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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크 Feb 15. 2024

커피잔 속 뷰 한 스푼

커피부록(12)#오스트리아 ‘일부’ 카페 

"그림 같다."


 뜻밖에 만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을 때 사용하는 이 표현. 식상하기 그지없음에도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는 듯하다. 그런 풍경에 카메라 렌즈나 차창이 걸릴 때면 렌즈와 창은 액자 프레임이 된다.

 

 그렇다면 여행의 서사를 프레임으로 씌운 풍경은 어떤 그림이 될까.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랑스 작가 마르셸 푸르스트는 여행의 프레임을 걸친 풍경에 이런 의미를 부여했다.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여행은 다채로운 시각, 다양한 느낌을 덧입혀 새로운 시선으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뜻 아닐까.

할슈타트 가는 길 기차 안에서.

 커피 여행을 떠난 유럽에서도,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도 풍경은 여행에 다채로운 시각을 선사했다.


 프레임은 커피잔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커피 한 잔”


 오스트리아 빈의 박물관 광장(Meseum Platz)에서 호프부르크 왕궁(Hofburg)을 가려면 꼭 지나쳐야 하는 곳이 있다. 웅장한 건물이 양 옆에 호위하듯 서 있는 거대한 광장이다. 그 광장 한가운데, 청동상이 위엄 있게 차지하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Maria-Theresien-Platz)에 세워진 오스트리아의 국모, 계몽 군주인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이다. 광장을 찾았을 땐 크리스마스까지 한 달하고도 20여 일이나 남았음에도 크리스마스 마켓을 열기 위한 준비로 분주했다.


 광장 양 옆에 세워진 웅장한 건물 중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앞으로 갔다. 박물관 입구엔 빈에 왔다면 꼭 한 번은 찾아야 할 이유가 명확히 적혀 있다.

 ‘오직 비엔나에서만(only in vienna)’이라는 강렬한 문구와 함께 배경에 인쇄된 그림.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대표작 ‘바벨탑(The Tower of Babel)’이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선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엔 유럽을 장악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이 모여 있다. 그 양이 상당해 시대별, 지역별로 나눠 1층엔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의 고대 유물, 2층엔 회화전시실을 마련했다.


 전시된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빈 미술사 박물관이 뽐내는 게 바로 브뤼헐의 작품이다. 세계 최대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브뤼헐의 작품뿐만 아니다.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해 빛과 어둠의 대비를 강하게 대비시킨 카라바조, 과일 꽃 동물 등으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주세페 아르침볼도 등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명작을 남긴 화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빈 미술사 박물관 개관. 출처 : 빈 미술사 박물관

 방문의 이유는 또 있다. 건축물 자체가 주는 매력이다.


 1858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영토 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게 이 건물이다. 설계는 19세기 유럽에서 활약한 독일의 건축가이자 미술이론가, 건축학 교수인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가 맡았다.

 

 드레스덴 궁정 극장을 설계하고 ‘기술적, 구조적 예술 양식 혹은 실용적인 미학’ 등을 저술한 그는 건축가 인생의 말년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보냈다. 카이저포럼(Kaiserforum)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 포럼은 1857년 12월 요제프 1세가 시작한 링슈트라세(Ringstrasse) 프로젝트 중 하나다. 이 프로젝트는 도심의 성벽과 요새, 주변의 도랑을 철거하고 링슈트라세를 건설하는 도시 재건 사업이다(커피부록 2편 참조).


 카이저포럼은 호프부르크의 확장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컬렉션을 모으는 박물관 등을 건설해 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링슈트라세 프로젝트의 핵심 사업이었다.

르네상스 스타일로 지어진 빈 미술사 박물관.

  요제프 1세는 박물관을 세워 곳곳에 흩어진 황실 소유 작품을 한 곳에 모으는 걸 구상했다.


 젬퍼가 제출한 계획안엔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의 양옆에 세워진 빈 미술사 박물관과 국립 자연사 박물관 었다.


 젬퍼는 프로젝트를 위해 1871년 빈에 정착했고 그해 첫 삽을 떴다.  

