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끝이에요. 그동안 즐거웠어요.

영화 <박쥐>를 다시 보고 난 후

by eee

최근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없다를 이동진의 언택트톡으로 보고 난 후, 아 내가 박찬욱 영화를 정말 좋아했었지... 새삼 깨닫고 오랜만에 박찬욱 영화를 다시 쭉 보고 있다. 어제는 박찬욱의 〈박쥐〉를 봤다.

처음 봤던 게 대략 7년 전이었나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흥미로운 지점이 많아서 오랜만에 감상평을 써본다. (스포 있음)


박쥐는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는 폭력, 구원의 언어로 감춰진 위계, 그리고 신념의 껍질 아래에 숨은 선민의식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나는 선하다’고 믿는 자가 타인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얼마나 쉽게 통제와 지배로 기울어지는지..


상현은 신부였다.

윤리와 죄의식, 신념으로 자신을 붙잡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피와 섹스, 죽음과 쾌락을 지나며 결국 스스로의 도덕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와 달리 태주는 무너진 세계 속에서 살아오던 여자.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없는 삶, 억눌린 욕망과 분노로 버티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피를 맛보고서야 자기 얼굴을 드러냈다.


둘은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파괴적이었다.

욕망을 좇아가며 규범을 전부 뒤엎었는데 그 모습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나 역시 어딘가에 스스로 금기를 걸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선을 넘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더 진실해 보였던 건 아닐까?


그리고 다시 봐도 인상 깊었던 장면들.

태주가 집을 박차고 나갈 때, 상현이 맨발의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장면.

또 태주의 허벅지 상처를 보고 상현이 분노하며 “내가 찢어줄까요?”라 말하는 장면.

겉으로는 연민과 사랑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분명히 우월감과 구원자 콤플렉스가 깔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상현은 태주를 때리고 욕하기도 한다.

그의 사랑은 끝내 수평적이지 않았다.

연민과 통제, 구원과 우월감이 겹쳐진 마음이었다.



상현은 끊임없이 자책하고 기도한다. 죄를 씻고 싶어 하고, 고통을 짊어지려 하며, 자신을 처벌하려 한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그의 기도문을 다시 보자.

(굉장히 인상 깊어서 일일이 받아 적었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는 눈물이 흐를 수 없게 하시고

입술과 혀를 지으시어 그것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며

손톱과 발톱을 뽑아내어 아주 작은 것도 움켜쥘 수 없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소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지옥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그는 단순히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죄를 지을 수 없게 저를 무력화해 주세요”라고 말한다.


손톱과 발톱을 뽑아내어, 아주 작은 것도 움켜쥘 수 없게 하소서 —

욕망은 도저히 없앨 수 없으니, 차라리 욕망을 실행할 신체를 망가뜨려달라는 것이다.

이건 회개라기보다, 거의 신 앞에서의 자살 충동, 혹은 자아 말살 요청에 가깝다.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소서 —

이성조차 제거되길 바란다는 건, 생각하고 후회하고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자아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소서 —

이건 신부로서의 정체성까지 부정하길 바라는 말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가 ‘나였던 모든 이유’를 지워달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기도의 말투와 형식은 경건하지만, 내용은 전혀 도덕적이지 않다.

선과 악의 문제를 넘어서 존재 그 자체의 소거를 요청하는 말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해 달라”가 아니라,

“죄를 지을 수 없게 저를 망가뜨려 달라”는 간청.

기도라기보다 자기 존재를 제물로 삼아 소거하려는 절규 같았다.

자기 욕망을 이길 수 없으니, 차라리 신이 나를 부숴 달라고.


기도문은 결국 “나는 죄인일지언정 죄인 중에선 성자다.”로 귀결된다.

박찬욱은 이 기도문 하나로 상현이라는 인물의 모순, 죄책감, 신념, 선민의식, 자기혐오, 욕망, 파괴욕을 전부 드러낸다.

그는 자신을 벌함으로써 신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권능을 흉내 내며 자기 구원을 디자인한다.

“이런 방식으로 나를 부숴주세요.”는 신에게 매달리는 인간의 간청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오만한 주문이다.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신격모독에 가까운 행위일 것이다.

창조물이 자기 파괴의 방식을 직접 설정하며 신에게 그 실행을 요청하는 것.

신의 뜻을 기다리기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형벌을 스스로 설계하는 것.

그건 결국 신의 질서를 흉내 내는 행위이며,

‘나의 구원은 내가 주도하겠다’는 인간의 은밀한 반역이다.

상현의 기도는 겸허한 회개의 언어로 포장된, 도덕적 오만의 가장 완벽한 형식처럼 보인다.

