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2(2)

by 유영


문장 2(2)

: 나르시시스적 순수 미적 판단(le jugement du goût narcissique pur)현존재의 소외(l’aliénation du Da-sein)


«이렇게 안정을 누리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 현존재는 소외로 떠내려가게 되는데, 이 소외 속에서는 현존재에게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이 은폐된다.»


Introduction

문장 2 (1)에서 생각함의 주체가 내가 아닌 타자로서의 ‘그들’ 일 수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체로 불특정적인 ‘모두’를 뜻하며 비인칭적인 성질을 가짐 또한 알아보았다. ‘그들’은 ‘나’라고 지칭되는 존재자 이전에 존재하여 나에 선행하는 ‘구조’로서 현존재 Da-sein의 본래적 성격,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질문함의 책무를 떠맡는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나에 앞서서 나의 생각의 구조로서의 질문-사유-답의 일련의 시퀀스들을 가지고 나를 ‘대신하여’ 생각한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볼 부분은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 현존재가 “소외”로 떠내려가게 된다는 말이다. 나는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함”에서 나타나는 소외를 “나르시시스적 이미지”를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저번 글 말미에 “현존재의 소외는 세계에서 관계가 끊어진 채로 홀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 자신이 세계에서 결여된 방식으로 함께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것, 혹은 내기를 걸고자 하는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아름답다”라고 순수한 미적 판단 le jugement du beau pur을 하는 주체는 현존재의 일상적인 빠져있음의 심급 instance이다. 순수한 자기-미적 판단인 나르시시스적 미적 판단은 일체의 스스로에 대한 필요와 욕망에 무관심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적 나르시시즘과 구분된다.


2. “나르시시스적 미적 판단 le jugement du beau narcissique은 나-자신을 결여한 상태에서 모두와 함께 있음을 근거로 보편성을 정당하게 주장하는 미적 판단이다. 이 정당성 légitimité 이 정당 légitime 할수록, 즉 합법칙적일수록 현존재는 소외된다.”


3. 순수한 자기-미적 판단은 일상 속에 자신을 결여시키는 방식으로 즉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주체가 탄생할 자리를 예비한다. 달리 말해 존재가 결여된 실존의 자리는 새로운 주체의 자리이다.


이 과정에서 칸트, 하이데거 그리고 라캉의 글에 대한 자의적인 이종교배 같은 것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본 글에서 다루는 주제는 사실 섬세한 사유의 노력이 필요한 작업으로 보여서 이번 글에서는 그리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생각들이 문장의 주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르시시스적 미적 판단과 자기 소외


나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 la critique de la faculté de juger’에서 나타나는 ‘미적 판단 le jugement du beau’‘목적 없는 합목적성 finalité sans fin’과 하이데거의 ‘그들’ 개념을 연결시켜 순수-미적 판단의 주체로서의 나르시시스적인 인간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문장을 도입할 것이다.


1. «Je suis beau car j’ai comparé mon image avec les images en moi. »

: 나는 아름답다. 왜냐하면 내 안의 모든 이미지들을 나의 이미지와 비교해보았기 때문이다.

2. «C’est le jugement universel puisqu’il n’y a rien qui est subjectif comme je ne suis pas.»

: 이것은 보편적인 판단이다. 왜냐하면 나는 있지 않으므로 여기에는 어떤 주관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역설적인 문장을 연결하는 열쇠는 라캉에게서 찾았는데 브루스 핑크가 쓴 ‘라캉의 주체”를 많은 부분 참조하였다.


« The subject exists-insofar as the word has wrought him or her from nothingness, and he or she can be spoken of, talked about and discoursed upon— yet remains beingless. »

: « 그 혹은 그녀는 아무런 존재도 갖지 않는다. 주체는—말이 그 혹은 그녀를 무로부터 만들어낸 한에서—실존한다. 하지만 존재 없이 남아있다. »

B.Fink, The Lacanian Subject(『라캉의 주체』), p.51-52,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프; être, 영; being)실존(프; existence, 영; existence)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이데거의 설명을 보면 존재 être는 « 존재자 êtant를 존재자로서 규정하고 있는 바로 그것, 존재자(이것이 어떻게 논의되건 상관없이)가 각기 이미 그리로 이해되어 있는 바로 그것이다»(존재와 시간, p.20). 쉽게 말하자면 존재는 모든 ‘있는’ 것들이 ‘있도록’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자’‘존재’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존재자의 실존’과 ‘존재자의 존재’는 구분 지어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면 ‘실존 Existance’는 무엇일까? 이것은 Existence의 한국어 번역을 교정하면서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실존’은 한국에서 굉장히 잘못 번역된 용어라고 생각되는데 이것이 실재로서 존재함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실존은 독일어로는 Existenz 프랑스어로는 Existence로 라틴어 Exsistere라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Exsistere는 그 의미상 ‘ex- ; 바깥에, -sistere ; 서있다’라는 뜻으로 풀어쓸 수 있다. 정리하자면 존재는 ‘모든 있는 것들이 있도록 하는 있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Existence‘바깥에 서 있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현상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실존을 정의하자면 ‘바깥(세계) 속에 어떻게든 관계 맺으며 ‘나타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Existence나타날 현(現)있을 존(存)의 의미에서 나타나 있음 자체를 의미하는 현존(現存)으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용어 변경을 해서 구태여 안그래도 좋지 않은 내 글의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본 글에서는 용례 상의 용어인 실존을 그대로 쓰기로 할 것이다.


