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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 di Oct 01. 2024

대화가 필요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혐오와 차별이 난무한 사회 속 필요한 건 경청이다

공휴일 아침, 스트레칭을 하며 새롭게 볼 만한 컨텐츠가 있는지 넷플릭스를 보던 중 '우린 반대야'라는 드라마가 눈에 띄었고 마침 좋아하는 배우인 크리스틴 벨이 나오길래 보게 되었다. 원래 볼만한 컨텐츠를 찾는 데 오리걸리는 사람으로 이전과 달리 한 번에 보고픈 새로운 드라마가 있어 설레었다. 


1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순간 근래에 머릿속을 떠다녔던 생각들이 딱 정리되는 느낌을 받아 2화 보기를 미루고 글을 쓴다.


스포는 아니고, (1화 밖에 못봐서 스포라고 할 것도 없다) 대충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있는데 남자주인공이 랍비이고 여자주인공은 무교인 거 같다. 1화 마지막 장면에서 랍비인 남자주인공이 설교를 마치고 회당에서 나오려는데 남자주인공과 결혼을 시키고자 하는 회당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를 데리고 그를 둘러싸고, 여자주인공, 크리스틴 벨이 회당에 찾아오게 되면서 남자주인공은 사람들을 재치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뼛속까지 유대교인 그의 어머니는 옆에서 누군가 "누구야?"하고 그녀를 보며 묻자 일면식 없는 여자주인공을 무섭게 바라보며 "이방인이야"라고 말하고 1화가 끝이난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든 생각 '이거다'.

내가 근래에 뉴스와 관련 여론들을 볼 때 마다 들었던 생각이 하나로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서로를 '이방인'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각자가 담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혐오'의 감정을 갖는다는 생각도 뒤를 이어 들었다. 여기서 내가 말한 혐오는 부적절한 비난과 매도, 그리고 차별을 의미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를 보다보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서로를 향한 혐오가 난무한다. 

서로 다른 사고, 이념, 모습은 공격을 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각자 생각하는 올바름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이해해 나가야할 대상이다. 


매일 어떤 사건, 어떤 사고가 일어난 뉴스를 보다보면 그 사건사고에 휘말린 개인 혹은 집단을 프레임을 씌워 바라보거나,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바라보는 사회를 마주하곤 한다. 심지어는 사건과 관련없는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다. 당장 예로만 해도 여러 주제들이 떠오르지만, 굳이 이 공간을 싸움의 터로 만들고 싶지 않고, 그러라고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여튼, 서로에 대한 증오, 차별, 혐오의 모습을 볼 때 드는 생각은 '왜들 이렇게 서로를 싫어할까?'였다. 공감, 연대, 신뢰는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타인에 대한 적개심만 남은 사회를 보다보면 회의감도, 속상함도 가득해진다. 


누구나 개인의 가치관, 의견, 신념, 이념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세상은 내 이념이, 신념이, 의견이 '무조건적으로 옳고', '나와 다른 신념과 의견을 가진 사람은 틀리다'라는 명제로 굴러간다고 느껴진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하는 것은 내 이념이, 내 신념이, 내 의견이 타인을 공격하는 것에 타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가치관은 '다른'거지, '틀린'게 아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물론, 사람들이 경우없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면서 그런 분노가 쌓이고, 쌓인 분노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신뢰보다는 적대감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를 속이거나 때리고,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것 등 도덕적인, 사회규범적인 기준에서의 잘못은 '틀린' 것이 맞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적어도 한번쯤은 타인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설령 그게 나와 다른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더라도 말이다. 


나는 사회적 자본, 정신건강과 관련된 연구를 하는 연구자이다. 둘의 연관성을 연구할 때도 있고, 각각을 연구할 때도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특히 어떤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지 민감하게 관찰하게 된다. 


사회적 자본(사회 신뢰, 네트워크, 공동체 의식, 소속감 등)은 국가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이지만 무엇보다 개인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여러 연구들을 통해 발견된 것은, 개인이 갖게 되는 타인에 대한 신뢰, 공감, 연대는 정신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삶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순히 '예. 뭐 사회가 이따구인걸 어쩌라고요'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사회를 위해서 한 번쯤은 어떻게 이 사회가 흘러가야하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왜냐면 그 사회 속의 나는 한 명의 일원이고, 그리고 그 태도가 결국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실 정답은 모두가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감과 연대'이다. 

진부하고, 쉬운 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과연 진부하고 쉬워서 사람들이 공감과 연대를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그만큼 어렵고, 어렵기에 귀찮게 다가와 하지 않는 것이다. 공감과 연대보다 혐오와 차별이 더 쉽기 때문에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고, 그 후자를 통해 우리 사회가 점점 각박해지는 것이다.


공감은 타인이 이런 상황 속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구나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온전히 그 사람이 느낀 감정과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아 저 사람은 저 상황 속에서 저런 감정, 어려움을 느꼈구나. 그럴 수 있겠다' 정도는 생각할 수 있다

나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와 타인은 다른 사람이기에 저 사람은 저런 선택을 했구나, 저런 생각을 했구나. 라고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무조건적으로 '넌 틀렸고, 니 행동도 틀렸으니 조용히 하렴'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왜 저런 행동을 할까?', '왜 저런 말을 했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연대라고 생각하는데, 같이 활동을 하거나 그러지 않더라도 응원하는 것도 하나의 연대라고 생각한다. 물론, 공감이 가지 않는다면 연대를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단지 이 글에서 전하고 싶은 건 적어도 한 번쯤은 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앞서 여러번 이야기했던 것 처럼,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기에 타인의 어떤 부분들이 공감가지 않을수도, 다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가장 필요한 건 '경청'인 것 같다. 

대화는 공격이 아니라, 의견을 주고받음이고, 존중이 바탕된다. 내 앞의 사람이 아무리 이상한 소리를 싸지르는 것 같아도 일단 들어보는 것이 대화의 기본 전제이다. 경청이 없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집단 독백일 뿐이다. 공감과 연대도 경청이 우선되어야지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공감하고 연대한다면 그건 허울뿐인 공감과 연대이다. 그리고 충분히 경청해보았음에도 공감이 가지 않아 연대하지 않는다해도 그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적어도 타인의 생각에 경청해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경청이 없는 사회는,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다. 

누군가 A를 얘기하는 순간, B가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A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매도하고, 마찬가지로 A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B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매도한다. 이런 갈등과 서로를 향한 혐오는 개인의 건강에도, 그리고 국가의 자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경청을 해야한다. 

쌉소리 같이 느껴지더라도 일단은 들어보고 쌉소리라고 판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드라마 하나로 근래에 들었던 수많은 생각들이 정리된 것도 특이한 경험 같다.

하여튼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따뜻하고 서로를 위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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