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2 (1)과 (2) 사이에서

by 유영

“문장들을 읽고 떠오르는 것을 제약 없이 쓰겠다”라고 글을 시작했을 때에는 그때그때의 착상들이 어느 정도 글로 쉽게 옮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관은 글로 풀어쓰기에는 너무 빠르다는 것이 요즘 느끼는 것이다. 구상과 착상으로 이루어진 이해가 글로써 구조를 갖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문장 2를 쓸 때 처음에는 한 문단에서 생각이 났던 여러 가지 생각들을 병치할 생각이었다(그때는 어느 한 문장만을 자르기에는 너무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 한 문장을 이해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글로 쓰니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쓰는 과정에서 새로운 이해의 과제가 생겨나고 결국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와 “소외”문제를 연결해서 생각하기 위해 책 몇 권을 더 읽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용들이 다시 낯설어지고 점점 더 어려운 과제로 다가와서 이번 글은 불확실함 가운데서 더듬어가며 글을 쓰고 있다. 내용에는 논리적이기보다 직관적인 착상들이 많을지 모르고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들이 생길 것 같다. 추후에 연구할 과제의 초안 정도가 될 것 같다. 글을 읽을 때 생각이 들었던 생각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대부분의 생각들은 인상 속에 남아있다. 이 인상들을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만나기를 바랄 뿐이다.


p.s

다음 글에서 하이데거 문장 분석 중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함”을 나르시시스적 이미지 image narcissique와 칸트의 ‘보편성을 요구하는 주관적 미적 판단’을 함께 생각하며 풀어나갈 생각이다. 이를 위하여 내가 세운 가설은 다음과 같다.

:

1. “나는 아름답다”라고 순수한 미적 판단 le jugement du beau pur을 하는 주체는 현존재의 일상적인 빠져있음의 심급 instance이다. 순수한 자기-미적 판단은 일체의 스스로에 대한 필요와 욕망에 무관심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적 나르시시즘과 구분된다.


2. 나르시시스적 미적 판단 le jugement du beau narcissique은 나-자신을 결여한 상태에서 모두와 함께 있음을 근거로 보편성을 정당하게 주장하는 미적 판단이다. 이 정당성 légitimité 이 정당 légitime 할수록, 즉 합법칙적일수록 현존재는 소외된다.”


3. 순수한 자기-미적 판단은 일상 속에 자신을 결여시키는 방식으로 즉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주체가 탄생할 자리를 예비한다. 달리 말해 존재가 결여된 실존의 자리는 새로운 주체의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