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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y 12. 2024

一末上初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그를 맞이하는 마음가짐


 일말상초(一末上初)


 군대에 간 성인 남성이 연인이 있을 때. 이등병부터 일병 4호봉까지 잘 만나다 일병 5호봉에서 상병 3호봉 사이. 군대라는 곳에 익숙해질 무렵. 급격하게 연인과의 관계가 틀어지며 헤어짐을 겪는 것을 지칭하는 말. 일병 말 ~ 상병 초에 일이 생긴다고 하여. 일말상초.


일병과 상병의 중간이니 군생활 반쯤 한 애매모호한 상태입니다.



 일말상초. 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지만. 나중 가서 주변인들을 보고 그리고... 본인을 보고 옛말이 틀린 게 없구나를 느끼게 하는 마법의 단어입니다. 다들 군대를 기다려준다는 것에 큰 감사를 느끼고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짐하지만. 본인의 잘못이든 밖에 있는 곰신의 잘못이든. 어떠한 이유로 해어질 때. 그때가 보통 일말에서 상초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붙은 것이죠. 진짜 신기하게도. 저시기 전에는 아무도 밖에 있는 곰신과 헤어지지 않고 저 시기를 버티면 헤어지지 않고 전역을 했습니다. 


 저 역시도... 어찌어찌 잘 넘어가나 싶더니. 고대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저 역시도 상병 3호봉에 헤어졌으니까요. 1년을 기다려준 그 친구에게 미안할 따름이지만, 어쩔 수 없죠. 아직도 후회하는 선택은 아니라 생각하니까요. 서로 피곤하게 만드는 관계는 여전히 가치가 없다 느낍니다.


 아마 일말상초라는 이야기가 나온 게 수십 년 군대 역사의 빅데이터 속에 나온 말이겠지만. 저는 그 이유를 알 것만도 같습니다. 저를 포함에서 몇몇의 표본 집단을 살펴보았을 때. 나름의 이유가 도출이 되었거든요.


1.드디어 익숙해진 군대.

 처음 군대라는 곳에 들어간 훈련병 때나 자대를 처음 배치받는 이등병 때. 그리고 일을 배우고 선임들과 간부들과 관계를 쌓아야 하는 일병 초. 그때 보통의 남성이라면 큰 혼란과 두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본인이 살아왔던 것과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환경과 강압적이고 딱딱한 분위기는 사람을 위축시키고 바보로 만들죠. 그때 이성친구가 있다는 건 낮아진 자존감과 멀어진 현실을 어느 정도 복구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정말 큰 힘이 된다는 말이죠. 그때는 실제로 군대를 기다려주는 이성친구에게 상당히 감사하며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제 일병 말. 슬슬 일도 익숙해지고 분위기도 잘 아는 지금. 군대에 익숙해졌습니다. 아직도 기다려주는 게 고맙긴 하지만... 사람이란 게 그렇잖아요. 화장실 갈 때랑 나올 때 다른 것처럼. 처음보다 그렇게 고맙지도 애틋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오매불망 기다리는 상대방은 그걸 여실히 느낍니다. 



2. 지치는 타이밍.

 곰신도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닙니다. 2년 가까운 시간 휴가 때 말고는 남자친구가 아니라 인터넷 펜팔 친구로 바뀌니까요(ㅅㅂ 저는 휴가도 거의 없었습니다... 퍼킹 코로나...),  처음에 굳었던 마음도 계절이 4번 바뀔 때쯤엔... 확실히 무뎌지기 마련이죠. 자기 자신만 오매불망 찾던 불쌍한 군인 남친도 어느 순간에는 시들해 짐을 느낍니다. 뭐... 일이 힘들겠거니 생활이 힘들겠거니 하면서도... 서운합니다. 본인이 포기한 미래를 왠지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도 받네요.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3.부담감.

