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라니 May 26. 2024

대학 소감문

별거 아님을 알기 위한 여정


'대학교 진짜 별거 없어.' - 13학번 선배님


제가 처음 대학교에 들어왔을 때 한 나이 많은 선배가 말해준 말입니다. 지금은 뭐하고 계시려나요. 인생 별거 없어. 이러고 계실 지도. 저는 그때 저의 6년을 스포 당한 걸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곧 인생을 스포 당할지도 모를 일이네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젊은 나이에 세상 모든 진리를 이해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결국엔 부질없는 걸을 알죠. 그리고 그 지식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등지고 고행자의 삶을 택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는 삶에서조차 의미를 찾지 못하고. 그는 다시 그가 버렸던 '삶'이라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삶은 온전히 피부로 느낀 다음에야 '삶'이 정말 부질없었음을 '깨닫'습니다. 모든 슬픔과 욕심과 번민을 겪음 다음에야 이해에서 깨달음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죠. 삶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기 위해선 삶을 살아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전까지는 단지 이해라는 오만에 빠져있을 뿐.  그리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깨닫지 않은 앎은 별로 의미가 없다 생각합니다. 실행되지 않으니까요.


서양인이 이렇게 동양철학에 잘 어울리는 얼굴이어도 돼?




 군대 빼곤 한 번도 휴학하지 않은 어찌 보면 빡빡한 시간 속의 대학교 생활이 끝났습니다. 물론 알바고 대외활동이고 인턴 같은 건 하지 않은 학교생활이었지만 꽤 바빴네요. 진짜 세상은 놀기도 바쁜 세상이라는 걸 대학교에서 느꼈습니다. 놀다 지쳐 잠에 드는 경험. 언제 또 해볼까요.


 (그래도 놀다가 병은 얻지 맙시다... 나중에 복구하기 참 힘드네요...)


저는 국어국문학과를 나왔습니다(이제는 한국어문학부...). 요즘 같은 (좋은) 일자리 구하기 힘든 시기에 썩 좋은 학과는 아닙니다. 그래서도 참 놀기 좋아하는 한량들이 많은 곳이었네요. 지금 와서 다른 학과 사람들과 비교를 해보면 진짜 말도 안 되는 분위기긴 합니다. 여기는 열심히 살길 찾는 사람보다 열심히 술을 빠는 사람이 더 대접받는 곳이었거든요. 코로나 이후에는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지만... 그래도 예전엔 확실히 그랬네요.  



고멘나사이요...


 그래서 학과에 도는 밈 같은 게 있었습니다. '국문학과 나와서 뭐해' 혹은 '국문학과 배우는 거 ㅈ도 없어'. 솔직히 저는 이해가 잘 안되는 말이었어요. 그때의 저에게 대학교는 별천지였으니까요. 지방 촌놈인 제게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경험... 많은 걸 충족시켜줬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그냥 돈 안되는 가치 없는 말들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한창 독기가 가득하던 저는 말했습니다. '니들 못 배운 걸 왜 학교 탓을 하냐.'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자기들이 지식을 못 가져가는 걸 도대체 왜 남 탓을 할까. 지금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에요. ㅈ도 없고 뭐 할까 싶긴 합니다. 근데 그거 하나는 깨달은 것 같에요, 저기 '국문학과'를 대부분의 학과로 바꿔도 비슷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된다는걸. 전문대 가지 않는 이상... 자기 할 건 자기가 찾는 거니까요.


대학교에서 저는 정말 많이 바뀌었고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삶의 방향도 찾은 셈이죠. 썩 안정적인 방향은 아니지만. 제가 존속할 수 있는 방향을 찾은 거니까요. 그건 솔직히 수업에서 찾은 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많이 뒤적여 본건 아니지만 하고 싶은 건 꽤나 해보고 은인의 도움을 받고 혐오자에게 상처를 받고 그러면서 나온 결론이니까요. 솔직히 이런 것들 대학교가 아님에도 느낄 수 있는 것들임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네요. 저는 대학교라는 게(특히 국어 국문) 의미가 있음을 증명하려고 학교를 다녔지만(저만큼 학과생활 열심히 한 사람은... 제가 보기에 손에 꼽습니다.)...  사실은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대학교 진짜 별거 없어.'


 대학교 첫 오티날 저는 대학 생활을 모두 스포 당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뒤돌아보면 수많은 고민과 해결. 수많은 고통과 환희. 수많은 무가치와 행동... 여러 가지 기억들이 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별거 아닌 일들이었습니다. 이미지를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거나 저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복수를 하거나... 무가치의 늪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거나 뭐든 열심히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몸을 불사르던가... 꿈을 잃어버리던가 다시 새로운 걸 찾던가...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고 길이 다시 열리는 듯한 기분을 받았지만 지금에선 그냥 뭐 그리 일희일비했나 싶네요. 


