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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크 Mar 27. 2024

[걷다 보니 ‘발품 컨셉’]커피부록(18)

#이탈리아 ‘일부’ 카페… 최초라는 그 이름 caffè florian

‘라 세레니시마(La Serenissima)’. 

 수세기 동안 해상 도시이자 대규모 무역 도시로 부와 번영을 일궈내고 외교 무대에선 중재자로 나선 이 도시에 붙여진 별칭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요한 곳’이라는 뜻을 가진 라 세레니시마다. 


 아마도 전쟁 전염병 등으로 혼돈을 겪던 다른 도시들에게 물로 둘러싸인 이 도시는 마냥 평화스러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고요한 그 도시 속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극찬한 곳에 1720년 12월 29일 ‘고요하지 않은 집’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 도시를 찾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일상의 용어가 생겼다.


 “플로리안의 집에서 만나자”는 뜻을 가진 “안데모 다 플로리안(Andemo da Florian).”


 300년 넘도록 이 집은 약속의 장소가 됐고 사람들의 대화소리로 가득 찼다. 카페 플로리안(Caffè Florian)은 고요한 베네치아에 자리한 고요하지 않은 카페였다.


“아름다운 응접실, 역사를 담다”


 베네치아는 567년 이민족의 습격을 피해 온 롬바르디아 사람들이 12개 섬을 간척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커피부록(15) 참조).

 동방무역을 확대한 뒤 14~15세기 초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이내 혼란의 시대를 경험했다.

 1797년엔 나폴레옹 1세가 점령했고 1866년엔 이탈리아 왕국군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이런 베네치아 역사의 한가운데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이 있다나폴레옹이 극찬한 바로 그 응접실이다. 


 광장엔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마르코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이 있다. 원래 대성당은 828년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훔쳐온 성물을 보관하기 위해 두칼레 궁전 옆에 지어졌는데 976년 일어난 반란 때 불타 없어졌다. 


지금 베네치아에서 만나는 대성당 건물은 116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공사를 통해 산마르코 광장의 동쪽 끝에 지어졌고 남북 쪽으로 크게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성당의 목조 돔은 석조로 바뀌었고, 돔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벽도 두꺼워졌다.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백미는 광장 쪽으로 보이는 서쪽 파사드다. 거대한 아치, 로마네스트 양식의 대리석 조각이 중앙 정문을 감싸고 있다. 아치의 위쪽에는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청동으로 된 네 마리의 말 콰드리가(quadriga)를 만나볼 수 있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바라본 대성당의 서쪽 파사드와 종탑. 오른쪽 사진은 종탑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계탑을 종탑 꼭대기에서 바라본 모습. 

 베네치아와 함께 지중해 무역을 지배하며 경쟁구도를 형성하던 제노바가 1379년 이 말들 '콰드리'에 재갈이 물려지지 않는 이상 두 도시 간 평화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네 마리 청동말은 침략의 역사 속에 약탈의 대상이 됐다. 

 1204년 4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베네치아 군이 콘스탄티노플 경마장에 있던 청동상을 산 마르코 대성당으로 가져왔고 베네치아를 정복한 나폴레옹이 이 말들을 끌어내려 파리로 가져가기도 했다. 1815년 베네치아로 돌아왔지만, 동상의 훼손이 우려돼 1970년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대성당과 함께 광장에 우뚝 솟아 있는 종탑은 1156~1173년 세워졌다. 1514년 복원된 종탑은 1902년 7월 북쪽에 심각한 균열이 발견됐고 1912년 7월 14일 오전 9시 45분 완전히 무너졌다. 지금은 새로 건축한 종탑이 세워져 있다.


 산 마르코 대성당의 북서쪽 모퉁이 맞은편에 세워진 르네상스 양식의 시계탑(Torre dell’Orologio)은 1499년 완공됐다. '메르체리아'라 불리는 시계탑 건물의 꼭대기엔 청동으로 만든 종과 무어인이 있고 측면엔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인 산 마르코의 사자, 시계판이 있다. 시계탑 건물 아래 아치로 된 길은 베네치아의 상업적 정치적 중심지인 리알토 지구의 상점가로 연결된다.

종탑에서 바라본 산 마르코 광장과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3개의 아케이드 건물. 오른쪽부터 시계반대 방향으로 프로쿠라티에 베키에-누오비시메-누오보.