이제 1번 명제부터 차근차근 논박해보기로 하자.

명제 1: « 나는 아름답다”라고 순수한 미적 판단 le jugement du beau pur을 하는 주체는 현존재의 일상적인 빠져있음의 심급 instance이다. 순수한 자기-미적 판단은 일체의 스스로에 대한 필요와 욕망에 무관심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적 나르시시즘과 구분된다.»


먼저 나르시시스적 미적 판단 le jugement du beau narcissique일상적 나르시시즘과 구분된다. 일상적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을 욕구 besoin의 대상 objet으로 놓는다. 따라서 칸트의 정의에 비추어 해석할 때 일상적 나르시시즘미적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미적 판단은 대상에 대한 어떠한 욕구도 결여된 판단이기 때문이다(Kant). 미적 판단은 판단 자체의 합목적성에 있는 것이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는 미적 판단에서 관심 밖이다. 이에 따라서 칸트의 역설적인 개념이 나온다. 미적 판단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 finalité sans fin’이다.



«Or lors qu'il s'agit de l'agréable on laisse à chacun son point de vue, aucun ne supposent de la part d'autrui l'adhésion à son jugement de goût, alors que c'est là ce qui arrive toujours dans le jugemen de goût sur la beauté. Le premier genre de goût peut s'appeler goût des sens, le second goût de la réflexion, puisque le premier ne consiste qu'à porter des jugements d'ordre personnel, tandis que le second en porte qui prétendent être universels (publics), mais tous deux fondent des jugements esthétiques (non pratiques), sur un objet, ne concernant que le rapport de sa représentation au sentiment de plaisir et de peine.»

: «기분 좋을만한 것 agréable’에 관하여는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 내맡길 수 있고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취미 판단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면 미에 관한 판단에 대하여는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난다. 전자는 감관 취미 goût des sens, 후자는 반성 취미 goût de la réflexion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감관 취미는 순전하게 개인적인 층위에 맡겨지는 것이라면 반성 취미는 보편(공공) 임 universels(publics)을 주장 prétendre함에 맡겨지기 때문이다. » E.Kant, Critique de la faculté de juger, vrin, p.77 (엠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역을 참고하여 조금 더 직관적인 개념으로 번역하였다)


위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칸트의 취미판단을 감관 취미 goût des sens와 반성 취미 goût de la réflexion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감관 취미는 말 그대로 감관과 관련된 취미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체가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는 작용과 관련된 취미다.


감관 취미는 이 외부 자극을 수용하는 것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지 불쾌감을 주는지에 따라서 작동한다. 레비나스의 용어를 빌려 해석하자면 이때 세계는 먹거리로서의 세계 le monde des nourritures로서 존재한다. 나의 자아 ego와 신체 corps에 이물질로서 존재하는 세계는 나의 에고에 끊임없이 침투하는 세계다. 이물질은 타자(autre;다름)이고 여기에서의 ‘나’는 정체성, identitié,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Conatus이다. 이 욕망의 끊어짐을 야기시키는 이물질 chose hétérogène은 정체성(=유지하고자 하는 성질)에 위협이 되는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한다(‘우리’는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끼는 것을 불안해한다). 따라서 ‘나’라고 불리는 ‘동일성’의 건강함을 위해서는 다른 autre 물질인 이물질은 동일성의 확장된 ‘같음’으로 소화되는 digestion 것이 필요하다. 세계를 ‘먹거리로서의 세계’로서 해석할 때 ‘다름’은 나와 ‘같음’으로 소화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나의 동일성은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이물질을 소화하여 확장하고자 하는 욕구를 세계 속에서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를 잠재적 먹거리로 여기는 ‘나’에게 타자는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달리 말해 ‘나’로 소화될 욕구의 대상이지 타자를 타자로서 ‘욕망하는; désir’것이 아니다.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은 일상적 빠져있음의 이해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La satisfaction relative à l’agréable est liée à un intérêt.»

