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존재의 날갯짓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김수영
비가 오는 날의 고궁은 아름다웠다. 때는 9월 무렵이었고 아침부터 내리던 소낙비가 시원하게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거리를 볼 때면 기분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이번에도 집 밖으로 나와서 오랜만에 고궁을 방문했다. 비가 오는 날의 고궁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한적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고궁의 기와지붕이 빗물을 받아서 한층 짙어 보였다. 몇 개의 우산들이 그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외로운 해태상이 그 앞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궁궐의 가장자리를 걸으면서 상념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과거의 수줍은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중학교 3학년. 현장 체험학습으로 고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학교로 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교통수단을 통해서 고궁으로 와 만나기로 했었기 때문에 나도 버스가 아니라 지하철을 탔다. 아침의 지하철은 만원이었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유달리 허약하고 왜소한 체격이었던 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제대로 내릴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안내방송에 집중했다. 제대로 내리기 위해서였다. 바로 전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렸을 때, 나는 준비를 했다. 소리를 낼지, 아니면 몸을 앞세워 앞으로 나아갈지 고민이 되었다. 소리를 내면 사람들이 제대로 들지 못할까 두려웠다. 반대로 몸으로 나아간다고 하면 다치는 사람이 있을지, 두려웠다. 물론 나의 작은 체격으로 있는 힘껏 밀어봤자 다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는 나는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에 대해서 극도로 예민했다. 그래서 나는 초조함과 떨리는 손길로 안내방송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괴로움은 당역에 도착하자마자 해소되었다. 그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렸기 때문이다. 마치 파도처럼 사람들이 순식간에 열차 안에서 빠져나갔다. 그 대열에 합류해 나도 다행히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곳곳에 같은 학교의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음에도 얼굴이 익숙해서 단번에 알아봤다. 친하지는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반가웠다. 무언가 잘못 가고 있다는 느낌이 희석되었다. 그 정도로 나는 겁이 많고 확신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같은 학교의 아이들을 비밀스럽게 따라서 출구로 나오자 시끄러운 소음이 울렸다. 자동차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이 고궁이 보였다. 하늘이 어둑하고 흐렸다. 일기예보에는 비가 올 거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는데 학교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계획한 일정이었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각자 우산을 챙기기로 공지가 되었다. 나도 우산을 하나 챙겼다. 이전에 우산을 챙기지 못해서 급작스럽게 편의점에서 산 투명 우산이었다. 집에는 이런 식으로 급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서 생긴 우산들이 많았다. 고궁 앞에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 나의 담임교사도 보여서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그곳으로 갔다. 같은 반 학생들이 왁자지껄 소란스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 한 무리를 지켜봤다. 그 무리에는 내가 좋아하는 온우도 있었다. 온우는 중학교 2학년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여자아이로 자신의 본명인 ‘허온우’라는 이름이 촌스럽다는 이유로 싫어 성인이 되기 전에 개명을 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좋아했다. 그 이름 때문에 그 여자아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며 그렇게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온우는 다른 여자애들보다 키가 컸고 긴 갈색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에 관해서 친구들이 물으면 그녀는 곧 자를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학기가 지나는 동안 그녀는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친구들이 말하는 것만큼 짧게 자르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갖고 다니는 작은 빗으로 항상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쉬는 시간마다 헤어롤을 친구들과 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의 부드럽고 고운 이마가 드러났다. 날카로운 눈썹과 진한 속눈썹과 차분한 눈매는 아름다웠다. 그녀는 쌍꺼풀이 짙었다. 화장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가 볼 때는 항시 짙었다.
나는 그녀를 맨날 보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와 친하지 않았고 말 한번 나누어 본 적도 없었다. 단지 멀리서 이따금씩 눈에 들어오는 순간들마다 그녀에 대한 애정을 느낄 뿐이었다. 그녀에 비해서 나는 너무 작은 존재였다. 아니 나는 그 누구에게나 작은 존재였다. 모든 이들의 말과 행동들이 나에게는 몹시 크게 느껴져서 부담이 되었고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고 답을 한다고 해도 그 답은 다른 이들에게는 너무나 작았다. 이토록 작은 내가 어떻게 비대하게 덩어리 진 무리 틈에 들어가서 작은 말 한마디를 전할 수 있겠는가. 한 번은 크게 상심하여 이 세상의 모든 작은 것에 대하여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도덕에서 사람이란 모두 같은 존재이고 과학에서조차도 인간이란 단일종이라 같은 존재라 하였는데도 나에게는 그 말이 유독 짜증 나게만 들렸다. 정말로 같은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에만 해도 전부 달랐다. 같은 교복을 입고 매일 같은 시간에 동일하게 수업을 받는 우리들 하나하나가 전부 달랐다. 그런데 어떻게 같단 말인가. 이런 황당한 화풀이를 하면서 나는 온우를 생각했다. 온우는 자주 웃었다. 그 웃음이 밝고 명랑하여 나는 그 모습을 기억에 담았다. 집에 가는 길에 담아두었던 그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 눈이 매몰차게 와도 집에 가는 데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온 마음을 쏟으면서도 그녀에게 한 발자국도 내밀지 않은 채로 시간을 죽였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한 학년이 지나 어느덧 6월이 된 것이다.