 아쉽게도 젬퍼는 마무리를 보지 못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5년 뒤 사임한 그는 2년 뒤 이탈리아를 방문하던 중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럼에도 빈 미술사 박물관은 젬퍼의 계획을 투영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로 지어 1891년 완공했다.


 르네상스 스타일의 화려한 건축물과 그 안에 전시된 세계 최대 명화들. 그런 곳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어떤 기분일까. 2층 돔홀에 바로 그런 공간이 있었다. 빈미술사박물관(Café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이라는 이름의 카페.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니 웨이터가 자리로 안내했다. 돔홀의 돔 아래를 지나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메뉴 추천을 요청했다. 센스 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어떠세요?”


 2, 3초간 침묵이 이어지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침묵의 시간. 

 창 너머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그가 즐겨 마시던 커피, 마리아 테레지아 커피를 마시라는 뜻을 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2층 돔홀의 카페 빈미술사박물관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10월 아버지 카를 6세가 급격한 복통으로 쓰러진 뒤 숨지면서 73만㎢ 영토를 보유한 오스트리아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당시 임신 3개월이라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그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이들의 공격까지 받아야 했다. 한때 황제 자리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역전을 거듭하며 탈환에 성공했다. 정치에 관심 없는 남편 프란츠 1세를 대신해 정치적 국면에서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며 국정을 총괄하기도 했다.


이후 7년 전쟁을 거쳐 오스트리아의 선진국화를 위해 내정 개혁을 실행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이 보이는 곳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커피 한잔.

명목상 황제인 남편의 치세기간 중 그녀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물론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에도 관여했다.


 1780년 서거했을 당시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여왕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같은 해에 왕위에 올라 일평생 그와 대적한 프리드리히 2세도 "여왕은 오스트리아 왕국과 합스부르크에 큰 영예를 남겼다"면서 "여왕과 긴 전쟁을 벌였지만 결코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고 추도하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커피는 그의 삶이 압축돼 있는 듯했다. 더블 에스프레소는 오렌지 리큐어를 섞은 뒤 달콤한 휘핑크림을 얹고 그 위에 색색의 캔디 가루를 뿌렸다.


 화려한 생김새만큼 맛도 다채롭다. 달달한 휘핑크림 뒤로 오렌지향이 나고 쌉싸름한 커피 맛이 입 안에 들어온다. 알코올 성분은 시간이 흘러 서서히 나타난다.


 화려해 보이지만,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은 커피에서 거대한 제국을 이끌던 여왕의 삶이 떠오른 건 왜일까.


“언덕 위 그 카페"


계몽군주 마리아 테레지아, 코르시카 출신 장교에서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 18세기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의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입구에서 본 쇤부른 궁(위)과 정원에서 본 쇤부른 궁.

 긴 설명이 굳이 필요 없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이들은 하나의 장소로 연결된다. ‘아름다운 샘’이라는 뜻을 가진 곳, 쇤부른(Schöne Brunn) 궁전이다.


 쇤부른 궁은 17세기말 레오폴트 1세의 명으로 독일 바로크 양식의 대표주자인 오스트리아 건축가  베른하라트 피셔 폰 에흘라흐(Bernhard Fischer von Erlach)가 설계했다. 아담하면서도 바로크 양식의 장엄함을 갖춘 사냥관이었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확장 공사를 명하면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궁이 됐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름 별궁으로 사용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요 궁전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궁전의 특징은 탄생 배경처럼 외관은 바로크 양식이면서 내부는 로코코 양식의 화려한 치장으로 왕가의 위세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현재 1441개의 방 중 공개되는 방은 45개다. 관람권 종류에 따라 볼 수 있는 방의 개수가 달라진다.


 관람객의 관심을 끄는 방은 거울의 방(Spiegelsaal)과 빈을 점령했을 당시 나폴레옹이 침실로 사용하던 나폴레옹 방이다.  

쇤부른 궁의 거울의 방. 출처 : 쇤브른 궁 홈페이지

 특히 ‘거울의 방’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1762년 당시 6살이던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대를 받아 처음 쇤부른 궁에 들어갔을 때 남긴 일화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장소다.

 

 모차르트는 이 방에서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 뒤 마리아 테레지아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여제의 무릎에 오른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 딸로 1살 연상이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했다. 