 대성당과 함께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3개의 아케이드 건물은 프로쿠라티(Procuratie)로 총칭해 불린다. 산 마르코의 검찰관을 뜻하는 ‘산 마르코의 프로쿠라티에(Procuratore di San Marco)’의 집이나 집무실 등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세 개의 건물은 시간차를 두고 지어졌다. 당시 산 마르코 검찰관은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총독인 도제에 이은 2인자였다. 도제와 함께 귀족 중에서 선출됐고 종신직이었다.

이탈리아 출신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인 안토니오 콰드리가 조각가 디오니시오 모레티와 제작한 프로쿠라티에 베키에 입면도. 출처: 위키피디아

 세 건물 중 가장 먼저 지어진 건, 광장의 북쪽을 따라 지어진 ‘프로쿠라티에 베키에(Procuratie Vecchie)’다. 산마르코 대성당을 마주 봤을 때 광장 왼쪽에 있는 건물이다. 


 1514년부터 1538년까지 초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베네치아 최초의 주요 공공건물이었다.


 프로쿠라티에 베키에의 맞은편에 있는 남쪽의 프로쿠라티에 누오보(Procuratie Nuove)는 1583년부터 1660년까지 르네상스 전성기 모습으로 지어졌다. 

이탈리아 출신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인 안토니오 콰드리가 조각가 디오니시오 모레티와 제작한 프로쿠라티에 누오보 입면도. 출처: 위키피디아

 한때 누오보 아케이드 위층은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총독으로 임명한 의붓아들 외젠 보아르네(Eugène Beauharnais)의 관저로 쓰이기도 했다. 


 북쪽과 남쪽의 두 아케이드를 시각적으로 연결하는 프로쿠라티에 누오비시메(Procuratie Nuovissime)는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건물이다. 


 프랑스가 베네치아를 점령한 두 번째 기간(1805~1815년)에 신고전주의 양식을 담아 지어지면서 ‘나폴레옹 날개’라고도 불려졌다. 현재 누오보 일부 공간과 함께 코레르 박물관(Museo Correr)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페 플로리안은 3개의 아케이드 건물 중 프로쿠라티에 누오베에 자리하면서 베네치아의 역사를 목격하는 데서 나아가 역사적 장소가 되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이라는 역사 한 페이지”


1720년 문을 연 카페 플로리안엔 다양한 수식어가 있다. 가장 보편적인 수식어는 ‘현존하는 카페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카페’다. 

카페 플로리안은 사회화의 장소였던 카페가 사회 혁명을 가져오는 역할을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출처 : 플로리안 홈페이지

 ‘베네치아와 세계가 만나는 장소’, ’여성의 출입을 허용한 최초의 커피하우스’ 등도 있다.


 다양한 수식을 갖고 있는 이 카페의 원래 이름은 플로리안이 아니었다. ‘승리의 베니스’라는 뜻을 가진 ‘알라 베네치아 트리온판테(Alla Venezia Trionfante)’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 이름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몇 달이 지나 베네치아 사람들은 카페 문을 연 플로리아노 프란체스코니(Floriano Francesconi)의 이름에서 가져와 ‘플로리안즈(Florian’s)’라 부르기 시작했다. 


 부르기 편한 데서 나아가 커피의 매력을 알고 카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젊은 플로리아노의 이름을 부르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진취적인 상인 중 한 명이었던 플로리아노는 동양에서 온 귀중한 콩의 향기에 매료됐고 비잔틴 관습을 도입해 커피숍을 열기로 했다. 그리고 카페는 카페 이상의 기능을 했다. 


가벼운 식사와 다과, 친구들과의 만남을 모두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가 됐고 대화의 소재는 국가적 이슈부터 지역 소문, 최신 유행 패션까지 다양했다.

카페 플로리안은 성별과 계층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이 찾는 장소였다. 출처 : 플로리안 홈페이지

 카페 홈페이지엔 젊은 상인이 문을 연 카페 플로리안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아이디어, 문화, 지식의 교환은 더 이상 베네치아 귀족 가문의 거실에서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카페는 진정한 사회 혁명,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사회화의 장소였습니다.”

 

 설명 그대로 귀족과 정치인, 철학가와 상인, 예술가 등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은 지위에 상관없이 단골이 돼 카페 자리를 채웠다. 


 초창기엔 작가이자 철학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극작가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 작가 주세페 파리니 (Giuseppe Parini)와 실비오 펠리코(Silvio Pellico) 등이 찾았다. 