체험학습은 이름은 체험학습이라고 하지만 그냥 궁궐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이었다. 각자가 따로 떨어져서 비에 젖은 고궁을 구경하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다시 정문에 모인다. 담임 선생님은 산만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아이들에게 거듭 알리고는 멀리 흩어지는 아이들을 다른 반 선생과 함께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선생님에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이 서두를 때 그 속에 낀 채로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 5월부터 선생님이 내가 지나치게 조용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에 신경을 쓰면서부터 나에게 사소한 간섭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고궁을 걸으면서 기와를 통해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거나 상념에 잠겼다. 나는 이렇게 혼자 걷는 것을 좋아했다. 고궁을 참으로 적막하면서도 걷기에 좋았다. 밖에는 수많은 차들로 북적이는데도 이상하게 고궁 안은 차분하고 섬세한 적요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비가 그 한적한 분위기를 감미롭게 해 주었다. 나는 비 오는 것도 좋아했다. 화창한 하늘보다도 조각구름보다도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들이 좋았다. 시간은 많이 남아있었다. 나는 고궁을 전부 돌아보기로 결심하고는 천천히 사색을 즐기며 계속 걸었다.
비가 거칠어졌다. 몇 분 전에 이슬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빗방울들이 굵어지더니 장대비가 되었다. 우산에 부딪히는 물방울들의 무게를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을 통해서 느꼈다. 빗소리가 궁 안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궁궐 산책을 멈추지 않았고 고궁 안을 전부 들여다보았을 때에도 비는 여전히 똑같이 많이 내리고 있었지만 소리가 작아진 것 같았다. 물론 소리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귀가 빗소리에 적응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할 것이 없어졌다. 약속된 시간이 되기까지는 무려 2시간이 남아 있었다. 고궁이 넓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3시간이라는 시간을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혼자였고 혼자로서 3 시간이란 시간은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물론 상상을 하면서 보내면 그럭저럭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담임선생은 3시간 동안 배가 고프면 점심을 알아서 먹으라고도 말을 했다. 나는 고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출구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온우를 만났다. 온우는 평소와 다르게 혼자 있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문 밑에서 우산을 들고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기를 머뭇거렸다. 왠지 모르게 쉽게 갈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그냥 가기로 했다. 겁을 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저 지나갈 것이다. 긴장이 좀 되었지만 순식간에 지나칠 것이었다. 좋아하는 대상을 앞에 두고도 긴장하고 불안해서 빨리 서둘러 지나갈 생각만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빗방울 하나가 콧등에 떨어져 깜짝 놀랐다. 하늘의 먹구름들과 빗방울 하나하나가 나를 꾸짖고 조소하는 것 같아서 더욱 수치스러웠다. 무언가를 앞에 두고 끝없이 작아지기만을 하는 나는 얼마나 작을까? 하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말하지 못하는 마음은 얼마나 작을까? 부당한 일을 당하고 놀림을 받고 무시를 받고도 정당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작은 배려도 행하지 못하고 아픔을 적극적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슬픔을 모두에게 당당히 고백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나는 과연 얼마나 작을까?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숨겨진 애정을 알아주기를 꿈결처럼 바라는 자신은 얼마나 이기적일까? 온우의 곁을 지나치는 순간에 나는 그런 부끄러운 생각들로 가득해져 눈앞이 먹먹해졌다. 그 순간, 온유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정일아. 맞지? 잠깐만!”
나는 어리둥절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저기 나 우산이 망가져서 그런데 혹시 어디로 가?”
“어? 지금 점심 먹으러 가고 있어.”나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음성을 크게 내고 싶어 안간힘을 썼지만 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 그럼 저 횡단보도 건널 거야?” 온우는 손가락으로 횡단보도를 가리켰다.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나 좀 같이 가줄 수 있어?” 환한 웃음으로 그녀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녀를 만난 지 1년 하고도 6개월 만에 나는 그녀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었고 함께 걷게 되었다. 가슴의 고동이 온몸에 전해져 왔다. 기쁜 마음도 들었지만 그보다도 떨리는 감정이 앞섰다. 이 울림,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어 외부로 향하는 이 울림은 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무언가였고 횡당보도를 기다리는 나는 내 옆에 있는 그녀를 제대로 볼 수조차 없음에도 커져갔다. 나는 이 고동소리를 온우가 들을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이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주변은 이미 소리를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만 나에게만 그 소리들이 요란스럽지 않았다. 온우는 나와 키가 비슷했다. 내가 살짝만 고개를 돌리면 그녀의 갈색 생머리가 꽃다발처럼 한가득이었다. 그녀는 오늘 앞머리를 내리고 있어서 부드러운 이마를 볼 수는 없었지만 속눈썹도 더욱 짙어 보였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고 비와 어울렸다. 나는 일부러 우산을 든 손을 더욱 높이 치켜들었고 그녀를 향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그녀가 알지 않기를 바랐다.
