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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n 10. 2024

금쪽이와 엄마

삶을 유지시키는 괴상한 힘

  사람은 살아가는 데 힘이 꼭 필요합니다. 누구는 목표 누구는 원동력 누구는 희망... 뭐 다양한 말로 불리지만. 평탄하지만은 않은 삶을 유지시키는데 큰 에너지가 들기에 그 에너지를 공급시켜주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각자 다양하게 생겨먹은 만큼 각자 다양한 삶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때도 있네요. 꿈을 향해 달려가거나 자식을 위해 희생하거나 하는 '좋은' 방향성의 에너지원도 있지만... 자신을 착취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나쁜'방향성의 에너지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좋고 나쁨은 언제나처럼 각자마다 다르겠으나 확실한 건 두 모습 모두 하나의 사람이 살아가는데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이네요.

 국문과지만 한국문학(정확히는 한국 현대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는 수업 시간에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렇게 내용이 기억에 남는 책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극찬을 마지않는 오정희 작가나 김승옥 작가도 저에겐 그렇게 큰 감명을 주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뭐 제가 문알못이라 그렇겠지만 어쩌겠나요... 하지만 몇몇 개의 제목도 작가도 기억나지 않는 강렬한 장면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단편이었습니다. (진짜 오래 풍화된 기억이라 정확한 내용인진 모르겠음. 아는 국문과 있으면 말 좀...)

 남편을 빨리 여의고 하나뿐인 아들을 키워낸 '나'에겐 아들은 세상의 전부와도 같았습니다. 아들은 '나'의 큰 기대만큼 올곧고 바르고 똑똑하게 성장했으며. 학교도 서울대에 진학해 전망이 창창한 청년이었죠. 하지만 아들은 졸업하기 직전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죽었고 '나'는 세상을 잃은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아들을 떠나보냈습니다. 대단한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에 친구들은 모두 슬퍼했지만 그래도 옳은 일은 한 멋진 사람이라고 치켜세워 줬죠.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며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도 '나'는 살아 있습니다. 소일거리도 하며 삶을 유지하고 있었네요. 점차 그 의지를 잃어가던 날. '나'를 걱정하며 자주 들리던 친구를 통해 연락이 한참 끊겼던 오랜 친구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같이 가는 친구는 그녀가 연락이 끊겼었던 이유를 말해주는데. 그녀 역시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었고 그녀의 아들 역시 운동을 하다 머리를 다쳤다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나'보다 2배는 늙어 있었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환자의 쾌쾌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엔 침을 흘리며 누워 있는 그녀의 아들이 있었네요.

 '나'는 같이 온 친구와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다 늙은 얼굴로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며 자신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 아들의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얼마나 억울한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누워있던 아들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그녀는 찡그린 표정이지만 능숙한 솜씨로 아들을 뒤집어 기저귀를 벗겨 그가 이불 속에서 싼 대변을 치웠습니다. 퍼지는 대변 냄새와 아무 부끄러움 없이 아들의 바지를 내리는 모습에 같이 온 친구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쳐다보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곳에서 뭔지 모를 생명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의 우는 모습을 보며... 전율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비통함이나 슬픔이 아니라... 질투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멋지고 잘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아들보다 아무것도 못하는 무거운 짐덩이인 아들이 똥이나 지리며 살아있는 게 더 부러웠기 때문입니다. 폭삭 늙어버린 친구는 분명 엄청난 고생을 했고 이제 가면 갈수록 그 고생은 더 심해지겠지만... 삶을 유지시키는 괴상한 힘이 그녀에겐 있었고 '나'에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늦둥이고 아빠도 사실상 늦둥이에 가까운 사람이라(막내가 아닐 뿐) 저는 조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외할아버지도 술 담배 때문에 많지 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분이라고는 저를 키워주셨던 외할머니뿐이시네요. 그래서 저는 할머니와 할머니 집이라고 하면 영해의 작은 푸른 처마의 집이 떠오릅니다. 외할머니는 올해로 90이 되셨지만 아직도 남들의 도움 없이 자신의 삶을 소화해 내는 멋지신 분입니다. 요리도 잘하시고 아직도 우리 집의 고춧가루는 할머니가 농사지으신 것이네요. 할머니는 나이보다 훨씬 건강하십니다. 

 저는 그 이유 중 가장 큰 게 큰 외삼촌의 존재라고 생각해요. 엄마가 이 말을 들으면 크게 화를 내겠지만... 저는 아무래봐도 그렇게 보이는걸요.

 장녀인 엄마 아래 외삼촌들은 총 4분이 계셨습니다. 그중 바로 아래 첫째 외삼촌은 꽤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셨네요. 제일 많은 지원을 받으며 공부해 좋은 직장에 들어갔으나 IMF 이후로 변변찮은 일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과거를 생각하며 기고만장하며(이해는 합니다. 안 그러면 살기가 너무 힘들 테니까요) 장남 행세 웃어른 행세를 하려 하니 당연하게 아내는 떠나고  자식들도 이제 그를 찾지 않습니다. 그런 외삼촌은 아직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IMF 세대니까 28년 정도를 외할머니께서 챙겨준 거죠. 그런 은혜가 고마워 조용히 살면 좋았겠으나 성미상 그러시진 못했습니다. 항상 할머니 말을 듣지 않았고 아직도 가부장제를 신봉했죠. 언제는 엄마에게 막말을 해서 저와 싸운 적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외삼촌은... 좋게 말하면 한량 나쁘게 말하면 버xx. 할머니는 항상 한숨 쉬며 외삼촌 이야기를 하십니다. 내가 쟤 때문에 죽겠다고. 

