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몽골제국군의 세계 초강대국 금나라(大金) 정복전쟁사 3
몽골제국군은 1213년부터 금나라의 화북 평야 전역을 침략하여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했다. 그해 가을까지 요동·요서 전역을 초토화시키며 수많은 군마(軍馬)와 전리품들을 약탈한 후, 마침내 1213년 7월 금나라의 완전한 항복을 가져오기 위해 중앙의 군사적 수도성인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현재의 베이징)’를 함락시킬 군사적 목적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거용관’에 근접해 있는 ‘덕흥부’까지 진격한 몽골제국군은 거용관에 주둔한 군인들에게 자진 항복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한 번 몽골제국군에 의해 함락된 적이 있던 거용관은 이후 막대한 군비를 투입해 방어력을 대폭 증강했다. 거용관 입구부터 100여 리 지점까지 마름쇠를 설치했고, 철벽 방어를 위해 관문 내부에서 관문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끔 관문에 쇳물을 부어 봉쇄해버린 것이다. 이에 아무도 거용관의 관문으로 진입할 수도, 관문을 통해 외부로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칭기스칸이 세계사에서 불가능이 없는 무적의 정복자라는 건 기본 상식이다. 칭기스칸은 몽골제국군의 일부를 거용관 입구에 주둔시켜 만일에 대비하도록 연락망을 넓히고, 주력 군대를 이끌고 만리장성의 또 다른 서쪽 관문인 ‘자형관(紫荊關)’을 공격해 빠르게 함락시켰다. 이어 화북 평야를 침투하여 역주 지역, 탁주 지역 등을 차례대로 점령했고, 곧바로 자형관을 탈환하려 출병한 금나라 군대까지도 대학살했다. 그리고 휘하의 제베 장군에게 기동대를 이끌고 우회로를 통해 거용관을 다시 기습 공격할 것을 군령을 통해 명령했으며, 동시에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군 주력부대는 금나라의 군사적 수도성인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현재의 베이징)’로 빠르게 진격했다.
제베 장군의 기동대는 근처의 자형관과 역주·탁주가 모두 점령당하자 소란해진 거용관의 내부 상황을 확실히 파악한 후 남쪽으로 우회하여 거용관을 함락시켰고, 주둔해 있던 금나라 군인들은 항복시켰다. 거용관의 성문이 뚫리자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의 주력군대들과 거용관을 돌파한 제베 장군의 기동대가 중간에서 합류해 마침내 금나라의 군사적 수도성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현재의 베이징)’를 대대적으로 포위했다.
하지만 금나라는 서구 최강의 제국인 '동로마 제국(비잔틴,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에서 승리한 셀주크 튀르크 제국을 침략해 군사적 패권을 장악한 거란계 서요제국의 전신이자 최전성기 시대의 ‘거란제국(요나라)’을 정복하여 건국된 세계 초강대국이었기에, 확실히 군사적 수도성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현재의 베이징)’은 매우 철벽으로 견고했다. 또한 금나라의 모든 군대는 이 황하 이북의 요새들의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결사항전의 의지로 절대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이에 대해서도 곧바로 군사 작전을 전개하며 중도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몽골제국군이 세계를 정복한 가장 강력한 군사적 요인들 중에는 물론 몽골제국의 기병대가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는 점이 가장 강력했지만, 그 외에도 칭기스칸을 비롯한 여러 계승 대칸들과 장군들이 구사한 군사 작전과 전술들 역시도 당시 세계 최고로 철두철미했었다는 점도 있다. 21세기 현대시대까지도 이런 몽골제국군의 군사 전술들이 러시아 군대와 미군의 군사 작전의 대표 전술 교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칭기스칸은 중도대흥부 성문에 5천의 포위 병력만 주둔시켜 금나라 군대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감시하게 한 후, 몽골제국의 군사 원정대의 주력군을 3개가 넘는 공격대로 분할 조직해 화북 평야의 모든 성·요새·도시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파괴·학살·초토화시키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독소전쟁을 초월하는 무자비한 초토화와 학살 전술들을 총전개했다. 