 쇤부른 궁 안에서 모차르트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궁정 연회홀’에서다. 이 방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큰 아들인 요제프 2세와 파르마 공국의 공주 마리아 이사벨라 결혼식을 연작 형태로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비엔나 호프부르크 그레이트 레드아웃 홀의 세레나데' 속 어린 모차르트. 출처 : 쇤부른 그룹 e뮤지엄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이 가문의 문장이 장식된 마차를 타고 결혼식에 참석하는 마차 행렬 그림, 브라반트 레이스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방으로 가기 직전 문 옆에 걸린 그림 '비엔나 호프부르크 그레이트 레드아웃 홀의 세레나데'는 숨은그림찾기처럼 모차르트를 찾는 재미가 있다.


 숨은그림찾기라고는 했지만, 모차르트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사람들의 손길이나 숨길 때문에 손상을 입을까 봐 모차르트가 있는 부분에만 투명 아크릴을 씌워 놨다.


 참고로 그림 속에 숨겨진 사실. 모차르트는 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1760년 10월 결혼식 당시 모차르트의 나이는 네 살이었던 데다, 빈이 아닌 잘츠부르크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연작 회화들을 모두 완성하는 데 수년이 걸렸고 그 사이 모차르트는 유명세를 탔다. 화가들은 후에 사람들 사이에 모차르트를 그려 넣었다. 이후 31세가 된 모차르트는 쇤부른 궁에서 오페라 ‘돈 조반니(Don Giovanni)’를 초연했다.


 쇤부른 궁은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어 그 자리에서 보고 느낄 수밖에 없다. 아쉬움을 달래 주는 건 50만평 규모의 부지 안에 마련된 정원과 동물원 박물관 등 다양한 공간들이다.


쇤부른 궁에서 바라본 쇤부른 정원과 글로리에테. 

 특히 1779년 일반인에게 개방된 정원은 프랑스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져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 정원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인 프란츠 1세가 1750년부터 조경을 시작했다.

 조각상과 분수대, 정교한 도로시스템까지 갖춰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아름다운 정원의 끝, 넵튠 분수 너머 언덕 위 건물이 보인다. 1757년 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승리를 기념해 지은 ‘글로리에테(Gloriette)’다.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이라기보다 전쟁으로 숨지거나 부상당한 병사를 위로하는 의미에서 세웠다.


 원래 이 건물은 쇤부른 궁전 건축을 시작한 에흘라흐가 바로크 양식의 정점을 찍기 위한 건축을 구상할 때부터 고려한 부분이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1875년 궁정 건축가 호헨베르크(Hohenberg)가 신고전주의 양식의 열주로 디자인해 언덕 꼭대기에 세웠다.


 건물은 양쪽에 각각 4개의 반원형 아치가 있는 아케이드형 날개와 개선문 스타일의 중앙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중앙 부분의 상단 외부엔 지구본 위에 자리 잡은 독수리가 장식돼 있다. 독수리는 강력한 제국을 상징한다. 그 아래 라틴어 비문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장남이자 공동으로 통치한 요제프 1세를 가리킨다.


 라틴 숫자 ‘CIDICOLXXV’는 날짜를 의미한다. 건물 앞엔 이 숫자가 건설 연도인 1775년을 의미하는데 CID는 M(=1000), ID는 D(= 500)를 나타낸다고 설명돼 있다.


 중앙 부분의 아래층은 19세기 전반까지 황실의 식사 장소로 사용됐고, 평평한 지붕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정원을 가로질러 넵튠 분수를 지나 글로리에테가 보이는 쪽으로 향한다. 지그재그 형태로 만든 언덕길은 약간의 땀이 날 정도지만, 가파르지 않아 천천히 걸어갈 만하다. 올라가는 중에 문득 뒤를 돌아볼 때면 '마리아 테레지아 옐로'로 불리는 노란빛 외관의 쇤부른 궁전이 언덕 높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도착한 언덕, 글로리에테가 나타난다. 쇤부른 궁과 정원이 조화를 이룬다. 


 황실 가족이 식사하던 곳에서 쇤부른 궁과 정원 풍경은 어떨까. 지금은 황실 가족이 아니어도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카페 글로리에테(Café Gloriette)로 향했다.