:«기분 좋을 만한 것 agréable은 관심/이해관계 intérêt에 관계되어있다». E.Kant, CFJ, p.66


이에 따라 감관 취미로서의 판단을 정의해보자. 세계의 다름이 ‘나’의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 ‘기분 좋을 만한 것 agréable’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달리 말해 ‘나’의 구조를 확장시킬 가능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일상적 나르시시즘


일상적 나르시시즘은 무엇을 욕구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일상적 나르시시즘의 정식«‘나’는 나를 욕구한다»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나를 욕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욕구한다는 것을 ‘이질적인 것을 나의 동일성으로 소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나’를 욕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나를 확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욕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 글에서 ‘나’라는 표현이 나올 때, 나르시시즘의 정식을 언급할 때를 빼고는 언제나 따옴표를 사용해서 표현하였다. 저번 글에서 우리가 ‘나’의 자리에 ‘그들’이 대신할 수 있음을 보았다(정식에서 있는 따옴표 안의 ‘나’는 나의 자리를 표기한다). 이에 따라 ‘나’의 자리에 ‘그들’을 넣어 정식을 다시 적어보자. «‘그들’은 나를 욕구한다»(앞으로 따옴표를 쓰지 않은 나는 구분을 위해 라고 표기하기로 하겠다.)


‘그들-자신으로서의 나 Je, comme on-même’의 욕구 대상 objet qu’on a besoin으로서의 ‘나’


일상적인 빠져있음으로써의 ‘나’는 하이데거의 해석을 통해서 볼 때 ‘나-자신’으로써의 존재자가 아니라 ‘그들-자신’으로써의 존재자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앞서 보았던 먹거리의 관계가 전복된다. 즉 먹거리로서의 세계에서 ‘그들’이 욕구의 주체는 욕구의 대상이 된다.


«현존재는 일상적인 서로 함께 있음으로써 타인의 통치 안에 서 있다. 현존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그에게서 존재를 빼앗아버렸다.»(존재와 시간 p.176)


그들에게 존재를 빼앗긴 현존재에게 전적으로 이질적인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존재를 자신의 구조인 ‘평균적’인 이해만을 알고 있을 뿐 현존재라는 ‘존재자의 존재자성 l’étantité de l’étant’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다. 는 ‘그들’에게 전적으로 다른 타자 autre가 된다. 따라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즉 «‘그들’은 나를 욕구한다»로서의 주체)는 나를 ‘그들-자신’의 필요에 따른 욕구의 대상으로 환원하여 자신의 먹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의 자리에서 자신을 박탈당했음에도 자신이 그 자리에서 있지 않음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능동적으로 ‘그들’의 욕구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전혀 이해되지 않은 자신의 현존재를 ‘그들’의 욕망에 맞추어 그려낸다. (르네 지라르 rené girard의 모방 욕망을 참고하면 좋을 듯싶다.)하지만 감관 판단이 기분 좋음의 정도에 따라서 즐거움과 불쾌함으로 대상을 판단함을 생각할 때 나는 그들에게 즐거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불쾌함의 대상이 되어 선택받지 못할 수 있음의 불안이 항상 내재하고 있다

관계의 전복에서 이중의 의지가 나타난다. 이것은 판단의 자리에서 파생되는 두 가지 의지다. 첫 번째 의지는 주어의 자리에서 현존재의 본래성을 빼앗은 ‘그들’의 의지다. ‘그들’에게 는 절대적인 위기다. 그들은 개개인으로서의 공동체도 아닌 무의미의 관계성으로서의 구조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미가 전적인 무의미에 바탕을 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본래적 현존재는 그 자체로 ‘그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이물질, 이질적인 것, 타자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어떤 존재자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그들’을 위협하는 ‘무의미’가 되는 것일까? 앞서 문장 2(1)에서 현존재는 “스스로의 존재를 염려하고 질문하는 존재”라고 정의하였다. 이는 ‘자기 자신’이라는 언어의 구조속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자기-자신은 프랑스어로 moi-même인데 même는 ‘자신’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같음’, ‘동일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를 풀이해보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여 자기에게로 물음이 돌아온다는 것이다(영어의 my self 또한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현존재의 물음은 이와 같은데 나 Je(I)에서 출발한 물음이 다시 자기에게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듯이 나 Je(I)는 나 moi(me)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하다. 생각한다는 것은 항상 무엇에 대한 생각인데 ‘나’라는 주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나를 나에게서 결핍된(그러므로 ‘나의 비-존재로서의 나를 표기하기 위해 라는 기호를 도입하였다’), 나와는 다른 ‘타자로서의 나’를 대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나를 타자로서 이해하면서 ‘타자가 아닌 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구조적 모순에 빠진다. 이를 구원하는 것이 ‘그들’의 ‘평균적, 일상적 이해’이다. 다시 하이데거를 재인용해보자.


