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된 이름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되면 추구하게 되는 맛

by 소요

엄마 간병하겠다고 엄마 집에 왔을 때 엄마가 1년 내내 마련해 둔 식재료가 집안 구석구석에 참 많이도 있었다. 현관 밖에는 시래기가 줄줄이 걸려 있었고(일 년 내내 먹고 이제 마지막 한 묶음을 물에 불리는 중이다), 베란다에는 고사리, 토란대, 각종 이름 모를 묵나물과 한약재가 종류별로 양파망에 저장되어 있었다. 베란다로 가면 장류와 장아찌를 담은 항아리와 유리병이 줄지어 서 있었고, 창고 안에는 대두, 서리태가 포대자루째로 들어있었다(부지런히 먹었지만 아직 많이 남았다). 김치냉장고에는 각종 김치가, 냉동고에는 삶은 옥수수, 생콩, 땅콩, 생고추, 떡, 그리고 도토리묵 앙금, 고춧가루 등 각종 양념들이 얼려있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다용도실 어느 구석에서는 고추거시기 봉지가 튀어나왔다. 바람이 통하는 현관이나 베란다, 또는 냉장고가 아닌 다용도실에 있었던 거 보면 고추거시기의 저장성이 꽤 좋은 모양이었다.


엄마가 알뜰하게 저장해 둔 먹거리는 나에게 매우 큰 부담이 되었다. 엄마가 1년 내내 먹으려고 1년 내내 마련해 둔 식량인데 방치해서 상하게 하거나 함부로 버릴 수도 없었다. 묵이나 나물 같은 건 어떻게 해 먹는 건지 나에겐 아득하게 느껴지는 식재료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면 어떻게 배워서라도 해 먹으려고 달려들었겠지만 대부분 내가 즐겨 먹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열심히 해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아픈 엄마가 좋아하고 기특해할 것 같았다. 슬프지만 이 모든 것이 엄마가 남긴 마지막 식재료일 가능성이 있어서 부지런히 해먹은 결과 콩과 도토리묵 앙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식재료를 소진했다. 그리고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던 것이 고추거시기였다.


고추거시기의 비주얼은 익숙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밥상에 올렸고 가끔 집에 왔을 때도 밥상에 올라왔다. 어릴 때는 고추를 비호감으로 생각했던 때여서 손도 안 댔고, 고추 비호감이 사라진 이후에도 생김새가 어글리 해서 손이 가질 않았다. 제대로 된 이름도 없는지 뭐라 불리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냥 번듯한 이름 없이 시골 어른들이나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엄마가 만든 거니까 소진할 목적으로 유튜브에서 레시피를 찾아보니 의외로 간단했다. 당연히 이름을 몰라서 고추 말린 거,라고 검색을 시작했는데, 제대로 된 이름이 고추부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이번에 알았는데 한자일 것 같이 생긴 ‘부각’은 순우리말이었다. 엄마가 고추부각이라는 이름을 몰랐던 건지 아니면 내가 귀담아 안 들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마가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쉬워 보이길래 해봤다. 중불에 기름 넉넉히 두르고 고추거시기를 넣은 다음, 타지 않게 뒤적뒤적거려야 한다. 방심하면 탈 수 있어서(몇 번 태웠다는 얘기) 불 조절 잘하고 한눈팔면 안 된다. 바삭하게 익힌 다음 불 끄고 소금, 설탕 적당히 뿌려주면 된다. 나는 비주얼이 별로여서 먹고 싶지는 않으나 간은 맞춰야 하기에 맛을 봤다. 그런데 띠용, 고추거시기가 이런 맛이었다고? 이게 보기와는 달리 고급스러운 맛에 기름에 튀긴 것도 아닌데 바삭한 식감도 좋았다. 엄마가 아프고 오해를 푼 식재료가 많다. 그렇게 한 접시 해놓으면 아빠는 물론 나도, 동생도 달려들어 먹으면서 엄마가 해둔 고추부각을 게눈 감추듯 다 먹어치웠다.


그 맛을 몰랐으면 몰라도 먹어본 맛, 이미 중독된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좋아하면 도전의식이 생기게 마련이다. 고추부각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이미 고추 끝물이라 서둘러서 아빠에게 고추고추거시 할 테니 고추를 좀 따와 달라고 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고추부각 만드는 법을 검색해 봤다. 이런, 꽤 번거롭다. 일단 말려둔 것을 해 먹는 것은 쉬운데, 말리기까지가 손이 많이 간다. 고추부각용 고추를 따지 않았다면 이거 안 먹고 말지 하고 접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추가 준비된 상태라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했다.


일단 고추를 반 갈라서 씨를 뺀다. 찜솥에 물을 올리고, 물기 뺀 고추에 밀가루(찹쌀가루, 전분, 튀김가루를 섞는 조제법이 다양하지만 나는 가장 간편하게 밀가루로만 했다)를 묻혀서 찜기에 쪄낸다. 한 김 나가면 다시 밀가루를 묻혀서 3일 동안 말리면 된다. 근데 자연에 말리는 것이 쉽지 않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안 불면 선풍기나 식품건조기에 바짝 말린다. 고추부각은 장점은 스낵처럼 맛있다는 거고, 단점은 만들기는 번거로운데 먹는 건 한 순간이라는 거다. 이래서 호기롭게 한번 도전했다가 그냥 사 먹는 게 싸, 다음부터 사 먹자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글쎄, 모르겠다. 내년에도 고추부각을 하게 될지. 워낙 손이 많이 가서 꼭 하겠다는 장담은 못하겠다. 아무튼 올해 처음 내 손으로 직접 고추부각을 만들어 저장해 두었고 겨울에 아껴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