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17
: '몸'과 '마음', '나' 혹은 나
'몸'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다. 내가 나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이 '몸'도 어찌할 수 없고 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보다도 나의 '몸'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마음'은 어쩌면 내가 어떤 말로써 혹은 이미지로서 설명할 수 없을지 몰라도 내가 어떤 양태로는 이해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말 중에 인상이 깊게 남은 말이 있는데 이러한 이해를 말하는 데 있어서 적절할 것 같다. 이해는 언제나 기분 잡힌 이해다. (원어로는 stimmung이고, 영어로는 mood로 번역되었다.) 이 기분 속에서 어떻게든 나는 '나'의 마음을 이해한다. 모호하고 사유에 잡힐 듯하지 않지만 어떤 방향성이 있다. 그 방향 속에 있는 모호함을 언어와 같이 어떤 문법 속에 위치 지어지는 의식과 무의식 속의 '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어떨까. 나의 '몸'이 느끼는 것을 내가 같이 느끼는 것일까? '몸'은 우리 정신의 가능성이 닿을 수 없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내가 '몸'을 이해하려고 치면 '몸'은 언제나 나에 '앞서서' 존재한다.(*이 앞섬은 일상적 시간의 앞섬 보다 본성(nature)적 관계의 앞섬을 말한다. 또한 지금까지의 서술에서 '나'라는 단어는 의식 속에서 이해하는 '나'를 말한다.)
'몸'은 의식에 앞서 세계의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우리가 나를 어떠한 시작이라고 이해할 때 나는 '몸'인가? '몸'이 내가 기거하는 장소가 아닌 온전한 나라고 받아들인다면 지금 여기에 속하는 '몸'은 몸을 둘러싼 우리의 이해 이전의 세계에 놓여있다. 기분은 '아직' 그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오롯하게, 온전하게, 홀로' 존재할 수 있다. 다른 질문: '몸'은 나로서 존재하는가.
앞서 말한 '기분 잡힘(Stimmung)'으로 돌아가 보자. '기분 잡힘'이라는 번역은 기분의 타동사적인 성격을 잘 반영한다. 요컨대 기분은 나에 앞서 이미 잡혀있고 우리는 이 '이미 직조(織造)되어 있음'를 우리의 세계라 부른다. 내가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의지 이전에 이미 얼기설기 짜인 세계의 기분 속에서 시간의 재촉에 내어 맡겨진 채 속절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일 것이다. 이 기분 잡힘은 그럼에도 몸에 앞서 있지 않다. 몸은 알 수 없는 질문을 한다. 장 뤽 낭시가 말하듯, <몸은 실존에 자리를 제공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존의 본질(essence)은 전혀 본질을 갖지 않는 데 있고 바로 그 사실이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몸이다.(Jean-Luc Nancy, 「코르푸스」, p. 19).>
나는 나를 '정체성'으로도 '자아'로도
혹은 언어적 의미에서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Subject, 주체로도 이해하지 않는다. 이 질문을 우리의 이해 바깥, 종교적 의미로 본다고 생각해도 영혼이 나의 의식에도 무의식에도 몸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 속에 침투하는 무언가 일지 모른다. 몸과 기분 잡힘 사이의 균열속에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도 나의 '몸'도 아니고 '의식'도 '무의식'도 아니다. 이러한 난제에 직면하여 미하일 바흐친이 도스토옙스키에 대하여한 말은 어떤 실마리를 주는 것 같다. <셰익스피어는 언제 셰익스피어가 되었는가. 도스토옙스키는 아직 도스토옙스키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아직 그 자신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Mikhail Bakhtin,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저서의 개작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