게다가 이 3개의 공격대들은 더 소규모 분견대(分遣隊) 단위의 공격대로 다시 분견되어 금나라 전역을 학살하고 초토화·파괴하다가 다른 공격대와 합류하는 등의 날렵하고 유연한 학살형 군사 작전들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보통 다른 초강대국의 군대들이라도 이렇게 소규모 단위로 분할하면 즉시 흩어지거나 와해되어 다시 합류시키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마련이었다. 그 정도로 군대를 여러 소부대와 대부대로 나눈 후, 적군들을 학살하고 다시 하나의 군대로 합류하는 것은 세계에서 훈련이 가장 잘된 군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군대가 바로 몽골제국군이었다. 몽골제국군은 군대를 작은 소규모 단위의 분견대(分遣隊)로 분견했다가 다시 합류해 원래의 대규모 병력으로 복귀하고, 또다시 소규모 단위로 분견해 기동대나 공격대로 군사 작전들을 전개하는 등 세계에서 가장 날렵하고 유연하면서도 철저한 군사 작전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세계사상 유일한 군대였다. 이런 날렵하고 철두철미한 전술은 아무리 21세기 현대군이라도 혹독한 훈련을 받지 않는 한 구현하기 어려웠다. 미군 정도나 가능한 전술인 셈이다. 그렇기에 중세시대의 몽골제국군을 세계 최강의 군대라 정의하고, 21세기 현대시대에는 미군을 세계 최고의 군대라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칭기스칸의 군령을 수행한 몽골제국군은 금나라 전역을 닥치는 대로 공격·정복·학살·초토화시키며, 단 11개의 성을 제외한 약 90여 개의 성·요새들을 전부 다 함락, 정복하고 파괴했다.
한편,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군들이 수도성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현재의 베이징)’를 제외한 금나라 전역을 정복하자 금나라의 군인들과 장군들은 수도성에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에 ‘야호령 전투(野狐嶺戰鬪)’ 이후 계속된 패전으로 군 총사령관인 위소왕에 대한 군부의 분노가 최고조를 향했다.
그렇게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제국군이 강하게 남진하여 금나라의 주력 정예부대가 궤멸적인 타격을 당하자 금나라는 군사적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서서히 금나라 전역을 정복한 몽골제국의 군사 원정대들이 수도 중도대흥부로 집결해오자, 대제국 금나라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 극도의 위기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광기에 미쳐버린 위소왕은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천재 장군들까지 의심과 질투로 학살하며 공개 참수형에 처하는 극단적 행위를 반복했다. 황제의 이런 광기는 군의 지휘 체계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게다가 패전한 장군들에게는 한 번의 기회도 허락하지 않고 곧바로 참수형을 집행했으며, 패전의 책임이 황제 본인에게는 전혀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이는 이미 분노에 가득 찼던 군부가 칼을 들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 분노에 가득찬 군인 세력의 최강자가 바로 '호사호(胡沙虎, 헤시리에) 장군'으로, 그는 몽골제국군의 침략을 막지 못한 금나라의 수많은 패전 장군들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몽골제국군이 금나라의 수도로 진격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위소왕이 모든 책임을 호사호 같은 핵심 군벌에게 물어 참수형을 집행할 것을 직감했던 상황판단력이 재빠른 호사호 장군은 참수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휘하 군부 세력과 치밀히 계획한 대로 '1213년 9월 5일(음력 8월 11일)' 군사 반란을 단행(斷行)하여 자신의 군사적 라이벌인 여진족 군벌들, '도단남평(徒單南平) 장군'과 '도단몰렬(徒單没烈) 장군'의 군대들을 기습공격해 무력화시켰다. 더 나아가 금나라 황족 군벌인 좌승상(左丞相) '완안망(完顔綱) 장군'도 암살하고 황궁으로 진격했다.
그렇게 기습공격을 당한 금나라 제7대 황제 위소왕(衛紹王) 완안영제(完顔永濟)는 호사호 장군의 날카로운 군용 명검으로 참살(斬殺)당했고, 위소왕의 조카 '완안 오도보(完顔吾睹補)'는 '제8대 황제 선종(宣宗)'으로 강제 즉위되었다. 호사호 장군 자신은 태사(太師), 상서령(尙書令), 도원수(都元帥), 감수국사(監修國史) 등에 스스로 등극하면서 군사적 권력을 완전히 장악해 사실상 금나라는 군인들이 제국을 통치하는 ‘군부제국(軍部帝國)’처럼 되었다.