 골도니는 18세기말 퇴폐적인 베네치아 사회를 관찰하기 위해 카페 플로리안을 찾았고 1750년 ‘커피숍(La bottega del caffe)’이라는 제목의 희곡도 만들었다.


 문필가이자 바람둥이의 대명사인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i Casanova)에게도 카페 플로리안은 놓칠 수 없는 장소였다. 카사노바에게 여성이 허용되는 유일한 커피하우스인 카페 플로리안은 자신의 매력을 거부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만나는 장소인 동시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안보 기관인 10인 위원회를 위해 간첩 활동을 펼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랜드투어(Grand Tour)에 나선 귀족들에게도 카페 플로리안은 꼭 가야 할 명소였다. 그랜드투어는 17세기 중반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상류층 귀족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돌아보며 문물을 익히는 여행을 말한다. 바이런 경(Lord Byron),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도 여행 중 카페 플로리안을 찾았다.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사회적 이슈를 논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18세기 중반 가스파로 고치(Gasparo Gozzi) 백작은 초기 신문인 가제타 베네타(Gazzetta Veneta) 창간과 편집을 카페 플로리안에 있는 계절의 방에서 진행했다. 그는 신문에 게재할 정보와 소문을 카페 안을 돌아다니며 찾았다.

카페 플로리안을 찾은 팝아트 작가 앤디 워홀과 사인. 출처 : 플로리안 홈페이지

 이후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마네와 모네 등 수많은 예술가가 커피를 마시며 예술에 대한 담론을 즐겼다.


 헤밍웨이, 찰스 디킨스, 앤디 워홀과 프리드리히 니체, 장 콕토, 올리버 스톤, 찰리 채플린도 카페 플로리안을 찾은 고객 중 한 명이었고 현재 영국의 국왕인 찰스 3세도 손님이었다.


 기네스 팰트로, 맷 데이먼, 주드 로 등 할리우드 스타들은 이곳에서 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다. 


 이렇게 “안데모 다 플로리안”이라는 카페 플로리안의 모토는 3세기 동안 이어졌다. 


 만남의 장소이자 대화의 공간은 역사적 사건의 증인이자 무대가 되기도 했다. 카페 플로리안도 300주년에 맞춰 만화 형식의 출판물, '그림으로 보는 베니스의 카페 플로리안'을 발간하며 역사적 사건과 함께 카페 이야기를 담았다. 

 만화 속 화자는 카페 플로리안을 세운 플로리아노와 그의 사업을 이어받은 발렌티노(Valentino), 안토니오(Antonio)다.

카페 플로리안의 역사를 만화 형식으로 소개한 출판물을 소개한 메뉴판과 온라인 스토어. 출처 : 플로리안 홈페이지

 카페 플로리안은 시민 계급이 봉건적 특권 계급과 투쟁해 승리를 쟁취한 최초의 사회 혁명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에도 한 페이지를 썼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적 사상이 베네치아에 퍼질까 두려웠고, 카페 플로리안은 거슬리는 존재였다. 국제적인 고객이 다수 찾는 카페 플로리안은 프랑스혁명 때 생긴 자코뱅파 사람들이 만남을 갖는 장소였다. 


 결국 국가 심문관은 당시 카페를 경영하던 발렌티노에게 카페 폐쇄를 명령했다. 


 1797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점령하고 입성했을 땐 간판에 적힌 ‘베니스의 승리’라는 문구를 지우고 플로리아노의 이름만 적힌 간판으로 교체했지만 카페엔 당대 지식인들이 모여 저항그룹을 형성하고 자유의 정신을 불태운 민주주의의 성지였다.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에서도 카페 플로리안은 베네치아 애국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리소르지멘토는 이탈리아 반도에 여러 개로 나뉘었던 국가들을 이탈리아로 통일하자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이자 이탈리아 국민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이념적 문학적 운동이었다. 운동의 시작과 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고 빈 체제가 시작된 1815년부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끝난 1871년까지로 보고 있다.

리소르지멘토에 참여한 사람들이 부상자를 부축하며 카페 플로리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출처 : 플로리안 홈페이지

 나폴레옹이 통치하는 이탈리아 공화국과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지면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선 민족주의가 고취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유럽의 각 국가들이 국경선을 다시 정하기 위해 빈에서 모였다. 1815년 열린 빈회의다. 여기서 결정된 내용은 이탈리아의 국경선을 나폴레옹 시대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커피부록(10) 참조).


