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책 : 페르난두 페소아
책을 읽으면 한 단어에서 혹은 한 문장에서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또 다른 단어들, 문장들, 이미지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렇게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에 공상을 하다 보면 책 한 문장을 읽는데 한나절이 걸리기도 하고 그전에 읽었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릴 때도 있다. 이런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순간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게 정제되지 않은 채로 골몰하는 것들이 그냥 막연한 인상으로 남을 때가 많은데 도대체 내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고자 문장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내용과 형식에 제약 없이 써보려고 한다.
«산다는 것은 타인의 의도대로 양말을 뜨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생각은 자유롭고 상아 바늘로 뜨개코가 하나씩 이어질 때 마법에 걸린 모든 왕자들은 뜨개코의 뜰에서 산책한다. 사물의 뜨개질... 휴지休止... 무無... »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책』, p.27
1.« A는 a이다.(첫 문장에서 정의의 형식)»
‘Essence;본질’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τὸ τί ἦν εἶναι(; 어떤 것이 되도록 하는 무엇)’에서 왔다. 이것은 그리스인들(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이 ‘A(대상)는 a(속성)이다’라고 정식화하던 것이다. 이 본질은 사물의 실체에 관해 ‘진정한’ 혹은 ‘불변하는’ 진리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본질은 한 대상 objet의 속성을 ‘정의’하는 것, 즉 ‘A는 무엇이다.’라고 선언하는 명제에서 나오는 것임을 생각해보자. ‘정의’하는 행위는 어떤 대상의 지각을 통해 나타나는 정보들을 판단하는 의식 작용이다. 사실이 이러함을 고찰해볼 때, 본질 essence이 어떤 사물 그 자체의 실체를 말해준다기보다는 ‘대상과 인식의 관계에서 대상을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인식 작용의 메커니즘’라고 정의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즉, 본질은 실체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지각된 대상의 표상과 인식사이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요즘에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이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여기에 실체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명제를 설명해주는 재미있는 설명이 나와있다. 메를로 퐁티는 라이프니츠의 말을 빌려 ‘집-자체 la maison-même’에 대한 지각을 설명한다.
:« la maison elle- même n'est aucune de ces apparitions, elle est, comme disait Leibnitz, le géométral de ces perspectives et de toutes les perspectives possibles, c'est-à-dire le terme sans perspective d'où l'on peut les dériver toutes, elle est la maison vue de nulle part (집-자체 la maison même는 그 어떠한 나타남들 apparitions도 아니다. 라이프니츠가 말하였듯이 집-자체는 모든 가능한 관점/투시들 toutes les perspectives possibles의 실측 géométral이다. 달리 말해 모든 것이 발원하는 무-관점의 항 le terme sans perspective, 즉 어디도 아닌 곳 nulle part에서 바라보는 집이다;).»M.Merleau-Ponty,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지각의 현상학』), p.81
(집에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서 임의로 번역했다…) 말이 어렵지만 쉽게 풀어쓰자면 집-자체를 완전히 정의하기 위해서는 모든 관점에서 집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왼쪽에서도 보고 오른쪽에서도 보고 위아래의 지점에서도 보고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에서도 바라봐야 한다. 또한 집-자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모든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요컨대 모든 관점에서 집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한한 지점으로부터 집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인데 ‘관점’은 어떤 특정 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무한한 관점은 관점의 초과적 의미로서 ‘무-관점’의 항 le terme sans perspective이고 이 말은 ‘어디’라는 곳을 특정할 수 있는 지점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어디도 아닌 곳’에서 집을 바라볼 때 ‘집-자체’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조금 더 생각을 진전시켜 시간의 관점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더 복잡해진다. 무한한 순간의 지점에서 모든 변화의 양상들을 위에서 설명한 무한한 시점으로, 즉 언제도 아닌 시점으로 즉 초과적인 무-시점에서 바라봐야 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재하는 어떤 것의 완전한 의미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할 수 있고 의미를 생성을 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생각은 알기 ‘위한’ 작용이고 어떤 것을 알기 위해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설은 “toute conscience est conscience de quelque chose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라는 말로 이것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따라서 생각하는 것의 조건은 앎의 결핍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핍’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느낌은 마치 도달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절망으로 여겨진다. 나는 그래서 이 결핍을 ‘내 앞의 존재’와의 ‘거리’로 그리고 ‘앎을 향한 생각’을 그 존재를 향한 ‘길’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고 싶다. 그래서 철학이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철학자는 ‘앎을 향해가는 자’ 임에 동시에 ‘무지의 거리를 깨닫는 자’ 임을 알 수 있다. 무지의 거리는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에 희망적이다(여기서 무지의 거리를 깨닫는다는 것이 멀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데 무지의 거리는 앎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근원적인 거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관계의 필수적인 조건을 일깨워준다).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철학함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지혜에 대한 올바른 길을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다(올바른 길이 아니라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질 것이다.) 따라서 철학함은 자신의 지식에 언제나 자기비판적일 것임을 요구한다.
