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2 (1)

존재와 시간:일상적 현존재(Da-sein)와 소외(entfremdung)

by 유영



문장 2 (1)

존재와 시간:일상적 현존재(Da-sein)와 소외(entfremdung)


«이렇게 안정을 누리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 현존재는 소외로 떠내려가게 되는데, 이 소외 속에서는 현존재에게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이 은폐된다. 빠져 있는 세계-내-존재는 유혹적-안정적이면서 동시에 소외적이다. 이 자기 분해는 모든 가능한 해석의 가능성을 동원하여 시도되기에, 자신이 제시한 “성격학”과 “유형학”마저도 이미 전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소외는 현존재에게 그의 본래성과 가능성—이 가능성이 그저 진정한 실패의 가능성에 불과하더라도—을 닫아버리지만, 그렇다고 현존재가 그 자신이 아닌 그런 존재자에게 넘겨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비 본래성, 즉 자기 자신의 가능한 존재양식의 하나로 몰리는 것이다. 빠져 있음의 유혹적-안정적 소외는 그것의 고유한 움직여 있음 속에서 현존재가 스스로 자기 자신 속에 붙잡혀 있게 만든다.» M. Heidegger, 존재와 시간(이기상 역), p. 243-244.



1. «이렇게 안정을 누리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 현존재는 소외로 떠내려가게 되는데…»


하이데거는 “안정을 누리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존재자를 이야기하면서 “소외”를 말하고 있다. 이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가 이전에 “평균적 존재 이해” 혹은 “일상적 현존재”라고 개념화한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다음 문장을 먼저 분석해보자.


«현존재는 일상적인 서로 함께 있음으로써 타인의 통치 안에 서 있다. 현존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그에게서 존재를 빼앗아버렸다.»(p. 176)


논의를 위해 여기서는 일단 현존재를 간단히 ‘나’라는 주체라고 이해하고 시작해보자. 우리의 상식적인 이해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이다. 철학자 데카르트 René Descartes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틴어 :Cogito ergo sum)”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리고 더 이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존재한다(라틴어: Si enim fallor, sum)”라고 말했다. 데카르트는 이성의 확실성을 세우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의 확실성을 세우기 위해 의심하고 또 의심해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초기 기독교 철학은 이러한 방법적 회의를 근거로 이성으로서 신과 관계할 수 있는 주체를 세웠고 근대 철학은 세계를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나’라는 주체의 확실성을 세웠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타인의 통치”에서 ‘나(현존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에게 존재를 빼앗겼다”고 말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 도무지 그 존재를 빼앗길 수 있는 것인가?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생각하는 주체는 과연 ‘나’인가?” 또는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오류에 빠지는 것이 과연 ‘나’인가?”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내가 어떤 기계장치에 어떤 명령어를 입력했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 기계장치는 입력된 대로 행했다. 과연 이 기계장치가 생각하여 움직였는가? 내가 명령어를 입력했고 그렇게 움직였으니 인간인 내가 생각하여 기계를 움직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움직임만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닌 생각하도록 프로그래밍한 기계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일까?

데카르트의 사상에서의 정신과 신체의 구분(‘res cogitans; 생각하는 실체’와 ‘res extensa’;외연을 가진 실체)은 둘 사이의 영향과 관계에 대해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중에서도 말브랑슈 Nicolas Malebranche정신과 신체가 따로 작동한다는 주장(이중 진리론)을 내세웠다. 이 논리에 의하자면 신은 정신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모든 것을 아는 신은 신체도 따로 창조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에 맞추어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완벽한 싱크로율을 가지고 움직이도록 신체를 프로그래밍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오른팔을 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자유지만 물질로서의 팔이 움직이는 것은 내가 팔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이 프로그래밍한 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우리의 ‘생각’도 뇌라는 신체의 작용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물리적인 현상으로 환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다. 그러니까 생각은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법칙 아래에 있다. 말브랑슈의 이론을 생각하는 뇌까지 이어서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신이 우리의 신체에 명령하는 뇌 까지도 프로그래밍해서 ‘따로’ 자유롭게 존재하는 우리의 정신의 완벽한 복제물이 움직이는 것일까? 한 사람의 신체가 바늘에 찔렸을 때 우리는 아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브랑슈의 이론에 따르면 바늘에 찔린 것은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는 원인이 아니다. 그저 바늘이 찔렸을 때 동시에 정신에서 아프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생각을 생각하는 뇌에 적용해보면, 나의 신체인 뇌가 ‘판단’ 했을 때 나의 ‘정신’은 뇌의 생각과 동시에 똑같은 판단을 한 것이지. 나의 뇌의 판단이 ‘정신’의 생각의 원인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내가 ‘스스로’ 생각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로그래밍된 뇌’와 ‘스스로 생각하는 나’는 별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몸과 나의 영혼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신이 프로그래밍한 신체와는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거두면 문제가 생긴다. 나는 나의 뇌의 생각과 나의 정신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신앙’없이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을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신이 정신은 창조하지 않고 신체만 창조하여 프로그래밍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없이도 신체는 ‘생각’할 수 있다. 생각은 내가 아닌 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Si enim fallor, sum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한다. .