 이후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강대국들의 간섭이 이어지면서 이탈리아의 여러 주에서 재통일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카페 플로리안은 이탈리아 국가들을 외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정치적으로 통합시키기 위한 애국자들에게 중요한 장소였다. 카페 플로리안의 원로원 방은 이들이 회합하는 곳이었고 부상당한 애국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임시 병원이기도 했다.

 

 원로원 방에선 또 다른 모임도 있었다. 이탈리아 언어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니콜로 톰마세오(Niccolò Tommaseo)가 정치가 다니엘 마닌(Daniele Manin)과 만나 혁명적 봉기를 위한 조직을 논의했다. 두 사람은 1849년 9월까지 17개월이라는 짧은 역사를 남기고 사라진 제2의 베네치아 공화국 ‘산 마르코 공화국’을 이끌었다.


 카페 플로리안은 예술 인큐베이터가 되기도 했다.


 1893년 리카르도 셀바티코(Riccardo Selvatico) 시장은 카페 플로리안의 원로원 방에서 그의 예술가 친구들과 함께 도시의 여러 장소에서 펼쳐지는 미술 전시회를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리고 2년 뒤 ‘국제 현대미술 전시회(Esposizione Internazionale d'Arte Contemporanea)’가 열렸다. 올해로 129년째를 맞으며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화 행사이자 조직인 ‘베네치아(베니스) 비엔날레(La Biennale di Venezia)’의 시작이었다.

출처 : 베네치아 비엔날레 홈페이지

 미술전시회로 시작한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1930년대 음악, 영화, 연극이라는 새로운 축제가 탄생했다. 1932년엔 역사상 최초의 영화제로 꼽히는 베니스 영화제도 추가됐다. 1980년엔 건축전시회, 1999년엔 무용 축제가 시작됐다. 비엔날레의 출발점인 미술전시회엔 2022년 8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았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카페 플로리안의 사업도 확장됐다. 피렌체 중심부의 비아델파리오네(Via del Parione)에 매장을 열었고 두바이와 아부다비에도 현대적인 카페 플로리안이 문을 열었다.


 역사의 파고를 넘어온 카페 플로리안도 질병의 재난만큼은 피하기 어려웠다. 300주년이었던 2020년 카페 플로리안은 “3세기의 촛불을 꺼뜨릴 뻔 했다”고 고백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탈리아는 국경을 폐쇄했고 국가 간 이동은 물론 외출도 제한했다. 카페 플로리안의 한해 매출은 80% 감소했다. 주주와 은행의 재정 지원으로 버텼지만, 끝을 알 수 없는 팬데믹 상황에서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 없었다. 


 플로리안 운영이사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고 있지만 현재로선 전망이 없다. 카페가 문을 닫으면 커피 한 잔이 아니라 베네치아의 한 조각을 잃는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코로나로 위기를 맞은 카페 플로리안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 출처 : WSJ, 더 스페이스 홈페이지

외신도 이 유서 깊은 카페의 위기를 잇따라 보도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세계 대전도 막지 못한 코비드가 베니스의 카페 플로리안을 막았다(World Wars Couldn’t Stop Venice’s Caffe Florian. Covid Did)’는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다. 영국의 건축 공간 전문지인 더 스페이스(The Spaces)도 300년 역사의 카페 플로리안이 직면한 위기를 전했다. 


 카페 플로리안을 살린 건 이 카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폐점 가능성이 제기되자 현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온라인 스토어에 모였다. 엔데믹을 선언한 뒤엔 사람들이 베네치아를 찾았고 카페 플로리안은 다시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컨셉과 특색을 담은 공간”


 세월의 이야기와 함께 카페 플로리안은 공간으로도 새로운 경험을 준다. 오랜 역사를 품은 듯한 프레스코화, 샹들리에 조명, 거울, 벨벳 소파만 있는 게 아니다. 각 방마다 나름의 주제를 정하고 이에 맞게 꾸몄다. 

출처 : 플로리안 홈페이지

 현재 카페 플로리안엔 6개의 방이 있지만, 플로리아노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땐 간소하게 꾸며진 방 두 개뿐이었다. 1750년 새로운 객실 두 개를 추가했다. 


 그 사이 카페 주인도 달라졌다. 


 1773년 플로리아노의 조카 발렌티노가 사업을 이어받았고 1814년 발렌티노는 아들인 안토니오에게 카페를 물려줬다. 


