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무거운 팔자 1

장미정원 21-1

by 늘품이

한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마르고 청정한 날씨가 이어졌다. 바람은 상쾌했고 하늘은 더없이 높았다. 낙엽들은 길을 숨길 작정을 한 마냥, 틈이 보이지 않게 길을 모두 덮어버렸다. 길을 내기 위해 하나둘씩 치우던 것이 지금은 아침의 일상이 되었다.


이런 아침의 일상은 매일 같이 감동을 선사했다. 처음엔 이보다 멋질 수가 있을까 했더랬다. 사방이 초록이었으나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같은 초록이 없었다. 그 공통의 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시선은 선명해지고 정신마저 또렷해지는 듯했다.


그런가 싶더니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둘씩 주황으로 변해갔다. 이 역시 어느 것 하나 같은 주황이 없다. 당장 여기에 흐트러진 수많은 낙엽조차 같은 하나가 없이 천차만별이었다. 이렇게 무수한 색들이 만들어 내는 가을을 대체할 수 있는 미사여구가 과연 있기는 있을까!


'나에게 가을이 처음인가?'


마치 지구상의 가을을 처음 맞이한 이처럼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큰 감동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의 감정에 내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내가 지구에 불시착한 것도 아니고, 가을이 처음일리가 없다. 질문이 잘 못 된 것이었다.


'가을을 만끽한 적이 있었던가?'


이리 아름다운 것을 들여다본 적 없었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기껏해야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한 기온에 와! 날씨가 좋구나..... 하고 숱하게 가을을 넘겼을 것이다. 나는 늘 바빴고 고민하지 않았다.


공기마저 이렇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세상에 로미와 함께 만끽했던 것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열심히 살았지만, 진정으로 내가 열심히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으며, 그로 인해 놓쳐버린 시간이 너무 아깝고 아쉬워서 가슴이 미어진다.


그냥 그런 것이다. 간절한 바람을 갖는 건 아니다. 불가능한 것에 미련을 갖는 것 또한 아니다. 다만 언제부턴가 그냥 숨을 쉬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그랬더라면......' 하는 회한의 입안말이다. 늘 입에 달고 살던 입안말들이 가끔씩은 가슴 밖으로 뚫고 나와 사무치고 나오는 그런 것이다.


낙엽을 한둘 주우면서 이 낙엽을 같이 주워 봤더라면, 초록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어떤지 함께 들어봤더라면, 노을 지는 바다의 윤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함께 보았더라면......!


"미안해...... 아직도 살아서 그걸 혼자만 보고 있어서....."


오늘도 중얼거린다. 그리움마저 익숙해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실례합니다."


생각이 깊어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녀가 나란히 서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저기가 로즈가든 맞죠?"


"네. 아직 오픈 전이라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그냥 앞에서 사진만 찍어도 괜찮을까요?"


"네, 그럼요. 그렇게 하셔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죄송하지만......"


남자는 말을 주춤거렸다.


"안에도 들어가 봐도 될까요? 거기 사진 스폿이 있던데 사진만 금방 찍고 나올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상기된 얼굴로 수줍게 묻는 어린 커플들이 너무 예뻐서 웃음이 나왔고, 그렇게 열심히 매달리던 SNS의 효과를 보는 건가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SNS에서 봤는데 정말 멋지더라고요."


"네, 맞아요. 올라가세요. 전 하던 일이 있어서요."


남녀는 그 짧은 거리를 올라가면서도 희희낙락 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이모!"


오전부터 이모는 가게 앞 평상에 앉아 감을 깎고 있었다.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에도 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게 다 뭐야?"


"곶감이나 만들까 하고, 감 깎을 줄 알아?"


"그것도 뭐 알아야 하나."


언니는 주방에 들어가서 과도를 챙겨 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감을 깎기 시작했다.


"이 많은 감을 어디서 난 거예요? 산거예요?"


"아니, 아침에 저기 영순이 할마씨네 대봉감 밭 일손 필요하대서 갔다가 품삯으로 좀 받아왔지."


"아이고! 좀 쉬셔. 가서 일해주고 일거리 또 가져오고.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손 놀면 뭐한다간. 손 놀 리면 못 써."


"누가 놀래? 쉬랬지."


"그렇게 아니고, 꼭다리를 떼버리면 안 되고 옆으로 살살 요렇게 돌려서 깎아야지."


"이렇게?"


"아이고, 살을 다 버려 부리네."


언니의 서투른 솜씨가 우스웠는지 이모는 피식피식 웃었다.


"지원이는? 지원이 쟨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너무 나한테만 뭐라 하는 거 같은데?"


"잘하고만, 많이 해본 솜씬디."


"어릴 때 이맘쯤이면 할머니랑 매번 했어요. 오랜만에 해서 폼이 잘 안 사네요."


어릴 적 시골집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주인 없는 감나무가 있었다. 돌보는 이 없어도 때가 되면 늘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어차피 주인도 없는 감인데, 할머니는 절대로 먼저 따는 일이 없었다. 땅에 떨어지면 그제야 성한 것들을 추려 주워 오셨다. 매일 저녁 대여섯 개씩 깎아서 말리고, 깎아서 말리고 했었다.


"고생을 사서 한다는 게 이모를 두고 나온 말이네. 이모 손 좀 봐봐. 불쌍하지 않아? 손도 좀 쉬어야지!"


"손을 놀리면 머리가 더 무거워지는겨."


"손을 쓰면 머리가 가벼워지나?"


"그라제. 머리 무거운 팔자를 타고났으니 어째, 쉼 없이 손을 움직여야지."


"그럼 내 팔자는 자면서도 손을 써야겠고만."


언니와 이모는 농담처럼 주고받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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