더 옛날 철학자를 떠올려보자. 중세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논쟁의 원인이 된 이슬람 철학자 이븐 루쉬드 Ibn Rushd(유럽에서는 아베로에스 Averroes라고 불렸다)는 지성을 ‘능동 지성’‘수동 지성’으로 나누었다.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며 이데아적인 신(알라)의 지성‘능동 지성’인데 비하여 인간의 지성은 ‘수동 지성’이다. ‘생각’을 ‘글’이라고 표현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생각의 ‘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당연히 저작권도 주장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지성의 목표보편적인 지성을 잘 수용하는 것이지 지성을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능동 지성이 생각한 것, 즉 신이 생각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오직 능동 지성만이 ‘모든 생각들’의 글쓴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내가 ‘스스로’ 생각하지는 못하지만 오류를 범한다는 점에서 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생각의 주체가 내가 아닐지라도 그 생각에 오류를 범하는 것은 ‘나’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오류의 주체로서의 나’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또다시 질문할 수 있다. 오류의 주체가 과연 ‘나’인가? 데카르트의 성찰에서는 나를 오류에 빠지게 하는 악신(惡神; Malin génie)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오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할 때마다 오류를 만들어내는 신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류를 범하는 ‘내’가 아니라 오류의 주체로서의 ‘신’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데카르트가 그래도 이 문제를 해결하였으니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주체의 확실성에 도달한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 문제에 대하여는 신학적인 해결책으로서 해답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신은 선한 신이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오류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인 가정을 빼놓고 본다면 오류를 범하는 주체 또한 내가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은 데카르트에게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정신과 신체가 일원론인지 이원론인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또한 현대 철학자들에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처럼 ‘주체의 죽음’이라던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이에 대한 입장을 정하기에는 내 지식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저 ‘생각한다’는 것으로부터 ‘나’의 존재함이 나오는 것이 그렇게 자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


다시 하이데거로 돌아와 보자. «현존재는 일상적인 서로 함께 있음으로써 타인의 통치 안에 서 있다 현존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그에게서 존재를 빼앗아버렸다». 여기서 앞서 일단 ‘나’라고 정의하고 시작했던 현존재(독일어: Da-sein)는 거칠게 정의해서 ‘스스로의 존재를 염려하고 질문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용의 뒷부분을 보면 현존재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존재를 빼앗겼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를 ‘현존재’의 정의에 따라 말하자면 현존재의 ‘스스로의 존재를 염려하고 질문하는 현존재의 본래성’이 ‘타인’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즉 타인이 현존재의 자리에서 현존재가 해야 할 ‘생각’을 ‘대신’해준다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현존재가 ‘사라진다’ 거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비본래적으로 존재함’도 현존재 존재방식의 한 양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앞서 ‘신’이 우리의 생각을 프로그래밍하였다는 의심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그렇다면 신이 생각하는 것이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만을 그 자리에 놓을 필요는 없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생각의 주체는 어떤 ‘누군가’이기만 하면 족하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그들’을 이 자리에 놓는다.

«우리는 남들이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읽고 보며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 판단한다. 우리는 또한 남들이 그렇게 하듯이 “군중”으로부터 물러서기도 한다. 남들이 격분하는 것에는 우리도 “격분한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고, 비록 총계로서는 아니더라도, 모두인데, 이 ‘그들’이 일상성의 존재양식을 지정해주고 있다»(p. 177)

