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눈을 떴을 때는 새벽, 천장의 흰색 벽지가 푸른 새벽에 짙게 물들어 있었다.
눈을 다시 감아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과연 어디 즈음에서 넘어져 다쳤던 건지 통 알 수가 없다.
무릎에 남은 상처로 어디선가에서 넘어졌던 것이라고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던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도대체 그게 뭐였는지 모르겠다.
꼭 해야 하는데 못 한 얘기가 있단 생각이 언제부턴가 의식의 수면에 떠올랐을 뿐이다.
그게 아주 최근인 것도 같고, 어쩌면 아주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속 깊은 곳에 다소 먹먹한 것이 자꾸 얹혀있다. 시원하게 내뱉어야 할 것을 채 내뱉지 못했다는 느낌이 계속 나를 누른다.
남편은 곤히 자고 있다. 찬 바깥바람의 냉기는 아파트 그늘진 복도에 난 창문을 타고 들어와 바닥 장판에 낮게 깔린다.
발이 시려서 손으로 감싸고 꼼지락 거려보지만 겨울이 들어차 있는 공간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릎에 상처를 냈을 것이라 추측되는 일련의 무기력한 경험들을 반추하던 사이 새벽은 고요하게 방 안으로 퍼져왔다.
새벽은 현관문 앞에 이르러서는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물체를 떨어뜨리고 갔다.
문을 열고 나가 확인을 해보니 차갑고 건조한 슬레이트 바닥에 흰 봉투에 담겨 발신자를 알 수 없는 편지가 한 통 와있다.
차가운 복도를 맨발로 밟고 편지를 주워 들고선 이내 뜯는다.
‘미안하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나도 최선을 다했고 많이 힘들었어.
용서해 달라고는 못하겠지만 이렇게 나를 외면하지는 말아 다오.
오늘도 해가 비추지 않는다면 차가운 자갈밭으로 돌아갈 거야.
거기선 나의 편이라고는 없고, 들짐승들만 뜯어먹을 살이 더 없는지 노리더라.
발밑으로는 구멍이 숭숭 난 차갑고 날이 선 돌들. 초록 풀들 대신 마른 지푸라기들이 힘없이 늘어진 바닥. 그 위로 안개가 짙게 깔리는 곳.
이젠 익숙하지만 솔직히 나는 다시 혼자 그곳엔 가기는 싫다.
하지만 모두 나에게 등 돌려 떠난 지금 뭐 하자고 같은 곳에 계속 시간을 낭비할 순 없어 어딘가로 향해 가긴 가야지. 어디든...’
첫 줄만에 누군지 짐작이 간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미소 지었던 얼굴들이 거짓으로 느껴져서.
가족에게는 열심히 하는 가장 노릇을, 주변사람에겐 좋은 사람 행세를 하던 그 사람은 이젠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10살 때 막내 동생은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년에 새로 입주할 아파트가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고, 아주 부유하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풍요로웠다.
그런데 그 시기에 아빠라는 사람은 돌연 한국을 떠나 멀리 가버렸다.
어느 날 자다가 부모님이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아빠.. 밉다...’ 둘째가 언제 깼었는지 이불속으로 들어와 내 눈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혼잣말하듯 얘기를 했다.
그 어린 시절 함께 하던 공간, 영원한 나의 안식처라고 생각했던 곳은 뜨겁고 차갑고 메마르고 가시가 돋아 있었던 것이다.
행복하다고 느끼던 여정 속에 온갖 불행이 나의 뒤를 노리며 쏘아보고 있었으니, 단지 나는 그걸 어려서 몰랐을 뿐이었다.
30년 전쯤인가 끝없는 사막에 그는 뚝 떨어졌다. 그래도 그땐 사랑하는 사람과 첫 여정을 막 시작한 지라, 그의 눈빛에 생기와 희망이 넘쳤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런 메마른 곳에서 한동안 묵묵히 가족을 이끈 가장이 존경스럽기도 하면서 감사하단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디도 아닌 곳으로 인도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의 인내에 위험한 가시들은 용케 잘 피해오지 않았는가!
심지어 가시들을 피하며 재밌는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한 날도 분명 여러 날 있었다.
성인이 되어 차가운 발 박혀있는 가시를 빼낼 때까진 내가 어떤 곳에 있었는 지 모르고 있지 않았냔 말이다.
꽤 시간이 지나 성장한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늦은 밤 사막에서 아빠를 발견했다.
그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얼굴을 옆으로 하고 엎드린 자세로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비닐봉지 안에는 슬픔이 한가득이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숲으로 가고 싶었지만 쉽게 방향을 알 수 없었다.