원래 호사호 장군은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망도 있었으나, 세계 최강의 몽골제국군이 남진하고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만약 이때 자신이 즉위했다면 몽골제국군의 최적의 표적이 될 뿐만 아니라, 패전 시 생존하더라도 위소왕 완안영제처럼 군사 반란을 당해 다른 군벌에게 참살·암살당할 위험이 매우 강했기에 호사호 장군은 위소왕의 조카인 선종을 바지 황제로 즉위시키는 방식으로 군사적 권력 획득과 자신의 신변 안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목적으로 호사호 장군 스스로가 황제로 즉위하진 않았다는 것이 세계 역사학계의 지배적 분석이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군이 금나라의 수도성까지 진군하여 주둔했지만 이미 금나라는 이 세계 최강의 군대와 맞서 싸울 여력이 없었다. 수도성을 제외한 전역은 몽골제국군에게 정복당했고, 수도성 내부마저 군사 반란과 내전, 그리고 황제 암살과 폐위로 피바다가 된 상태였기에 결국 1214년 초, 금나라는 수도성을 포위하고 주둔하던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군에게 완전 항복을 선언했다.
항복한 금나라는 금괴 10만 개, 비단 30만 야드, 말뚝에 박혀 전사한 선대 칸의 군용도검을 비롯한 무기와 갑옷과 투구 등을 칭기스칸에게 바쳤다. 이렇게 막대한 세폐와 전리품들을 약탈한 몽골제국의 중도 주둔군들은 1차적 목적을 완수했으므로 철군했다. 몽골제국의 군사력이 세계 최강이긴 했으나, 5,000만 명이 넘는 중국 대륙의 인구를 지배하려면 더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 그래서 몽골제국군은 본국으로 귀환해 원정대를 재정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군이 잠시 본국으로 귀환한 틈에, 금나라 황제 선종은 수도 천도 작업을 개시하며 결사항전 의지를 굳혔다. '서경(西京)'과 '동경(東京)'은 이미 몽골제국군에게 함락된 바 있었고 '북경(北京)'은 몽골제국의 국경과 너무 가까웠다. 이에 할 수 없이 '중경(中京, 중도성)'에 황태자를 주둔시켜 수도 방위대의 군 통솔권을 맡기고, 가장 방어력이 높은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송나라의 옛 천혜의 수도였던 황하 이남의 '남경(南京, 개봉, 开封)'으로 천도하여 재(再)요새화시켰다.
물론 남경을 제외한 금나라의 모든 성, 요새들은 몽골제국군의 영향권 안에 포함되었기에 이는 군사 전술적으로는 남경 천도가 뛰어난 판단일 수 있었지만, 국제적·군사 외교적·정치적으로는 매우 치명타(致命打)였다. 금나라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황제의 백기(白旗) 항복과 막대한 전리품·세폐들을 약탈한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군은 본국으로 귀환해 금나라 식민지화에 대한 군사적 계획에 돌입했다. 그런데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던 금나라 황제가 난데없이 수도를 남경으로 천도해 결사항전을 결의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칭기스칸은, 금나라 황제가 항복 협정을 파기했다고 판단해 대노(大怒)하여 1214년 말기에 빠르게 금나라를 재침략했다.
이번에는 칭기스칸이 속전속결로 몽골제국군의 주력군대들을 이끌고 금나라의 이전 수도인 '중경(中京, 중도성)'까지 진격했다. 동시에 군사 원정대에서 분견대를 분견 조직하여, '무칼리 장군'에게는 단신으로 요하 전역을 정복하라는 특명을 군령으로 하달했다. 무칼리 장군의 군사 원정대는 북경을 침략했고, 1214년 10월 순주 정복을 시작으로 의주를 함락하면서 요하 전역을 정복하자 인근의 수많은 금나라 장군들이 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그중 일부는 거짓 항복으로 무칼리 장군에게 접근해 암살을 시도했으나, 그들은 결국 진압당해 무자비하게 학살당하거나 참수당했다.