 카페 플로리안이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한 건 1858년 조반니 파델리(Giovanni Pardelli)와 피에트로 바카넬로(Pietro Baccanello), 빈센조 포르타(Vincenzo Porta)에게 카페가 매각되면서다. 새로운 소유자들은 베네치아 미술 아카데미의 건축가 로도비코 카도린(Lodovico Cadorin)에게 카페 복원과 실내 인테리어를 의뢰했다. 


 이때부터 각 방에 이름이 부여됐다. ‘원로원 방(Sala del Senato), ‘그리스 방(Sala Greca)’, ‘중국 방(Sala Cinese)’과 ‘오리엔탈 방(Sala Orientale)’이었다. 그중 원로원 방과 중국방, 오리엔탈 방은 지금도 카페 플로리안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원로원 방의 벽과 천장을 장식한 11개 패널엔 프리메이슨 상징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가장 먼저 인테리어가 이뤄진 곳은 원로원 방이다. 출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있는 이 방은 베네치아 최고의 예술가와 장인들이 ‘계몽주의 시대’나 ‘국가를 교육하는 문명’ 등을 주제로 한 11개 패널로 공간을 장식했다. 


 패널 속 그림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 재미도 있다. 비종교적·비정치적 성격의 비밀 단체인 프리메이슨 상징을 삽입해 베네치아가 특정 비밀 조직이나 계몽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암시하거나 숫자 ‘XIX'가 새겨진 돌 위에 손을 얹은 천사 등 수수께끼 같은 퍼즐도 담았다.

할리우드 배우 겸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원로원의 방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 출처 : 플로리안 홈페이지

 원로원 방의 재미는 예술적 가치만 있는 게 아니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시작된 곳, 리소르지멘토에 동참한 공간이라는 역사적 가치도 있다. 


 덕분에 베네치아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공간이기도 하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산 마르코 광장은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출입구를 기준으로 원로원 방과 반대쪽에 있는 중국 방과 오리엔탈 방은 나란히 연결돼 있다. 두 방은 동양적 분위기를 풍기며 유럽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듯싶다.


 중국 방은 가상의 중국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안토니오 파스쿠티(Antonio Pascutti)의 그림이 금색틀의 액자 안에 담겨 걸려있다.

나란히 연결된 오리엔탈 방과 중국 방은 동양미를 느낄 수 있다. 출처 : 플로리안 홈페이지 

 오리엔탈 방은 터번을 둘러쓴 남자, 베일을 벗은 여자 등 이국적인 사람을 자코모 카사(Giacomo Casa)가 프레스코화로 그렸다.  


 특별한 풍경을 선사하는 두 방은 단순히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듯 카페 플로리안만의 세심한 배려도 엿보인다. 방과 방 사이 공간에 배치한 거울이다.


 “두 방 사이의 작은 통로 벽에 달린 거울은 미로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중국에서 동양으로 이동하면서 당신의 이미지가 수없이 당신에게 반사된다”는 게 카페의 설명이다.


 1872년과 1891년 추가 복원이 이뤄지면서 새로운 방 두 개가 추가됐다.


  ‘저명인사의 방(Sala degli Uomini Illustri)’과 ‘계절의 방(Sala delle Stagioni)이다. 

‘저명인사의 방’은 고풍스러운 테이블, 의자와 함께 베네치아 출신의 저명한 10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출처 : 플로리안 홈페이지

 저명인사의 방은 중세 골동품 가게를 보는 듯 고풍스러운 테이블과 의자로 장식돼 있다. 벽에는 골도니, 마르코 폴로, 티치아노 등 베네치아 출신의 저명한 10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거울의 방(Sala degli Specchi)으로도 불리는 계절의 방은 빈센조 로타(Vincenzo Rota)가 사계절을 대표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장식했다. 


 1920년 카페 창립일에 맞춰 만들어진 ‘자유의 방(Liberty Room)’은 1986년까지 창고로 쓰이다가 대중에게 공개됐다.

 이 방은 그림이 그려진 거울, 목재 웨인스코팅, 세공 마루 바닥과 무라노 유리의 조명 램프 등 아르누보 양식으로 장식됐다.


 “은색 트레이에 담긴 스타일”


 이제 커피를 경험할 차례다. 메뉴판에 적힌 카페 플로리안에 대한 설명은 기대감을 한 껏 높인다.


 "은색 트레이(쟁반), 웨이터 등 독특하며 시대를 초월한 스타일로 유명해진 플로리안은 수년 동안 우아함과 세련미가 특징인 이탈리안 스타일의 품질 좋은 제품을 제작해 왔습니다. 베네치아 사람과 외국인 모두 우리 카페의 독특한 분위기에 푹 빠졌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여러분을 따듯하게 환영하는 것뿐입니다.”


