요수국이 발발했던 군사 쿠데타를 진압하자, 대요수국의 제3대 군사 통치자인 '야율금산(耶律金山)'은 음력 8월에 부장 야율걸노(耶律乞奴) 장군 등등의 군벌들을 이끌고 고려 북방 지역에 설치된 군사적 요충지로, 거란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된 후 고려군 북부 병력이 배치되어 주둔해 있던 영삭진(寧朔鎭)과 정융진(定戎鎭)을 함락하고 약탈했다.
이렇듯 몽골제국군의 대요수국(후요국) 침략으로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 거란군들 중 생존한 일부 패잔병 군단들이 고려를 침략하여 함경도와 평안도의 주요 군사적 요새들까지 차례대로 함락시키며 한반도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고려 북부의 요새들이 계속 함락당하자, 고려 군부와 조정은 긴급히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고려 군 지휘부는 '김취려(金就呂) 장군'을 선봉대의 장군으로 중군·우군·후군의 삼군을 조직하여 출병시켰는데, 김취려 장군은 후군을 주력으로 이끌고 서북면 방어전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같은 해 거란군은 대동강을 순식간에 돌파해 서해도(황해도 일대)까지 진격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게다가 세계 최강의 군대 몽골제국군의 고려 침략이 전개되기 15년 전인 1216년 말기 ~ 1217년 초기 때까지 거란군의 남진이 더욱 강해지면서 고려는 삼군 체제를 5군 체제로 개편 조직하여 대규모 저지 작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려군은 계속된 거란군의 기동 타격 작전과 소규모 게릴라 침략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연달아 패전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취려 장군' 본인마저 기동 타격으로 치명상(致命傷)을 당하는 바람에 계속 후퇴하였고 고려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대위기에 직면했다.
또 1217년 음력 4월 때는, 거란군은 한반도 황해도·강원도·경기도 접경지대인 금교역까지 진격하여 한반도 중부로의 침략 교두보까지 점령했다. 이에 고려의 무신 정권기의 실권자 최충헌 장군과 제23대 군왕 고종 등이 통치하는 군정은 긴박하게 군 지휘관을 교체하고 전열을 정비하는 강경책으로 맞서게 됐다.
그렇게 고려로서는 전세(戰勢)가 너무 긴박하게 흘러가면서 같은 해 1217년 5월 4일, 거란군은 철원 일대의 '동주성(東州城)'까지 함락하여 점령했다. 동주성 함락은 고려의 최충헌 장군이 지휘하는 군정으로서는 더 이상 거란군의 침략을 막아낼 방어 요새들을 모두 상실했음을 의미했다. 이에 고려 군정은 최충헌 장군의 주도로 '상장군(上將軍)'이었던 김취려 장군을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에 임명하여 군대를 재정비했다. 그러나 더 이상 고려군의 군사력만으로는 거란군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최충헌 장군의 군정은 굴욕적이지만, 몽골제국군의 군사적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몽골제국이 한반도를 침략한 거란군들을 멸절시켜 주기를 군사적 도움을 애원했고 이에 1219년(고려 고종 6년) 초기 때, 몽골제국군의 무칼리 장군은 휘하 군사 원정대에 소속된 하급 장교들인 '살리타이(ᠰᠠᠷᠢᠳᠠᠭ, Saridaγ, 撒里台) 장군'과 '카진 에르지(Хачиун алчи, 哈眞, 카치운) 장군'에게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완안자연(完顔子淵) 장군의 군대와 함께 '한반도'의 '고려'로 진군하여 강원도의 강동성(江東省)을 침략하여 그곳에 주둔 중인 약 5만 명 병력의 거란군 패잔병 군단들은 모두 학살하도록 군령을 하달했다. 이 대학살극으로 인해 무칼리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 원정대의 침략을 피해 고려로 퇴각했던 거란군 패잔병 군단들은 완전히 전멸했고, 대요수국(大遼國)도 몽골제국에 대항했다는 군산 반란죄로 멸망했다. 이에 고려는 동생이 되어 몽골제국을 형님으로 모시는 비참한 ‘형제의 맹약(兄弟盟約)’을 군사 외교적으로 강제로 체결해야 됐다.
이렇게 1219년 몽골제국의 살리타이 장군과 카진 장군의 군대가 고려 강동성을 공격하여 주둔한 거란군들을 대학살함으로써 거란군 패잔병들의 한반도 침략은 종결되었지만, 이후 몽골제국군의 고려 정복전쟁을 위한 군사적 명분이 마련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무칼리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 원정대는 단 4만 병력만으로 금나라 전역을 식민지화해야 됐기 때문에, 칭기스칸이 지휘하는 군사 원정대의 주력군들이 금나라를 침략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군사 전술들을 사용해야 됐다. 칭기스칸이 지휘하는 군사 원정대의 주력군들은 금나라의 모든 성과 요새들을 함락한 즉시 성 내의 모든 금나라 군인들과 백성들을 전부 학살하는 '초토화전술', '파괴전술', ‘대학살전술’을 전개했다.