 이제 서로 안 본 지 한참 된 채로. 서로의 생활에 익숙해질 때입니다. 사람은 위기 순간에는 코앞만 보지만 좀 안정이 되면 멀리 보기 마련이죠. 서로 안 본 지 오래라 아무래도 관계성이 줄은 그때. 둘은 미래를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군대를 기다려 줬다는 건... 큰일이잖아요. 뭐라도 리액션이 있어야 하는데. 보통 둘 너무 젊습니다. 연애의 다음은 아무래도 결혼 정도 밖엔 없는 것 같은데 너무 까마득한 일 같네요. 두려울 수밖에요. 그 막중한 느낌이. 그리고 너무 아쉽습니다. 이 선택으로 사라질 미래들이. 서로에게 부담감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네요.


 이런 굵직한 스트레스 외에도 다양한 문제들이 찾아오죠. 안에서는 군대 스트레스 밖에서는 구직 스트레스. 남자의 시간은 멈춰 있고 여자의 시간은 빠르게 흐릅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하기도 하고... 서로를 이해 못 하는 지경까지 가기도 하고.


그러다 뿅 하고 쫑이 나는 거죠. 그리고 '일말상초' 빅데이터의 표본 값으로 남게 될 관계성이 되어버립니다. 빅데이터는 언제나 유의미한 결론을 내니까요.


저 역시도 완벽하게 비슷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전형적인 일말상초였던 것 같네요.


모든 것은 시기가 있습니다.


땡큐 나무위키


 군대라는 큰 시련을 이겨내면 더 단단한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힘든 관계는 서로를 아프고 고통스럽게만 할 뿐이네요. 어찌저찌 견뎌 냈다 해도 결국에는 그 힘들었던 시간의 여독이 관계를 망치기도 합니다. 개인이라면 큰 시련은 그 사람을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관계에서 너무 큰 시련은... 단지 상처를 많이 남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건 절대 회복되지 않는 것 같아요. 단지 잊고 살수 있을 뿐. 너무 많이 깎인 관계는 끝이 가장 합당하다 생각하니까요.


 일말상초라는 말은 저는 저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군대에서 여자친구가 있는 병사들을 부러워하며 말하는 말이긴 하지만... 나쁜 뜻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서요. 어차피 헤어질 거라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가벼이 여기라 믿지 말아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너무 많이 믿지도 너무 많이 의지하지도 말고. 큰 시련이 왔음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는 것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못한 제가 말하니 너무 뻔뻔한 기분이드네요.) 군대에서 유난을 떨던 커플은 모조리 다 일말상초에 살해당했습니다. 다 부서졌거든요. 담담하고 조용히 만나던 친구들만 살아남았네요.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쉽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군대라는 끔찍한 시련에서 서로 너무 많이 깎였으니까요. 저도 힘들었고 그 친구도 힘들었습니다. 저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면 저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날카롭게 관계를 끊어냅니다. 희생으로도 회생할 수 없는 관계라면... 그건 서로에게 고문이니까요. 그때 저도 그 친구도 더 참았다면. 더 끔찍한 사건으로 우리는 끝이 났을 거라 믿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때를 떠올리기가 힘드니까요.


때가 아닌 관계도. 때가 있는 관계도, 때가 필요 없는 관계도 있습니다. 단지 그걸 인정하고 큰 상처 대신 더 나은 사람이 되길 선택하는 것. 그게 더 의미 있지 않나 싶네요. 모든 일말상초를 겪어야 할 분들께. 선배 일말상초가... 한마디 하고 싶었습니다. 


큰일이지만 다들 그랬고. 아프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까요.


ㅋㅋ 마치 군대를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네요. 그냥 피할 수 없고 즐길 수도 없다면... 버텨내야죠. 별 수 없지.


피할 수 없는 것에 고통받으며 큰 상처를 입는 건... 너무 슬픈 일입니다. 알고 맞으면 좀 덜 아프지 않을까. 그런 바람에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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