2.« 산다는 것은 (…) 양말을 뜨는 일이다.»
“양말을 뜬다는 것”은 위의 생각과 이어서 생각해보자면 ‘의미를 직조’하는 일의 은유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 “산다는 것은 의미를 직조하는 일이다”라고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사람은 ‘나’라는 1인칭 주어에 여러 가지 의미를 직조한다. 여기에서 “나는 … 이다.”라고 말하는 형식은 ‘나’라는 양말을 직조하는 형식일 것이다.그리고 삶의 행위들은 다양한 실의 두께와 색깔로 자신을 직조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화의 작용으로 “나”는 이렇게 또는 저렇게 또 다시 내게 말해진다.
3.« 산다는 것은 타인의 의도대로 양말을 뜨는 일이다.»
타인의 의도대로 양말을 뜬다는 것은 또 “의미를 직조하는 일은 언어를 통한다”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의미를 직조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작용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를 항상 열망하지만 번번히 좌절하듯이 또는 내가 말하거나 쓰는 행위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는 내가 생각하는 의미의 완전한 대치물이 아니다.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는 본질적으로 타자의 언어다.” 언어는 숨을 쉬는 것처럼 우리 신체에 내재되어 발화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교육을 받아 학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를 학습한다는 것은 ‘언어를 나의 소유로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식을 공동의 영역에 맡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산다는 것은 타인의 의도대로 (언어를 사용하여) 양말을 뜨는 일(즉, 의미를 직조하는 일)이다.
4.« 하지만 그러는 동안 생각은 자유롭고 상아 바늘로 뜨개코가 하나씩 이어질 때 마법에 걸린 모든 왕자들은 뜨개코의 뜰에서 산책한다.»
앞에서도 암시했지만 사람은 ‘의미’를 ‘상징(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한다. 사람의 소통이 기계의 소통과 다른 이유다. 심리 철학자 존 설 John Searl의 말을 생각해보자. 인간과 기계는 공통적으로 정보처리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기계는 상징들( symboles 혹은 기호들, signaux)이 구문 형식(Syntaxe)의 작용을 거치는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반면 사람은 상징들을 하나의 데이터 (data; 주어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그것의 의미sens를 생각한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타자의 언어다”라는 말을 상기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언어는 타자의 언어인 반면 그것을 이해하는 의미는 개인의 주관에 따라 상이하게 달라진다. 예를 들면 누군가 “공책!”이라고 말했을 때 떠오르는 공책의 이미지는 그것을 듣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를 것이다. 반면 인공지능이 “공책!”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공책’이라는 언어의 기호 혹은 ‘공책’을 통해 주어진 데이터의 총체일 것이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의미를 직조하는 과정에서 공유될 수 없는 의미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뇌와 정신”이라는 저널에 실렸다던 11인의 뇌과학자의 선언문은 이 고유한 의미의 영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뇌 과학자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의 관할 범위를 벗어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이는 음악학자가 바흐의 푸가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더라도 그 음악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언어 혹은 언어로 구성되는 사회, 문화는 본질적으로 타인의 언어이기 때문에 “타인의 의도”에 맞출 것을 요구하지만 그 속에서도 의미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사유를 생성해낼 수 있다. 따라서 “그러는 동안 생각은 자유롭고 상아 바늘로 뜨개코가 하나씩 이어질 때마다(언어를 통해 사유할 때마다) 마법에 걸린 모든 왕자들(자신의 유일무이함을 간직한 의미들)은 뜨개코의 뜰(언어로 직조된 세계 그리고 그 공백) 속에서 산책한다”.
« 사물의 뜨개질… 휴지休止… 무無… »
마지막 문장은 언어를 넘어서는 의식과 사유가 중단되는 지점, 침묵의 지점을 말한다. 이 지점에 대한 말은 레비나스의 말로 대체한다.
La vraie vie est absente. mais nous sommes au monde. La métaphysique surgit et se maintient dans cet alibi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에 있다. 형이상학은 이러한 알리바이 속에서 생겨나고 유지된다).
E. Lévinas (에마뉘엘 레비나스), L’éthique et L’infini(『윤리와 무한』, 첫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