다음날도 걷고 걸었지만 어디든 같은 황량한 풍경이었다. 광활하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곳 앞으로 열심히 걸어도 그 자리가 어제 그 자리 같은 세상은 열린 감옥이었다.
홀로 뜨거운 모래를 밟고 걸으며 지쳤다고 소리치는 다른 자아가 턱 밑까지 올라와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겐 책임져야 할 식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식구를 업고 가야만 했다.
첫 번째 짐은 욕심 많은 아이였다.
세상에 갖고 싶은 게 많다고 소리치는 아이를 첫째로 둔 그는 아이를 업고 주변 것들을 모아가느라 많아진 짐에 더 천천히 느리게 걷게 되었다.
두 번째 짐은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다. 지고 가던 등짐에서 내려 자꾸 잘못된 방향으로 가겠다 고집을 부려 애를 먹었다.
마지막 짐은 작고 귀엽고 잘 웃는 아이였다. 하지만 첫 번째 짐과 두 번째 짐을 챙기느라 아빠는 걔가 웃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그를 기대 걷던 우리 엄마.
처음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땐 그저 그런 살만한 곳이라 알고 왔지만, 점점 떨어져 가는 물과 식량에 걱정이 늘고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참지 못한 그는 말했다.
‘잠깐 여기에 있어 내가 방향을 찾아내서 돌아올게. 어제 구해온 물과 식량이면 몇 주 버티긴 충분할 거야. 여기서 잠깐 쉬고 있으면 내가 방향을 다시 찾아 돌아올게.’
그가 정말 몇 번 돌아오긴 했었다. 내가 방향을 잘 못 찾았어. 다시 찾아올게 기다려줘.
‘이럴 수가 내가 이번에도 방향을 잘못 정했어. 오는 길에 식량을 구해왔으니 잠시만 더 기다려봐 금방 다시 올게.’
그렇게 몇 번을 오가던 그는 이번엔 정말 멀리 나갔는지 오지 않았다.
발 밑으로 이끼가 밟히는 풍요로운 숲으로 가족을 이끌기 위해 길을 알아온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던 그였다. 그의 뒷모습 너머로 자유를 갈망하던 눈 맑은 청년이 보였다.
또 그 위로 황량한 사막을 지나 끝없는 자갈밭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이 겹쳤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가족은 선인장을 먹었다. 살면 살아진다고 하던데 죽을만하면 또 비가 와서 죽지 않았다.
각자가 주워온 마른 나뭇가지들 돌멩이로 보금자리도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남은 가족들은 돌아오면 얘기할 참이었다. 여기도 괜찮아 그냥 여기서 같이 있자.
그런데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행복을 위해 찾아 떠난 여정에서, 계속된 실패가 그에게 집착과 오기 광기를 불어넣고 처음의 목표를 잊게 만들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이끼가 덮인 숲을 찾아 한참 헤매다 이제야 자갈밭길 어딘가에서 뒤늦은 편지를 보낸 것이다.
나는 답장을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딸깍 펜을 눌렀다.
용서할게. 이해할게. 그런데 너무 이젠 너무 멀다. 거기까지 편지가 갈지도 잘 모르겠어.
자갈밭을 꼭 지나서 풍요의 숲을 발견하길 바랄게. 외면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마주 볼 수도 없어.
나도 나의 바다를 발견하려 사막을 오래전에 떠났거든.
나의 풍요의 바다를 발견한다면, 그때 슬픔이 가득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든 아빠가 아니라 고생한 나 자신과 내 남편 그리고 내 자식을 떠올리고 싶어.
이런 생각에 이르니 발작 같은 기침이 난다. 기침은 끝나지 않을 듯이 계속되었다.
‘괜찮아?’ 남편이 기침소리를 듣고 깨서 묻는다.
쥐어짜듯이 기침을 토해내고 나니 조금은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먹먹한 느낌도 무엇인가 얹힌 느낌도 한걸음 멀어졌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뭘 쓰려한 거야?’ 빈 종이를 보고선 다정하게 묻는다.
꺼내놓은 편지지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 아무것도 아니야.‘ 편지지를 집어 들자 무릎으로 모래가 후드득 떨어졌다. 다녀오겠다고 한 가장의 뒷모습이 다시 보인다.
바깥에는 완전히 날이 밝았다. 새벽은 문 앞에 편지를 떨어뜨리더니 집안을 통과해 새소리를 듣고 창밖으로 쫓겨 달아났다.
고생한 그의 창 밖에도 해가 돋아 달그락거리는 아침이 시작되어라 바라며 빈 편지지를 반으로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