 근데 그런 모든 것들이 지금에서 그렇게 느껴진다고 의미가 없다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지금이 그 모든 경험들로부터 나온 것임을 이제는 잘 아니까요. 솔직히... 풍파 많은 학교생활이었기에 더 잘 느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상당히 재밌어요 그 모든 것들이. 물론... 저 때문에 불쾌했을 분들도 있겠죠... 정말 죄송합니다... 근데도 어쩔 수가 없네요... 그때의 저는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밖에 없어서... 용서를 바라진 않습니다. 빨리 잊히길 바랄 뿐이에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분들을 위해서. 그러다 가끔 이야기가 나오면 욕이라도 편하게 해주세요. 언제나 감내하겠습니다.


동기들과 잘 지내는 것, 학과생활, 학교 근로, 동아리 생활, 연극, 학생회, 교수님과의 술자리, CC, 선배들과의 만남, 에세이로 맞짱 뜨기,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는 타과생들... 다 너무나 재밌었네요. 그리고 학교의 특성상... 적당한 성취와 실패를 겪은 다방면의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생각해서 더 좋았습니다. 누구 하나 만날 때마다 저의 세계는 깨지는 경험. 그런 걸 참 쉽고 어찌 보면... 싸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렇게 안전하고 뻔뻔하게 놀기 좋은 울타리가 어딨을까요? 진짜 그런 순간은 여기뿐입니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우리 삶의 의미는 없다' -유시민



 많이 깎인 비유지만... 요즘 들어 더 이해가 잘 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의미를 만들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거'라 생각하네요. 대학교 정말로 팩트만 보면 '별 의미'없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같은 시간 같은 배움들 속에서 본인이 어떤 걸 만들어 배워가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까지만 해도 본인의 성취가 눈으로 보이지만 대학교는 그렇지 않으니까요(학점도 하나의 성취지만... 저는 학점이 나타내는 게 '많이 배웠다'라는 개념보다는 '이만큼 노력했다.'라고 많이 느껴지네요... 내가 학점이 낮아서 그런가? ㅋㅋ). 뭐든 하는 만큼 지향점이 있는 만큼 가져가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는... 맞는 말이지만 그냥 아쉬운 말일뿐이네요. 본인의 성취를 비하하겠다면... 뭐 어쩔까요. 본인의 삶을 비하하는 걸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듯이... 별 방법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 - <유시민 작가 충격 발언, 과학적으로 삶은 아무 의미 없다?>


 아직도 동기들을 만나면 하는 말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인데 저는 그래도 다들 나름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그게 꼭 대학교 졸업의 문제보다는 시간이 흘러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더 경험이 많아지고 배운 게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중에도 진짜 하나도 안 달라진 친구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건 뭐...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뭐든 하기 나름 아닐까 싶습니다. 그 친구의 인생이 대학교 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망가지는 건 아니지만. 4년이라는 시간이 좀 아까울 따름이죠.


뭐 대학물 좀 먹었다고 이렇게나 아는 척을 하는데.




4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본 색감의 학교였네요. 그것도 졸업식 당일에야 알게 된 색입니다. 아직도 이 대학이라는 큰 집단에서 제가 발견하지 못한 게 많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중앙 동아리는 들어가 본 적도 없으니 확실히 그럴지도 몰라요.  대학원도 아직 안 가보기도 했고(이건 진짜 돈 많이 벌면 취미생활로 교수님들과 맞짱 뜨러 가보고 싶긴 해요. 무례한 대학원생 개꿀잼일듯 ㅋㅋ)... 아직 뭐가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저의 무가치론도 아직 다 몰라서 하는 말일지도 모르죠.  

 그래도 저는... 저만의 의미를 찾았고 꽤나 기분 좋게 졸업한 것 같습니다. 물론 학교라는 안정적인 울타리 밖은 무서운 것 천지지만... 나름 또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결국은 마음가짐의 차이니까요.

저는 6년이 지나셔야 드디어 학교가 무가치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말 많은 풍파도 있었고 후회도 있었고... 행복도 있었네요. 나쁜 기억들이 더 생생히 남아 있지만 나쁜 기억이라는 게 결국 그 당시의 행복감으로 인해 극대화된걸 잘 알기에. 이젠 후회는 없습니다. 이렇게 재밌는 경험 또 어디서 해보려나요(좀 비싸긴 한데...). 이미 예견된 종말이었지만... 예견되었기에 더 편하게 즐길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언제나 '혼돈보다는 파멸의 예언이 더 나은'법이니까요(또세... 제가 느끼기엔 삶이라는 것에 가장 근접한 글을 쓴 건 헤르만 헤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리알 유희>의 한 장면이니까요). 

 저는 또 다른 무가치함을 위해 걸어나갈 예정입니다. 지금은 같이 갈 친구들이 적잖게 있지만... 언제든 떨어져 나갈 수 있음을 알기에 더 열심히 할 뿐이네요. 그때는 또 그때만의 깨달음이 있겠죠. 

 저와 함께 모든 무가치함을 함께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합니다. 제가 다시는 여러분과 만나지 못하더라도... 제 허벅지 안쪽이나 ... 팔 안쪽과 같은 깊숙한 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해요. 또 보죠...라는 제가 지키기 가장 힘든 말을 남기고 이젠 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모두 안녕하길 바라는 거라니.

작가의 이전글 X사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