‘그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도 아니고” , “총계로서는 아니더라도 모두”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그들’ 개념을 푸코가 차용해서 ‘지식, 앎’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피스테메επιστήμη’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서 개념화했는데 ‘동시대 의식체계’ 혹은 ‘동시대인들의 무의식적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이 개념을 체계화하기 전에는‘a priori historique 역사적 선험성’이라는 말로 이것을 표현했는데 이 표현은 더 직관적으로 하이데거의 ‘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듯싶다. 이 개념을 바탕으로 설명해보자. 서양철학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칸트의 ‘아 프리오리 a priori; 선험적’이라는 개념을 들어봤을 것 같다. 여기서 a priori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경험 이전의 틀’을 말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공통적으로 더 나아가 보편적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틀을 말한다. 그런데 뒤에 붙은 단어가 historique ‘역사적’이라는 형용사다. a priori는 경험 이전을 말하는 것이고 역사는 경험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인데 ‘경험으로부터 생성된 경험 이전의 틀’이라는 것은 역설적인 것이 아닌가? 이 말은 ‘이미 생각되고 이해된 지식의 체계가 무의식적인 틀로 자리 잡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생각할 때 이 무의식적인 틀에 의해서 생각하는 것이지 이렇게 사회적, 문화적으로 생성된 인식의 틀 없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생각하는 것은 독립된 ‘나’가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형성된 ‘지식의 구조’다. 즉 ‘구조’가 생각한다.


‘그들’ 혹은 ‘평균화된 존재 이해’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감사한 일이다. 모든 순간에 존재를 염려하며 있는다는 것은 너무나 부담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리 생각되고 인정된 지식 혹은 지식의 무의식적인 구성 방식은 우리가 매 순간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혀있지만은 않도록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그들’은 그때마다의 현존재가 짊어진 존재 부담을 그의 일상성에서 면제해준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에서는 “생각”의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책임 소지가 분명한 반면 (생각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들’이 생각한다”라고 했을 때 “그들”은 결국 ‘비’ 인칭 대명사이다(프랑스어로는 ‘on’이라는 비인칭 대명사로 폴 리쾨르가 분석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아무나’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아무나’이기 때문에 결국 ‘아무도’ 아니다.

« ‘그들’은 어디에나 그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현존재가 결단을 촉구할 때에는 언제나 이미 몰래 그 자리를 빠져나가버린 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모든 판단함과 결정함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때마다의 현존재에게서 책임감을 빼앗아버리는 셈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들’을 끌어내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쉽게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것을 책임질 필요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아무도”아니었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존재의 일상성에서는 대개의 일들이 우리가 ‘아무도 아니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 나타난다. »(p. 178)

이 말은 “평균화된 존재 이해”의 책임 소지를 물을 때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나’가 포함된 ‘우리’도 아닌 ‘그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아닌 그들’이 모든 것의 책임을 감당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책임을 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앞서 푸코를 말하면서 ‘구조’는 생각한다라고 말했는데 예전에 허경 교수가 푸코 관련 강의에서 말한 구조주의의 정의가 이 책임의 문제를 생각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구조주의: 개별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가정된 요소들의 배치에 의해서 그 요소 내지는 장 전체의 특성이 동시적 상관적 혹은 사후적으로 형성된다고 보는 방법론적 입장». 이 입장에 따르자면 ‘구조’는 개개인이 판단한 의미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화되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상호작용 가운데 “동시적, 상관적, 사후적”으로 생성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개개인이 생각하는 의미 혹은 판단들의 합계로서의 구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장(field)으로 부터 생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구성하는 것은 개개인의 합이 아닌 총체적이고 우발적인 장(field) 내의 배치라고 볼 수 있다.


‘안정을 누리며 모든 것을 이해함’과 ‘현존재의 소외’


비로소 «이렇게 안정을 누리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 현존재는 소외로 떠내려가게 되는데…»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 “이렇게 안정을 누린다”라고 하는 것은 현존재가 존재를 항상 염려해야 하는 책무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의 의미는 ‘그들’이 현존재를 대신해서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방식으로) 책임을 지면서 ‘이미’ 이해된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현존재가 ‘스스로의 존재함을 염려하고 질문하는 존재자’ 임을 상기해볼 때 ‘이미’ 이해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의 일상적 현존재는 ‘그들’로 부터 이해된 방식으로서만 ‘질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현존재는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소외’를 말하는 독일어 원어는 entfremdung으로 접두어 ent-는 분리, 이탈을 의미하고 접미어 fremd는 ‘이방적인’을 뜻한다.이를 ‘현존재 자신으로 부터 분리되어 이방의 세계에 있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현존재의 소외세계에서 관계가 끊어진 채로 홀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 자신이 세계에서 결여된 방식으로 함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소외는 ‘언제나 모두와 함께 있는 가운데서 내가 결여된 방식으로 존재함’을 말한다(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가 비-본래적으로 있는 것도 현존재의 한 양식이다). 어떻게 이러한 방식이 가능할 수 있는지는 «이렇게 안정을 누리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 현존재는 소외로 떠내려가게 되는데, 이 소외 속에서는 현존재에게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이 은폐된다.»문장에서 생략한 «(…)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를 분석하면서 드러내 보기로 하겠다.


문장 2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