 

 이곳에 들어서려면 아케이드형 날개에 있는 계단을 통해야 한다. 현재 카페로 들어가려면 글로리에테 건물을 마주 보고 섰을 때 왼쪽 날개의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계단을 올라 아케이드를 거쳐 내부로 들어선다. 마리아 테레지아 옐로를 바탕으로 하얀색 기둥과 제국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조화롭게 치장돼 있다.


 로코코 양식의 화려한 쇤부른 궁을 보고 난 뒤여서인지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다.

 

 대신 높은 층고, 길게 뻗은 기둥 사이 통창은 촘촘히 자리한 테이블 덕에 비좁게 느낄 수도 있는 내부 공간을 갑갑하지 않게 만든다.


 여기에 통창으로 가감 없이 들어오는 햇빛은 또 다른 형태의 조명이 된다.


 아침부터 움직인 탓에 늦은 아침 겸 점심으로 주문한 에스프레소와 크로와상 샌드위치. 맛을 평가하자면, 딱 기본만큼 했다.


 디저트 쇼케이스 속 구성을 보면 ‘기본만큼’이란 말을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빵 케잌 외에 유명 브랜드 과자까지 있어 흡사 매점 가판대 같다.

 아쉬움은 또 있다. 쇤부른 궁과 정원을 볼 수 있는 창가 자리에 앉으려면 최소 4인 이상의 인원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내부로 치고 들어온 햇빛, 소박함이 느껴지는 내부 인테리어만으로도 커피와 크로와상의 '기본만큼'한 맛은 충분히 기본 이상이 된다.


  카페로 꼭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저 언덕 위에서 쇤부른 궁을 보며 저렴하게 커피와 디저트를 먹고 마실 수 있는 매력적인 방법도 있었다.

 카페는 입구로 들어서기 전 아케이드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스탠드형 테이블을 설치했고 팝업 스토어도 마련해 디저트와 커피를 판매했다. 카페 안에서 창가에 앉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에스프레소를 한 잔 더 마셨다.

 문득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부부, 막내 딸 마리 앙투아네트 등 황실 가족과 나폴레옹이 쇤부른 궁과 정원을 바라보며 식사하고 볕이 좋은 날 아케이드로 나와 커피 한 잔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상상.


“음악이 있는 곳… 우아한 한 모금”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스트라우스와 카라얀….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세상에 배출하며 예술의 꽃을 피운 도시. 그런 도시에 있는 오페라 극장에 ‘세계 3대’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 어쩌면 당연한 걸 수도 있겠다.

빈 오페라하우스 전경. 출처 : 오스트리아 관광청 홈페이지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으로 손꼽히는 오스트리아 빈의 ‘비엔나 국립 오페라하우스(Wiener Staatsoper)’다.


 1709석 규모의 이 공연장은 빈이 건설계획을 진행하면서 핵심 도로로 꼽은 링슈트라세 주변에서 첫 번째 주요 건물이 됐다.


 친구사이인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우구스트 시카르트 폰 시카르즈부르크(August Sicard von Sicardsburg)와 에두아르트 반 데르 눌(Eduard van der Nüll)이 공동으로 설계했고 체코 출신 건축가이자 흘라브카 재단을 설립한 요세프 흘라브카(Josef Hlávka)가 디자인했다.


 건설비용은 요제프 1세가 지불했다. 그렇게 1861년 건축을 시작해 1869년 완공됐다. 그해 오페라하우스의 개막공연작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였다. 요제프 황제와 아내인 ‘시시’ 엘리자베스 황후도 참석했다. 이후 수많은 역사적 공연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빈 오페라하우스 개막공연을 묘사한 그림(왼쪽)과 개막 공연인 '돈 조반니' 포스터. 출처 :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초기 비엔나궁정오페라(K. und K. Hofoper)로 불리던 이곳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건 1921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설립된 이후부터다.


 네오 르네상스 스타일로 지어진 건축물은 단순히 석조 건물로만 평가해선 안 된다.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돌들이 공급됐다.