그렇게 1215년 무칼리 장군의 군사 원정대가 북경(베이징)까지 진격한 후, 곧바로 무칼리 장군의 군사 원정대는 금나라의 오둔양 장군이 지휘하던 20만 대군을 백병전에서 대량 학살했다. 오둔양 장군은 가까스로 북경성으로 피신했으나 분노한 휘하 군인들에게 참살당했다. 북경성의 지휘관이 참살당하자 금나라 군인들은 백기를 들고 항복을 선언하며 성문을 열었다. 하지만 한시가 바빴던 무칼리 장군은 성문이 늦게 열리는 데 분노하였고 날카로운 군용 명검 ‘신월도(新月刀)’로 항복한 적군들을 전부 다 학살하려 했으나, 부하 장군의 건의로 지금 여기서 항복한 군인들을 대학살하면 다른 지역의 성·요새에서 더 이상 항복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금나라를 정복할 수는 있지만, '빠르게 완전 정복'하는 데는 약간 변수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 결국 학살을 중단했다.
무칼리 장군의 군사 원정대가 요하 전역과 북경을 정복하던 그 시각, 칭기스칸의 군사 원정대가 침략한 중도성의 황태자는 포위를 뚫고 개봉으로 퇴각했다. 1215년 봄부터 수많은 금나라 장군과 군인들이 관할 성·요새를 칭기스칸에게 넘기고 백기를 들고 투항해 왔다. 결국 칭기스칸은 마지막 관대한 제안을 보내 금나라 황제에게 유일하게 생존한 '영토(하북·산동 전역)'를 할양하고 황제 지위와 권한마저 포기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노라고 포고(布告)했다. 또한 몽골제국이 금나라를 식민지화시켜 지배할 때 선종에게 '하남왕'이라는 ‘군왕’ 칭호와 '식민지 총독(총관, 摠管)'직의 권한을 임명하여 하사하겠다고도 제안했다. 그러나 금나라 황제 선종은 이에 끝까지 저항하여 수도 중도성을 탈환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냈으나 지원군은 순식간에 학살당해 탈환마저 실패했다.
칭기스칸은 봉쇄 작전을 전개해 중도성(중경)을 완전히 포위했다. 이에 고립된 중도성의 군인들은 굶주림과 피폐함으로 말라 죽어갔고 총사령관 완안복흥 장군은 스스로 자결했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군 주력부대는 막강한 공성무기를 동원해, 금나라에서 가장 철옹성이라 불리던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현재의 베이징)'를 단기간에 함락시켰다. 이는,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군의 기병대가 세계 최강의 기병대인 것은 확실하나, 공성전에서만큼은 반드시 세계 최강은 아닐 것이라는 금나라 황제의 막연한 희망이 산산조각 난 순간이었다. 그렇게 몽골제국군들이 금나라의 중도대흥부까지도 완전히 정복하고 주둔하자 요동과 만주를 연결하던 도로가 완전히 차단되었고, 결국 세계적 초강대국인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고향이자 '성역(聖域)'인 요동과 만주로 귀환할 수 없게 갇혔다.
공성무기로 성을 파괴한 몽골제국의 돌격기병대는 빠르게 중도대흥부로 돌격해 백병전을 전개했다. 동시에 몽골제국은 돌격기병대에서 분견대를 조직해 우회전을 감행하고 배후를 기습공격하여 앞, 뒤로 공격하는 양동 작전을 전개했다. 몽골제국군들은 대포와 석궁으로 무장한 금나라 장창보병대들을 대량 학살하며 방어선을 무력화시켜 전선을 완전히 장악했다.
1215년 6월 1일, 몽골제국군이 마침내 연경을 정복하자 금나라 정부는 사실상 완전히 저항할 힘을 잃었다.
