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어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영 Feb 17. 2024

단어 20

: 백합

책을 읽다가 멈추고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있다가 문득 어떤 이미지가 기억이 났다. 내가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에 그린 백합 그림이다. 아마도 이 그림은 내가 미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중요한 기점이었던 것 같다.


그때가 몇 학년이었는지 옆자리에는 누가 있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데 그걸 그리면서의 감각이나 감정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나는 뭔가 대단한 걸 해냈다는 생각을 했다. 흰 바탕에 백합의 하얀색을 지켜냈다는 것, 백합이 또한 실제 보이는 것과 같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


그림을 그린 것을 교실뒤에 다른 친구들 그림하고 함께 붙여놨었는데 쉬는 시간이 되면 그림이 붙은 곳에 가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그림을 봤다. 그전에도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이전에는  그림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림을 그리면 다른 사람의 놀라는 모습을 보고 '내가 잘하는 것이 이것이구나' 정도였던 것 같다.


이 백합의 이미지는 의식에 계속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비밀과 같이 남아있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느낀 걸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흰색 위의 흰색의 이미지가 내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는 것이 중학교 시절에 좋아했던 그림을 떠올리니 더 확실해졌다.

이 그림은 클로드 모네의 <까치>라는 작품인데 담장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색조차 눈의 새하얀 빛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그렇지만 이 그림을 좋아한다고 누군가에게 말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이 그림은 백합을 그렸을 때의 경이로움을 떠올리게 하고 그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 그림이 왜 좋은지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의 불완전한 말들이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이 두려웠다. 방금도 '그림자의 색조차 눈의 새하얀 빛을 잃지 않는다는 경이'라고 말했지만 이 말조차 지극히 단편적인 말일뿐이다.


난점은 아마도 나의 경험이 '흰색 위의 흰색'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 '흰색 위에 흰색을 나타내게 하는 행위'자체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추측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기억이 있는데 그리고 싶은 그림을 상상할 때 종종 흰색 바탕에 흰색을 계속 칠하는 상상을 했다. 그런 상상을 할 때면 이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뭐가 다르지? 나는 아무것도 그리고 싶지 않은걸 그리고 싶은 건가... 하고 생각이 미로에 빠졌다.


어쩌면 이 이미지에 아직도 머물러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 결국에는 '무지를 향한 주체'에 관한 것이고 이 '무지를 향하는 것이 엄밀한 지식의 성찰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종국에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하였던 지식에 초과되는 앎.


다만 예전에는 하얀 이미지의 눈부심을 좋아했다면, 지금은 어스름한 밤의 고요함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완전한 흰색 위에 흰색을, 이상적인 행위를 바랐다면 지금은 밤의  고요함을 만들어주는 감각들을 좋아한다.

고요함은 소리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피부에 닿는 살짝 차가운 공기가, 어떤 때는 나뭇잎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어떤 때는 작게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의 소리가 고요함을 만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어 1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