 빈 분지인 뵐러스도르프(Wöllersdorf)에서 채석된 고품질 석회암 뵐러스도르프 스톤((Wöllersdorf stein)은 극장 공간을 장식하는 조각이 됐다. 좀 더 화려하게 장식해야 될 부분에는 색상이 다양한 독일 켈하임 지역의 켈하임 스톤(Kelheimstein)을 사용했다. 계단은 광택이 나고 단단한 카이저 스톤(Kaiserstein)으로 만들어졌다. 석재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사용하던 소스쿠트(Sóskút) 지역의 석재도 가져왔다.


 돌을 다룰 석공 수급을 위해 에두아르트 하우저(Eduard Hauser), 안톤 바서버거(Anton Wasserburger)와 모리츠 프란터(Moritz Pranter) 등 3개의 석조회사가 협업했다. 에두아르트 하우저는 지금도 건설사업자로 활동하고 있다.

빈 오페라하우스는  다양한 지역에서 수급한 석재를 활용해 네오 르네상스 스타일로 지은 건축물이다.

  다양한 석재로 만들어진 건물은 신성 로마 제국의 지위를 계승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명예를 걸고 건축한 만큼 호화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초기 건물이 세워졌을 땐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건설이 시작되면서 링슈트라세의 높이가 오페라하우스보다 1m 높아지면서 시야도 가로막혔다. 혹자는 이 건물을 ‘가라앉은 보물 상자’라 부르기도 했다.


 전쟁의 상흔도 고스란히 안았다. 2차 세계대전이던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오페라하우스 가족들 중 많은 이들이 쫓겨났고 살해되기도 했다. 연주도 허용되지 않았다. 


 전쟁 막판인 1945년 3월 12일 미국의 폭격을 받으면서 객석과 무대는 사라졌다. 120편이 넘는 오페라에 사용된 약 15만벌의 의상, 장식 그리고 소품은 소실됐다. 불행 중 다행인 건 폭격을 막기 위해 벽으로 막은 전면의 오스트리아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의 프레스코화와 로비, 주요 계단, 현관 등이 유지됐다는 점이다.


 아픔을 극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폭격을 맞은 상태로 두 달 뒤인 5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을 공연하며 개장을 알렸다.

 이후 오페라하우스의 재건이냐, 철거한 뒤 신축이냐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오랜 논의 끝에 오스트리아는 재건을 결정했다.

오페라하우스 재건 현장. 출처 : 빈 오페라하우스 홈페이지

 건축 공모전을 통해 에리히 볼텐슈테른(Erich Boltenstern)이 우승했고 원래 디자인에 시대적 변화를 반영해 약간의 현대화를 가미했다.

 

 파테르(노점상)의 좌석 수를 줄이고 기둥을 설치한 제4회랑은 기둥이 필요 없도록 재구성했다. 외관, 현관 홀과 로비도 복원됐다.


 빈 국립 오페라단 지도부도 오페라하우스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런던 등 해외로 공연을 떠나 건축 자금을 모았다. 빈 시장은 시민들이 부담 없이 동전만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시내 곳곳에 오페라단이 공연하도록 배려했다. 덕분에 빈 시민들은 오페라하우스의 재건축에 참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1955년 11월 5일 오페라하우스는 새로운 강당과 현대화된 기술을 갖춰 문을 열었다. 칼 뵘(Karl Böhm )의 지휘로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Fidelio)’ 공연으로 재개관했다. 오스트리아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오페라하우스는 음악의 도시에 걸맞은 다양한 시도를 했다. 

  시도에 나선 대표적 인물이 오페라하우스가 호포퍼(Hofoper)로 불리던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예술 감독을 맡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다.  

구스타프 말러의 초상화가 있는 구스타프 말러 홀(왼쪽)과 말러홀의 구스타프 말러 초상화와 말러홀의 화려한 출입문. 출입구.

 안나 바르-밀덴부르크(Anna Bahr-Mildenburg), 셀마 쿠르츠(Selma Kurz) 등 새로운 세대의 가수들을 양성하는 하면 역사적 무대 장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공연 중 극장의 조명을 어둡게 하는 관행을 도입한 것도 그였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빈 국립 오페라 예술감독을 역임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오페라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대신 원래 언어로만 공연하는 관행을 도입했다. 앙상블과 정규 주요 악창을 강화하고, 객원가수 위주로 참여하는 정책을 세우기도 했다.