« ‘그들’은 어디에나 그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현존재가 결단을 촉구할 때에는 언제나 이미 몰래 그 자리를 빠져나가버린 뒤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결단을 촉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현존재의 존재 이해를 ‘그들-자신’의 이해로 바꾸어 말한다. «‘그들’은 생각한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항상 무엇에 대한 생각이고 이 무엇에 대하여 생각하는 주체는 언제나 이해의 결핍이 있음을 상기하여 볼 때, ‘그들’의 ‘생각함’의 본질은 ‘전혀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존재와 시간, p.243)” 어떠한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중간 용어 정리

그들-자신: 일상적-평균적 구조, 동시대의 무의식적 구조

그들-자신으로서의 나: =일상적 현존재=자신의 주체성이 그들에게 박탈되어 있음을 모른 채 실존하는 현존재

나-자신: 현존재=존재자의 존재 자성 l’étantité de l’étant을 묻는 존재자=자신의 존재를 염려하고 질문하는 존재자.

‘나’:’ 그들-자신에 의해 이해되고 규정된 현존재

:나-자신의 질문의 대상으로서 나-자신으로부터 완전하게 결핍된 ‘존재 없는 존재자’


«이렇게 안정을 누리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 현존재는 소외로 떠내려가게 되는데, 이 소외 속에서는 현존재에게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이 은폐된다.»


‘그들-자신 on-même’은 그들이 현존재를 평균적으로 이해하는 이해 구조-자체 la structure de la compréhension-même 다. 앞서 우리는 레비나스의 먹거리로서의 세계 le monde des nourritures개념을 보았다. 동일자인 identité 로서의 내가 타자를 그대로 먹거리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소화의 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처럼 ‘그들-자신’도 ‘그들’에게 전적인 타자인 현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어떤 식으로든지 ‘그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즉 ‘나에게서 결핍된 대상으로서의 는 그들에게 이미 이해된 방식으로 소화되어야 하는데 그 자체로서는 소화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타자이다. 따라서 ’ 그들-자신으로서의 나’는 나로부터 어떤 이해도 도출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자신’의 이해된 것들을 오히려 나에게 투영하려고 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문장 2의 첫 문장인 다음의 문장을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안정을 누리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 현존재는 소외로 떠내려가게 되는데, 이 소외 속에서 현존재에게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이 은폐된다.»


우리가 감관 판단으로서 자신을 욕구의 대상으로 삼는 나르시시즘은 «‘그들-자신으로서의 나’는 ‘나’를 욕구한다.»라고 재정의 할 수 있다. 판단의 대상으로서의 ‘나’는 또한 ‘그들-자신으로서의 나’와 동일시된다. 달리 말해 ‘그들-자신으로서의 나’는 욕구의 대상인 ‘나’주어의 위치한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함’으로부터 이해된 ‘나’의 정체성이 ‘그들-자신으로서의 나’에게 욕구할 만한 대상이기를 바란다. 따라서 ‘나’는 반대로 ‘그들-자신으로서의 욕구의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정리하자면 «‘그들-자신으로서의 나’는 ‘나’를 욕망한다»라는 정식은 실상 «‘나’는 ‘그들-자신’의 욕구의 대상이 되기를 갈망한다»라는 정식으로 뒤집어진다. 이를 위해 ‘그들’의 욕구의 대상이 될 만한 모든 것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나’를 그들의 필요에 부합할 만한 욕구에 따라 ‘자신을 가꾸고’, ‘자신을 광고할’ 새로운 책무를 부여받는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론적인 불안인 자기-자신의 존재를 염려하고 질문하는 주체와는 다른 새로운 일상적 현존재로서의 짐이 부과된다. 이 불안은 ‘그들-자신으로서의 나’로부터 선택받지 못할 수 있다는 위협으로부터 오는 불안이다. 이 불안 속에서 ‘나-자신’의 물음이 대상이 되는 는 ‘그들-자신으로서의 나’로부터 숨겨져야 하는 대상이 된다. 그러함에 따라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 선택받지 못할 두려움에 처한 ‘그들-자신의 욕구의 대상으로서의 나’는 나를 자신에게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소외 aliénation”시킨다. 그리고 “이 소외 속에서 현존재에게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 «나는 를 생각한다»)이 은폐된다.



문장 2(2)는 일상적 나르시시즘이라는 파트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다른 문장들을 횡단하는 가운데 꾸준히 써갈 생각이다. 앞으로 탐구할 연구의 방향으로 세운 가설은 다음과 같다


: «나르시시스적 미적 판단은 일상적 나르시시즘과 다르게 ‘그들-자신으로서의 나’에게 ‘미적 판단의 대상으로서의 나’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판단이라는 점에서, 즉 ‘나’의 비-존재인 를 다시 도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자신의 존재 물음이라는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존재 물음의 구조가 다시 정립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