횡단보도는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 횡단보도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반대편에 사람들이 잔뜩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 온우의 친구도 있다는 것을 보자 나는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반대편에 있는 친구도 전화를 받았다. 둘은 대화를 짧게 했고 그것으로 전화는 끝났다. 나는 그녀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나와는 별과 별의 거리만큼 멀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각해진 나를 온유가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바라봤다. 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지?”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근데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2학년 때, 축제도 같이 했으면서.”
나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그녀가 나를 기억한다는 것에 대한 기쁨과 2학년 때 축제가 나한테 그다지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데에서 오는 어색함이 만든 웃음이었다. 나는 그 축제에 참여한 것에 대해서 줄곧 후회하고 있었다. 그 축제는 자율이었고 나는 안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참여했고 힘들어했다. 모두가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장난을 치고 난동을 부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달려드는 광경과 구석에서 만화경처럼 벌어지는 일들을 조용히 응시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다. 내가 그 소란에 틈 사이에 끼지 못해서 서글픈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로 있는 것이 더욱 마음 아팠다. 나는 이곳에 필요하는 존재도 아니었고 그 누구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는 적당히 어울리는 척했다. 겉돌면서 대충 희미한 웃음기를 입가에 두르고 선생님들이 지나갈 때마다 곤충의 의태처럼 위태롭게 틈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중 하나는 나에게 어떤 난처한 질문을 했고 나는 곤경스러웠다. 그런 기억 탓에 나는 축제에 다시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던 차에 온우가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축제에 참여하길 잘했다고, 잘 이겼냈다고 생각했다. 나는 온우에게 뭐라고 말을 붙이고 싶어 지난 입이 열리지 않았다.
횡단보도의 불이 파란불로 바뀌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온우와 나도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 도로를 관통하는 굉장히 긴 횡단보도여서 이전에 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는데 지금도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고 평범한 횡단보도와 다를 바 없게 생각되었다. 나는 우산에 신경을 쓰면서 앞을 똑바로 보고 걸었다. 온우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에 따라서 나도 성큼성큼 걸었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나는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무심한 척했지만 횡단보도의 중간 즈음에 이르자 온우가 비가 많이 온다며 또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이때 놀라운 용기를 발휘하였다. 납과 같이 무거운 입을 가까스로 열고는 눈을 그녀를 향하고는 몇 마디를 내뱉은 것이다.
“우산이 망가졌는데 어떻게 할 거야?”
이 말은 간단하기 그지없었지만 나에게는 불가능한 용기를 실현한 셈이었다. 나는 한결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변화하고 싶었고 개척하고픈 욕구가 있었다. 그 욕구는 언제나 소심한 마음에 짓눌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빗방울이 사방에서 덮치고 자동차들이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어수선한 틈을 타서 억눌렸던 욕구가 마음의 허점을 노리고 급습한 것이었다. 욕구는 성취감을 느꼈다. 곧 나는 해방감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는 마음이 뒤늦게 자신의 안일함을 깨닫고는 곧바로 반격을 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수습은 마음의 몫이었다. 감정의 반동을 마음이 오로지 감당하기에는 감정은 너무나도 다채롭고 각렬했다. 나는 감정의 이러한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운위를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욕구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마웠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분을 느낄 세도 없이 는 온우는 미소를 띤 채로 나를 살짝 보고는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괜찮아. 친구한테 우산이 하나 있거든. 그거 빌리면 돼.”
그 말에 나는 안심하면서 동시에 실망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거기서 온우의 친구와 만나서 나는 헤어지게 되었다. 온우는 나에게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전하고는 반대방향으로 친구와 함께 갔다. 나는 친구와 함께 우산을 쓰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온우를 바라보았다. 비는 다시 이슬비로 바뀌고 있었다.
그 기억이 고궁을 걸어가면서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아서 내용도 부실한 그 기억이 고궁의 빗물을 타고 나에게 흐르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의 굉장한 힘을 느꼈다. 시간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버렸다. 나는 작은 나의 부실하고 비굴한 면모에 가슴 아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뱁새의 날갯짓과 같이 한순간의 작은 용기에 힘이 났고 아름답게 무르익어 가는 고궁의 쓸쓸한 모습에 고즈넉해졌다.
언젠가 이 작은 날갯짓이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날이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