 2009년 빈 오페라하우스가 140주년을 맞이하는 해엔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아이디어를 선보이기도 했다. 빈의 주요 거리 중 하나인 케른트너 거리(Kärntner Straße)를 바라보는 오페라하우스 측면에 50㎡의 거대한 스크린을 설치해 4개월간 나비부인, 마술피리, 돈 조반니 등 공연을 포함해 60개가 넘는 유명 오페라를 생방송했다. 이를 통해 많은 관광객과 현지인들에게 오페라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현재 빈 오페라하우스는 연간 레퍼토리 시스템으로 50~60편의 오페라를 만들고 10개의 발레 작품을 제작하는 등 세계에서 가장 바쁜 오페라하우스 중 하나가 됐다.

빈 오페라하우스는 꼭대기 가장 저렴한 자리에서도 소리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 오페라하우스 무대와 '피가로의 결혼' 공연 장면. 출처 : 빈 오페라하우스

 오스트리아에 왔는데 그런 오페라하우스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에 도착한 날 급하게 티켓을 구매했다. 그저 세계 3대 극장에서 오페라를 경험해 보자는 게 방문의 이유인 만큼 가장 싼 자리로 예매했다.


 그리고 공연 전 날 오페라하우스로부터 메일 하나를 받았다. 메일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공연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출연진에 대한 소개, 찾아오는 길, 티켓 수령은 물론 옷을 보관하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정보. 요리를 주문하고 먹는데 시간을 단축하는 꿀팁이었다. 왠지 공연과 함께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온라인 예약 링크를 누르니 공연 시작 30분 전, 또는 공연 중간 휴식시간인 인터미션 때 공연장 곳곳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커피나 와인을 즐길 수 있다고 알려줬다.


 카페 거스트너(Café Gerstener)가 운영하는 휴게 공간은 1층 거스트너 로비(Gerstner’s Parkett foyer)와 2층 구스타프 말러홀(Gustav Mahler-Saal), 마블 홀(Marble Hall)과 갤러리(Galerie)였다.


 혼잡을 피하려면 공연 당일 오후 4시까지 온라인으로 예약하는 게 좋고 공연 시작 전 현장에서 사전 주문해도 된다고 했다.


 온라인 예약보다는 장소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공연 시간을 한 시간여 앞두고 오페라하우스가 알려준 방법대로 링슈트라세를 기준으로 입구를 찾았다.


링슈트라세에서 바라본 오페라하우스 전면. 출처 : 빈 오페라하우스 홈페이지


 링슈트라세에서 건물 전면을 보니 1869년부터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원형 구조가 보였다. 안나 슈튤파러의 ‘비엔나 국립 오페라, 재건'에 따르면 정면의 아치는 르네상스 스타일로 장식돼 있고 도로 쪽 베란다는 건물의 공공성을 강조한다. 말을 탄 두 기수의 동상은 1876년 독일의 조각가인 에른스트 율리우스 헤넬 (Ernst Hähnel)이 제작했다. ‘조화와 시의 뮤즈’가 이끄는 에라토의 날개 달린 두 마리 말이다.


 베란다 위 아치에는 독일의 조각가 에른스트 율리어스 헤넬(Ernst Julius Hähnel)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영웅주의, 비극, 환상, 희극, 사랑을 상징하는 다섯 개 동상을 세웠다. 오페라하우스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요제프 가세르(Josef Gasser)가 만든 두 개의 분수가 있다. 왼쪽은 음악 춤 기쁨 경쾌함과 유혹, 오른쪽은 슬픔 사랑 복수라는 두 개의 다른 세계를 각각 상징한다.


 티켓박스에서 예매한 표를 받고 프로그램을 구매하니 비로소 오페라하우스의 내부가 보인다.

빈 오페라하우스에 들어서면 조각품과 프레스코화를 만날 수 있다.

  건물 안 곳곳을 장식하는 프레스코화와 조각도 눈길을 끈다.