이는 몽골족의 인구수가 총 100만 명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몽골제국군이 세계 최강이라 해도 금나라의 모든 성과 요새들을 함락해 정복하더라도 그 모든 곳에 주둔시킬 만큼의 군 병력들을 충당할 인구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만약 함락시킨 성과 요새들의 적군들을 전부 다 학살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재정비하여 배후를 노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앞세운 무칼리 장군은 적군들을 학살해 나가며 태항산 서쪽 전역을 정복했다. 그때 옛날에 무칼리 장군에게 투항했었던 한족 장교 출신 사천예가 한 가지 간언을 올렸다. 그의 간언은 이러했다. 「어차피 전 세계는 칭기스칸 폐하와 휘하인 무칼리 전하의 것인데, 무칼리 전하께서 군인들의 학살과 약탈을 중단해야만 중국 대륙을 완전히 정복했을 때 군사적으로 강력하게 통치하실 백성이 존재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안 그래도 무칼리 장군은 금나라 정복 후의 식민통치까지 항상 염두하고 계획하고 있었기에 판단 끝에 휘하 군인들이 금나라의 여진족, 한족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군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근접한 요새와 성들에 주둔했던 금나라 군대가 대거 투항하기 시작했다. 어떤 금나라 영주는 수많은 직속 군단들과 30만 명의 영지민들과 함께 백기들고 항복하기도 했다.
무칼리 장군은 단순히 금나라 정복을 넘어서 완전한 금나라 식민통치까지 계획하며 진군을 계속했다. 무칼리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 원정대는 단 500명 병력만으로 전쟁 요새 '황릉'에 주둔한 2만 명 병력의 금나라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빠르게 금나라를 정복해 나간 무칼리 장군은 투항한 금나라 군대들을 병합하면서 군사 원정대의 규모를 확장시켜 나갔다.
이렇듯 금나라 정복이 거의 완수되자 무칼리 장군은 한창 호라즘 제국을 정복 중이던 칭기스칸의 세계 정복전에 합류하기를 희망했다. 무칼리 장군은 이 뜻을 '군용매(軍用鷹)'를 보내 알렸으나, 칭기스칸은 무칼리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 원정대가 금나라를 정복한 후에도 금나라를 완전히 식민지배할 때까지는 금나라 전선에만 집중하라고 군령을 다시 하달하며 호라즘 제국 정복전에 합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칭기스칸의 세계 정복전에 합류하는 대신 다시금 금나라 전선에 집중하게된 무칼리 장군은 수만의 군사 원정대 병력만으로 1223년까지 빠르게 개봉 일대를 제외한 금나라 전역을 단독으로 정복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황하 이남으로 완전히 축소된 금나라는 옛 영광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금나라의 황제는 이제 몽골제국의 일개 장군인 무칼리에게 대등하게 '정전 협정(停戰協定)'까지 제의할 정도로 처참해졌으나, 무칼리 장군은 오직 '완전한 항복'만을 강요(強要)하며 금나라 황제의 정전 협정 제의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하지만 금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기 하루 전 1223년 봄, 4준 4구들 중 4준(四駿)에 소속된 대정복자들 중 1명인 무칼리 장군은 '과로사(過勞死)'로 세상을 떠났다. 무칼리의 '사인(死因)'이 과로사인 요인은 칭기스칸의 세계 정복전에 합류하고자 하는 강렬한 야망 때문에 스스로를 극도로 혹사하며 휴식 없이 직접 군사 원정대를 이끌고 연이어 정복전쟁에 나선 끝에 산시성(山西省)까지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했으나, 과로가 극대화되면서 결국 '과로사(過勞死)'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무칼리 장군은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모든 정복전쟁들을 완수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금나라 남경을 정복하기 직전에 이렇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내 동생 타이순아, 금나라 정복의 영광은 네가 이어가라.」 그렇게 무칼리 장군은 강렬하게 세상을 떠났다.
칭기스칸으로부터 군령을 하달받아 금나라 정복전의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금나라 정복을 완수하기 하루 전까지 휴식 없이 계속 모든 정복전쟁들에 직접 선봉대장으로 나섰던 무칼리 장군의 마지막 명언은 명나라 시대의 세계사서이자 전쟁사서 『원사(元史)』의 '무칼리전(ᠮᠤᠬᠤᠯᠠᠢ, Muquli, 木華黎傳)'에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해 겨울, 금나라 선종도 1224년 1월 14일 병사(病死)했고, 차기 황제인 민제 애종(哀宗)이 즉위했다. 그러나 군사 쿠데타와 내전이 일상인 북방 유목민족의 관습대로 선종이 사망하자마자 다시금 일시적으로 군인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선종 사망 당일부터 군사 쿠데타가 모의되었다. 선종의 최측근 군벌 세력들은 먼저 황궁에 진입하여 황족들을 구금했다. 이들은 차기 황제 계승권 1순위인 황태자 '완안수서(完顔守緒, 금 애종)' 대신 군벌 세력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나 황위 계승권에서는 멀었던 다른 황자인 '형왕 완안수순(完顔守純)'을 황제로 세우려고 조서를 위조하려 했다.
하지만 이 군사 쿠데타 시도는 황족들의 신속한 대응으로 좌절되었다. 황족들은 즉시 황태자의 즉위 절차를 재촉했고, 황궁 근위대가 완안수순과 공모한 군벌 세력들을 신속히 제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원래 거란제국과 금나라는 대원제국이나 오스만 튀르크 제국처럼 형제 간 내전을 통해 승리자가 황제가 되고 패배한 황자는 살해를 당하는 방식으로 황위 권력을 계승해 왔다. 그 결과 금나라도 119년 동안 10명의 황제가 즉위했고 수많은 황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형제에 의한 계승이 아닌 황위 부자 승계는 선종에서 애종으로 이어진 이번이 유일한 사례였다.
그리고 금나라의 새로운 황제 '애종(哀宗)'의 즉위와 함께 몽골제국의 금나라 원정대장인 무칼리 장군의 동생 타이순은 금나라 정복 완수 및 식민통치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 원정대의 재정비를 완전히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