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서 기름의 역할
엄마가 아프니까 큰집에도 안 가고 시댁 큰집에도 안 간다. 남편과 딸도 각각의 일정으로 오지 않기로 하면서 엄마와 아빠, 동생과 나만 함께 있는 단출한 추석 명절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명절에 이렇게 원가족하고만 있어 본 것은 난생처음이 아닐까 싶다. 태어나면서부터 결혼 전까지는 늘 북적대는 큰집에서, 결혼 후에는 남편의 큰집에서 명절을 보내고 우리 큰집으로 넘어 왔다.
나는 명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겐 사람이 스트레스인 셈.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과 이야기들이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명절에 갔다 오면 기가 쏙 빨리는 느낌이었다. 명절에 확대가족이 모이면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가고, 오랜 시간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서로의 근황을 의무적으로 털어놓아야 하는 것도 편하지 않았다. 나의 근황은 늘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에게 설명하기 쉬운 형태가 아니었고, 나의 삶은 설명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고체라기보다 흘러다니는 액체에 가까웠다. 그들도 나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은 그릇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그런 와중에 먹는 명절 음식, 특히 기름진 전이나 송편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때는 피할 궁리만 했는데 욕먹을 각오로 명절 연휴에 연차를 최대한 붙여서 멀리 떠나버리거나 정말 한참 일이 바쁠 때는 일을 핑계로 못 간다고 하고 집콕한 적도 있다. 이번에는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거나 둘러댈 필요도 없이 그렇게 원하고 바라던 조용한 명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좋다가보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일단 엄마가 아프다는 절대적인 이유가 엄연히 존재하고, 또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냄새로 인해 상대적으로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다들 내색은 안 하지만 다른 가족들도 그럴 것이다.
갑자기 전을 부치기로 했다. 전을 좋아하지 않으니 미리 준비한 재료들은 없었지만 집에 있는 고구마와 가지로 부쳐보기로 했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적당한 두께로 어슷 썰고, 부침가루로 걸쭉하게 반죽을 만들고, 기름을 좀 낙낙하게 붓고 부쳤(튀겼) 더니, 오, 맛있다. 아무것도 안 넣었고 대충 부쳤는데도 맛있다. 입맛 까다로운 동생도, 기름진 음식 안 좋아하는 아빠도 잘 먹는다. 역시 명절에는 기름 냄새 좀 풍겨야 하는 건가. 기름 냄새가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먹어치운 듯 했다. 그리고 내가 전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식은 전을 싫어하는 거였다. 부치면서 바로 먹으니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역시 전을 먹으니 시원한 게 끌리기 마련이고 핑계김에 맥주나 마시면서 보름달 구경도 하면서 딸과 영상통화라도 하면 생각보다 괜찮은 명절에 가까워질 것 같았는데, 어라 달이 안 보인다. 내일 비 온다는 얘기도 있고 하니 흐려서 안 보이는 건가. 기대했던 보름달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기름 냄새에 잠시 멈칫 했던 쓸쓸한 마음이 다시 밀물처럼 밀려온다. 근데 뭐, 꼭 이맘때 계단에서 떨어진 엄마가 아파 누워있은지 이제 1년, 어느 정도의 쓸쓸함에는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그렇게 바라던 조용한 추석 전야, 기름 냄새 살짝 배인 쓸쓸함을 온몸으로 껴안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