그는 신을 향해 머리를 숙이면서도, 그 무릎 꿇은 자세로 신의 자리를 넘본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반복하여 기도문을 외우면서 진정 원하는 것은 순결한 고행이 아니라,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확신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태주를 불쌍히 여기며 보살피고, 지옥 같은 가정에서 구해냈다고 믿지만, 그 태도 안에는 분명한 위계가 깔려 있다. ‘나는 너보다 더 옳고, 더 강하며, 더 너그러우니 너를 사랑할 자격이 있다’는 식의 자기 정당화. 그의 다정은 연민 위에 세워졌고, 그 연민은 우월감과 결합한다.


반면, 태주는 오래전부터 파국을 예감하고 있었던 인물처럼 보인다. 몇 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남긴 메모에는

‘태주의 상현에 대한 감정 역시 단순하지 않았다.

처음엔 무기력한 삶에서 자신을 꺼내줄 구원자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역시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자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그녀에게 상현은 동시에 구원자이자 족쇄였다.

그래서 태주의 마음은 동경과 환멸, 해방과 분노가 얽혀 있는 복합체였을 것이다.’

라고 써놨더라고.


그런데 두 번째 다시 보니 그녀는 처음부터 상현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내심 바라는 복잡한 감정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로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인간으로 보려는 순간마다, 태주는 날을 세운다. “사람처럼 생각하지 마, 사람도 아니면서.” 이 대사는 단지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에 대한 발화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끝끝내 대등하지 못했던 상현의 태도를 향한 반격이다.


영화는 끝내 이 둘을 동반자살로 이끈다. 하지만 그 죽음조차도 동등하지 않았다. 태주는 명백한 종결을 선택했고, 상현은 마지막까지도 “태주 씨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지옥에서 만나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상현을 향한 태주의 대사는

“죽으면 끝이에요.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냉정하다 못해 잔혹하게 느껴지는 이 작별 인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지배했던 자에게 보내는 가장 정확한 이별이 아닐지.

우린 같은 곳을 보는 게 아니라는 마지막 선언이자, 내 삶을 멋대로 낭만화하지 말라는 냉소로도 읽힌다.

즉, 태주는 마지막 순간에

“너는 나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이제 너를 신부님으로밖에 안 본다”라는 거리감을 남긴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겐 그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이제 당신의 구원 서사에서 벗어났다는 자유 선언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 영화는 얼핏 뱀파이어 문법을 차용한 박찬욱식 로맨틱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이 어떻게 통제, 연민, 우월감, 죄책감, 도피, 폭력의 이름으로 변질되는지를 보여준다.


상현은 구원자가 되려다 괴물이 됐고, 태주는 구원받으려다 또 다른 억압의 서사 안에 갇혔잖나


서로를 구원한다고 착각한 채 파멸로 함께 가는 이 결말을 통해 박찬욱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너는 누구를 구하려 하니?

그 구원이 정말 상대를 위한 걸까?

아니면 너 자신의 죄책감과 선함을 증명하고 싶어서 구원자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


결국, 구원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다.

너의 사랑, 너의 선함, 너의 구원은 정말 순수한가?

그 안에 상대가 아닌, 너 자신을 지키고 증명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그의 영화에서 타인을 파괴하는 손은 언제나 구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사랑도, 선도, 구원도 결국은 자기 욕망을 가리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일 수 있다는 걸.


그리고 내가 이 질문 앞에서 오래 머문 이유는 나 또한

지금 감정적으로 겹쳐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겠지.

“나도 누군가를 구하려 하거나, 누군가에게 구원받고 싶다"라는 마음 안에 조금이라도 힘의 불균형이나 자기기만이 느껴졌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연민할 때, 정말로 동등한 존재로 보는가?

아니면 “나는 너보다 낫다"라는 확신 속에서 선심 쓰듯 감정을 베푸는 것은 아닐까?


그 질문이 상현을 통해, 그리고 태주의 눈빛을 통해,

관객인 나에게 돌아온다.

모든 감정은 무고하지 않다.

호감도, 구원도, 사랑도.

그 안에는 권력의 감각이 있다.

그 감각이 나를 찝찝하게 만든다.

가해자보다 더 불쾌한 건, 선의를 가진 척하는 위선의 얼굴이니까.


이 영화가 섬뜩하게 다가오는 건

사랑이, 구원이, 윤리가 얼마나 쉽게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타인의 삶을 감싸 쥐고, 조이고, 찢을 수 있는지를.


가장 끔찍한 폭력은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말로 시작된다.

가장 정교한 억압은 사랑을 가장한 시선 속에서 자란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사람보다

자신이 누군가를 위에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을 더 믿게 된다.


박쥐는 인간의 탈을 쓴 신, 혹은 신의 탈을 쓴 인간이 서로를 구하겠다는 착각 속에서 어떻게 서로를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은 피를 빨고 날아가는 장면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 태주의 눈앞에서 해가 뜨는 그 침묵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