 설명 그대로였다. 다림질한 셔츠와 베스트, 그 위에 수트를 입고 보타이와 광을 낸 구두로 멋을 낸 웨이터는 미소를 담아 손님을 반겼다. 

원로원 방은 푹신한 좌석, 패널 속 그림으로 장식돼 있다. 바닥에 고정된 테이블의 대리석 다리가 이채롭다.

 웨이터가 안내한 공간은 원로원 방이다. 푹신한 좌석, 화려한 패널 속 그림과 바닥에 기둥처럼 박힌 대리석 테이블이 꽤나 멋지다. 9년 전 야외에서 마실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좌석이) 괜찮냐”는 웨이터의 질문에 정직한 답이 돌아갔다. “물론이죠.”


 9년 전 마신 에스프레소는 과감히 포기했다. 참고로 카페 플로리안은 에스프레소 추출을 위해 중앙아메리카와 브라질산 최고급 아라비카, 최고급 인도산 마이소르 로부스타를 블랜딩했다. 


 카페 플로리안은 “조화로운 구성을 통해 코코아와 동양적 향신료의 향이 가미된 강렬한 바디감을 선사하고 있다. 진정한 에스프레소 맛을 위해 만들어진 블랜드”라고 설명했다. 

은색 쟁반에 담겨온 커피와 디저트가 대리석 테이블에 올려져 있다.

대신 카페 플로리안에 가면 꼭 먹어야 할 카푸치노부터 주문했다. 오전 11시를 훌쩍 지났지만, 여행객이기에 허용되는 주문이었다. 


 이어 웨이터에게 카페 플로리안만의 커피와 디저트 추천을 부탁했다.


 ‘총독의 커피’라는 의미를 가진 카페 델 도지( Caffè del Doge)와 티라미수를 권했다. 카푸치노나 티라미수의 맛은 상상이 가능했지만, 카페 델 도지는 종잡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얻은 정보는 커피, 초콜릿 크림, 우유 그림과 헤이즐넛 등 메뉴판에 적힌 재료뿐이었다.


 잠시 후 은색 쟁반이 대리석 테이블에 도착했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카페 델 도지의 맛은 독특했다. 에스프레소와 초콜릿 크림이 섞이고 우유 거품을 얹은 뒤 마지막에 헤이즐넛 가루를 토핑으로 뿌렸다. 


 첫맛은 부드러웠고 달콤한 초콜릿 맛이 들어오더니 마지막으로 에스프레소의 쌉싸름한 맛이 느껴진다. 티라미수와는 카푸치노보다 카페 델 도지가 어울리는 듯했다. 웨이터의 탁월한 조합이 느껴졌다.

4~10월 카페 플로리안을 찾으면 야외 테이블에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출처 : 플로리안 홈페이지

 커피를 마시고 나오는 길, 산 마르코 광장에 펼쳐진 카페 플로리안의 야외 테이블이 보인다.


 4월부터 10월까지 카페 플로리안이 산 마르코 광장을 콘서트홀로 만들면 1등석이 되는 곳이다.


 20세기 초부터 카페 소속 오케스트라는 오페라 작품부터 현대 히트곡까지 다양한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고 있다.


 다만 연주비는 음식값과 별도로 내야 한다는 점은 부담이다. 1인당 6유로다. 비싼 가격이 걱정된다면, 굳이 카페 테이블에 앉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음악은 응접실을 찾은 누구에게나 듣는 걸 허용한다. 


 야외 테이블에 앉은 손님을 위해 출입구 쪽에 서 있는 웨이터들의 복장도 색다른 느낌을 준다. 17, 18세기 이탈리아 신사들이 입었던 망토 복장이다. 망토의 효능을 물었더니 “담요를 두른 것처럼 따뜻하다”며 멋보다는 기능에 높은 점수를 줬다. 겨울의 초입에 있는 만큼 공감이 간다.

수트 위에 이탈리아식 망토를 입은 웨이터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이제 산 마르코 광장을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담요처럼 따뜻한 망토를 입은 웨이터에게 인사를 남긴다.

 “안데모 다 플로리안”. 


 '또다시 베네치아를 찾는다면'이라는 전제와 함께.




*참고 자료 : 카페 플로리안, 비타가제트, 이미지오브베네치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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