그리고 무칼리 장군의 군사 원정대가 요하 전역을 정복하던 무렵, 거짓 항복 후 퇴각한 포선만노 장군이 대진국을 건국하고 스스로 천왕을 선언한 후 더 동쪽으로 퇴각해 동하국을 건국한 것도 이때였다. 또한 동하국과 국경을 맞댄 동요국의 건국자이자 거란계 군인 출신인 야율유가 장군은, 무칼리 장군의 군사 원정대가 중도를 정복하고 요하까지 정복하자 1215년 11월 스스로 몽골제국의 보호령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동요국이 몽골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분노한 야율유가 장군의 휘하 장군 야율시불이 1216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야율유가를 축출하고 야율시불 장군은 거란제국(요나라)을 계승했다고 선포하며 ‘대요수국(大遼收國, 후요[後遼], 대요[大遼])’이라는 국명의 작은 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했다.
칭기스칸은 금나라 정복을 하루 앞둔 찰나, '전령병(傳令兵)'으로부터 '긴급 첩보'를 입수했다. 첩보를 입수한 칭기스칸은 빠르게 무칼리 장군에게 몽골제국군 2만 병력과 칭기스칸이 정복한 거란제국군 1만 병력, 한족 군대 1만 병력의 군 통솔권을 넘겨주고 신속히 몽골제국 주력군들과 금나라에 주둔한 주력군들을 이끌고 빠르게 본국으로 철군했다. 철군하면서 무칼리 장군에게는 계속해서 '남진(南進)'하라고 군령을 하달하면서 태항산 이북 전역을 칭기스칸의 군사 식민지로 하되, 태항산 이남 전역을 무칼리 장군의 군사 식민지로 하사하겠으며 금나라 정복을 완수하면 몽골제국의 군사 식민지인 금나라를 식민통치하는 ‘군왕’으로 무칼리 장군을 임명하겠다고 선포한 후, 몽골제국군의 주력군들과 주둔군들을 모두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한 것이다. 당연히 무칼리 장군의 군기도 강화되었고, 그는 칭기스칸에 대한 죽음도 불사하는 절대적 충성을 다시 한 번 선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칭기스칸은 금나라 완전 정복을 앞두고 왜 주력군을 이끌고 빠르게 철군했던 것인가? 바로 몽골제국 본국에서 군사 반란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을 통일하자마자 곧바로 서하 제국을 침략하여 정복하고 금나라 정복전에 나섰다. 그러나 그 사이에 칭기스칸이 몽골제국 통일전쟁 때 대학살하여 제거했던 군벌 수장들 중 일부 잔당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잔존해 다시 군벌을 형성하여 군사 반란을 기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칭기스칸이 몽골제국 통일전쟁 중 수많은 군벌 수장들을 참살했으나, 그들의 휘하 장군·군인·형제들은 퇴각하여 칭기스칸의 군사 원정대가 서하와 금나라를 정복하는 동안 다시금 군벌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에 칭기스칸은 먼저 기사회생(起死回生)하여 다시 군벌을 조직하던 메르키트부를 학살하도록, 휘하의 '토크차르 장군'에게 학살 명령을 군령으로 하달해 선봉으로 보냈다. 또한 사준사구 소속의 수베게테이 바가토르 장군에게는 나머지 군벌 세력에 대한 학살을 군령으로 하달하여 군대장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군벌 세력들을 학살한 후, 이번에는 나이만부 군의 수장의 후계자인 '쿠츨루크 장군(Küčülüg)'이 검을 검집에서 뽑아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칭기스칸의 군대는 순식간에 쿠츨루크 장군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학살하면서 쿠츨루크 장군은 긴급하게 퇴각했고, 그는 중앙아시아의 서요 제국을 침략하여 황위를 찬탈하고 군사 정권을 수립해 서요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이에 칭기스칸은 휘하 군대를 이끌고 서요 제국을 침략했다.
이처럼 몽골제국 본국에서 칭기스칸의 학살 전쟁과 반란군 제압이 빠르게 전개되는 동안, 금나라 정복 전선에서는 이제 칭기스칸의 지원 없이 무칼리 장군 단신으로 지휘하는 4만 병력의 군사 원정대로 세계 초강대국 금나라 완전 정복을 완수하는 군사 작전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