  중앙 계단의 첫 번째 섹션에는 조각가 요제프 세자르(Josef Cesar)가 디자인한 두 개의 메달리온이 걸려 있다. 오페라하우스를 설계한  아우구스트 시카르트 폰 시카르즈부르크와 에두아르트 반 데르 눌의 초상화도 만날 수 있다. 


 계단을 장식하는 천장 그림은 프란츠 도비아쇼프스키(Franz Dobiaschofsky)가 디자인한 ‘선물을 흩뿌리는 포르투나(Fortuna, ihre Gaben streuend)다. 


 하이라이트는 메인 로비와 중앙 계단, 슈빈트로비(Schwind Foyer), 부속 베란다 등이다. 특히 2층 중앙 캐비닛 사이에 위치한 티살롱(TeeSalon)은 폭격의 영향을 받지 않아 비교적 원래 상태로 잘 보존돼 있다고 한다. 예전엔 황제의 살롱으로 불렸다. 빈의 황족과 손님이 사용하던 곳인데 천장과 벽은 22캐럿 금박으로 장식돼 있고 조각품과 태피스트리로 장식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장소. 로비에서 우측 계단을 따라 오르니 화려한 문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발길이 간다.

마블홀(왼쪽)과 말러홀. 출처 : 빈 오페라하우스 홈페이지

 휴게 공간 중 하나인 구스타프 말러홀이다. 말러홀은 마블홀과 함께 1950년대에 재건축된 공간이다.


 구스타프 말러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이 방은 루돌프 아이젠멩거(Rudolf Eisenmenger)가 디자인했다. 벽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Zauberflöte)’를 모티브로 한 태피스트리가 장식하고 있다.


 1944년까지 이사실로 사용되다가 1997년 5월 11일 말러의 오페라 하우스 지휘 데뷔 100주년을 기념해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말러홀 반대편엔 비슷한 규모와 형태의 마블홀이 있다. 말러홀과 마블홀을 연결하는 곳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또 다른 공간, 슈빈트로비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때는 갤러리로 표기돼 있다.


 이 장소는 과거 프롬나드 홀(Promenade Hall)로 불리다가 홀을 장식하던 16점의 유화 스케치 덕에 이름을 변경했다. 유화를 그린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의 이름이다.


 슈빈트로비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현장에서 음식을 구매해서 먹을 수 있도록 직원이 주문을 받고 있었다. 디저트 쇼케이스도 보였다. 자연스럽게 줄을 섰다. 유럽 여행을 할 때면 찾게 되는 공연장에선 휴식시간이나 공연 종료 후 와인이나 커피를 마시는 문화를 경험했다. 오페라하우스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공연 전 비어있는 말러홀과 예약 주문을 받고 있는 슈빈트로비.

 주문한 건 에스프레소와 초콜릿케잌

 직원은 주문을 받은 뒤 질문을 건넸다. 질문은 언제 먹을지로 시작됐다. 휴식 시간을 선택하니, 장소를 물었다. 온라인 예약을 하지 않은 이유였다. 

 줄을 서며 둘러본 슈빈트로비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슈트라우스는 물론 말러, 카라얀 등 위대한 지휘자들의 흉상이 천장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을 선택하니 다음 질문, “서서 드실 건가요, 앉아서 드실 건가요.” 스탠딩 좌석을 선택하고 나니 직원이 영수증에 번호를 적어준다. “인터미션 때 갤러리에 오시면 해당 번호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부 공연이 끝났다. 기대감을 갖고 슈빈트로비로 들어섰다. 영수증에 적힌 번호 '405번'이 적힌 테이블이 보인다. 이미 주문한 커피와 디저트와 함께. 가장 싼 자리에 앉아 공연을 보면서도 세팅된 테이블을 보는 순간 환대받고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양복 차림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줄을 서 있을 때 여유롭게 커피와 디저트를 즐겼다.

 

 에스프레소와 초코케잌의 씁쓰름함과 달콤함이 느껴지는 순간,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의 흉상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참고 자료 : 빈 미술사 박물관 홈페이지, 쇤부른 궁 홈페이지,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 홈페이지, 안나 슈튤파러의 ‘비엔나 국립 오페라, 재건 1945-1955’(몰든 출판사, 2019년)

**메인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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