  하지만 웬걸요. 저는 외삼촌이야말로 할머니를 살리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할머니에겐 ... 염증으로 썩어터진 손가락에 가깝겠지만... 그 아픔과 마음 조림이 할머니의 삶의 원동력이라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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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 개소리를 하는 멋쟁이가 있습니다. 멋쟁이 특 부모님 속 개썩임. 이 멋쟁이도 다를 바 없었고 어릴 때 이야기를 들어보면 보통 육아 난이도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말을 들어 처먹어야지.

 학교 갈 땐 아무래도 교복을 입는 게 좋지 않을까?

  교복 입기 싫어.

 그래도 입어야지. 교복은 하나의 말이야. 네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뜻을 함유한.

 그럼 나는 언제 말해. 답답해.

 성인이 되면 하고 싶은 말 다 하렴.

 성인의 기준은 도대체 뭔데 난 지금 성인이라 생각해.

 ... 니 맘대로 해라...

좀 맞자 금쪽아. 어머니가 저렇게 지성적으로 말해주시는데...

하지만 이젠 성인이 되어 멋지게 변해버린 멋쟁이에게 이제 어머니의 관심과 정성은 별로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ㅋㅋㅋ 이래서 아들 키워 봤자라고 하나 봅니다. 울 엄마도 맨날 그래). 본인 앞가림은 본인이 잘 하니까요. 

그리고 크리티컬한 한마디.

이젠 엄마의 삶도 찾는 게 좋다 생각해,

ㅋㅋㅋㅋ ㅅㅂ 금쪽 아들들은 모두 다 똑같은 루틴을 밟는 모양입니다. 제 입으로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라니.

틀린 말도 아니고 맞는 말도 아니고 좀 맞아야 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못할 말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젠 단지 엄마의 서운함을 좀 이해할 뿐. 

엄마에게 아들은 이상한 존재입니다. 자신과 닮았지만 전혀 다른 생물을 키우며 보통 에너지를 쓰는 게 아니죠(아들 2 이상 키운 엄마들이 딴딴해지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 힘들고 짜증 나게 하지만... 자신이 낳았으니 책임을 지려 노력하죠. 정말 잘해줄 순 없더라도 할 수 있는 것만큼은 최대한 남들 꿀리지 않은 만큼은 최소... 이걸 하고 싶지 않은 엄마는 없을 겁니다. 단지 엄마도 나와 같은 사람일 뿐. 지금 제 나이에 엄마가 누나를 낳았다는 걸 생각하면 저는 아찔해지기만 합니다. 

 아들은 아무리 봐도 엄마에게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책임감 때문에 1년 2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 그게 삶의 원동력이 되어버리지 않나 싶습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다 정이 많이 들어버리는 거죠. 그렇기에 그런 미운 놈이 떠나간다 할 때... 엄마는 분명 후련하겠지만... 왠지 모를 더 큰 서운함과 우울함을 맞이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젠 엄청나게 에너지를 쏟을 데가 없거든요. 잉여 에너지는 불안과 잡념을 일으킬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젊을 때처럼 무엇인가 새로운 걸 찾아 나서기엔... 쉽지 않습니다. 또 옆에는 늙어서 아무 관심도 없는 남편뿐... 쓰다 보니 너무 서글프네요.

저 역시도 금쪽 아들이었고 비슷한 경험을 겪었지만... 다행히 서울로 상경하는 바람에 엄마는 일종의 콜드 터키처럼 저를 끊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초반엔 수많은 서운함이 담긴 메시지와 전화가 왔지만... 그때는 짜증만 내버렸네요. 좀 내버려두라고. 이제 좀 신경 좀 쓰지 말고 엄마 삶을 찾으라고. 다시 돌아가도 비슷한 말을 하겠으나... 좀 예쁘게 좀 말하지. 물론 남 탓 같겠지만... T100인 엄마에게 예쁘게 말하는 법을 배우질 못했으니 엄마 탓도 없다고 할 순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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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 외삼촌은 앓는 이입니다. 맨날 아프고 신경 쓰이고 어떻게든... 고치고 싶은 그런 존재. 하지만 할머니는 그 덕에 삶의 목표성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계신 걸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는 일어나서 당뇨를 위한 산책을 하고 외삼촌 밥을 챙겨주고 약 먹고 잠깐 잤다가 밥 먹고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좀 하다 외삼촌 밥을 챙겨주고 Tv를 보다 잠드십니다. 짧고 피곤한 하루지만... 분명 내일 일어나야할 이유가 있는 삶이네요. 누구는 그걸 가치 없는 착취의 순환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예쁘게 말해보자면... 저는 그게 할머니 삶의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삶의 목표는 꼭 필요합니다. 없으면... 솔직히 살아가기 쉽지가 않으니까요.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도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도 지구  평평설을 믿는 사람들도... 썩 좋은 원동력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비슷한 계열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괴상한 힘. 이상한 혹은 기괴한 힘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네요. 그게 좋지 않은 방향이라도 그들에겐 삶의 힘이 되어주니까요. 

 물론 그런 순간을 긍정하는 건 아닙니다. 저희 할머니도 좀 더 편안하고 좋은 방향으로 삶의 원동력을 찾으셨으면 좋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겠죠. 단지 그런 기괴함 힘이 있다는 걸 알고  남의 삶에 대해 너무 함부로 말하지 않기를 저 자신에게 다짐할 뿐입니다.

 맨날 돈도 안되는 글이나 쓰며 하루를 버티는 것도 일종의 '괴상한 힘'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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