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사라진 시간>
※ 이 글은 <사라진 시간>의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영화감독이 된 배우들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영화학교의 학생들보다 더 좋은 영화학교를 다니는 것은 어쩌면 배우일 것이다. 배우는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며 카메라 뒤의 세계를 다양하게 접하고 아직 찍히지 않은 장면의 글을 많이 보고 자신이 연기했던 것과 실제 스크린의 차이를 여러 번 맞닥뜨린다. 감독과 제작진이 어떻게 영화를 구현시켜나가는지, 구현되기 전 영화의 형태는 어떤 지, 촬영한 것과 편집된 것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있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일은 보통의 경우 드물고 힘든 일이다. 배우는 한 영화에 일정 기간동안 투입되어 작업하는 제작진과 다르게 시간을 잘 조율하여 같은 시기에 여러 편을 촬영하기도 하고 분량에 따라 일찍 종료가 되면 다른 작품 촬영에 돌입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들로 누구보다 더 많이, 더 다양하게 영화라는 세계를 조망하고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서있다. 때문에,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접하며 영화에 대한 독자적이고 고유한 이해가 가능하다.
물론, 배우도 사람인지라 모두 이런 이해가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찬 사람이 있을 것이고, 카메라 뒤의 세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관심과 흥미가 있다면 영화를 이해하고 배우는 데에 배우만큼 적합하고 유리한 직업 분야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종종 배우 출신의 영화감독이 등장하기도 한다. 카메라 앞에서 뒤로 자리를 옮기는 사람들. 영화를 지휘하는 자리에 서는 배우들. 이들의 시도는 영화의 역사 안에서 드물지 않게 시도되며 그 중 일부가 드물게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학습과 이해를 위한 최상의 환경에도 배우에서 감독으로의 전환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정확히는 전환한 채로 지속하는 것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이건 단순히 얘기하면 보고 아는 것과 해보는 것 사이의 간극에 관한 것이다. 이론과 실전.
다른 측면은 이런 시도가, 직무의 전환이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 배우의 입장에서는 본질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배우가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타인이 되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인물이 되는 것. 그 과정을 훌륭하게 해낼 수록 배우로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다른 인물의 외부적 조건과 상황, 그 전사(前史)를 통해 그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 인물과 동화되어 그 인물처럼 행동하는 일. 이 일이 성립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그 인물로 '잠시' 살아가는 것이다. 절대 그 인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극 중 인물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인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아이러니 속에서 배우의 일은 성립한다.
그러니까, 배우가 연출을 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감독이 되어보는 일, 감독의 입장에 서보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잠시 서봤으면 다시 돌아와야 할 자리를 찾는 것이 배우의 의무이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사이의 진자운동. 그 운동의 결과로 배우는 자신을 더욱 이해하고, 타인을 더욱 이해하게 된다. 경험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배우가 감독을 지속하는 일은 더 이상 배우가 아니게 되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이건 특히나 외부의 관점에서 더욱 그렇다.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눈에 띄는 일이고 관객과 친근한 일이며 영화 속 세계에 머무르는 일이다. 반대로 카메라 뒤에 서는 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일이고 관객과 동떨어지는 일이고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일이다. 배우가 카메라를 잡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배우를 자각하지 못한다.
찰리 채플린을 우리가 감독이 아닌 배우로 여기는 이유도 그가 카메라 앞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대부분 연출했지만, 우리는 그를 하나의 캐릭터로 더 익숙하게 이해한다. 배우가 감독으로서만 존재할 때, 그는 배우가 아닌 감독이고, 배우와 감독을 겸임할 때는 그는 배우로서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감독으로의 정체성 전환은 배우에게 처음부터 불가능한 숙제였을수도 있다.
2. 내가 아닌 나
그러니까, 배우가 감독에 자리에 서는 일이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그 자리에 서보고 싶은 욕망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타인을 오랜 시간 자세히 관찰하고 이입하며 비로소 그 자리에 섰을 때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모든 호기심과 흥미와 관점에 대한 답을 알게된다. 상대의 자리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다가 그 자리에 결국 서보는 일, 그게 배우의 동력이고 욕망이고 존재 이유이다. 그리고 충분한 경험 이후에는 다시 그 자리에서 돌아와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정체성의 혼란과 균형 잡기. 배우에게는 언제나 타인에게 깊이 들어간 나머지,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협이 늘상 존재한다.
영화 <사라진 시간>이 얘기하는 것이 이런 종류의 경험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배우'라는 직업이 하는 직업적 경험의 성질에 관해, 특히나 그 고통스러운 지점에 관해, 배우 정진영이 연출을 통해 이야기 한 영화. 배우에 대한 영화. 이건 이전에는 보기 드문 희소한 종류의 영화이다. 왜냐하면, 배우 경험이 없는 감독은 배우의 경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배우의 경험이란, 보통의 경험과는 다른 아주 특이한 경험이다. 타인처럼 보일수록 칭찬받는 직업. 자신을 숨길 수록 직업적 가치를 증명받는 직업. 얼마나 대단하게 다른 사람이 됐는지를 점수 매겨 연말마다 여기저기서 시상식을 열고 상을 주기도 한다. 일반인은 상상하기도 힘든 액수의 금액을 인건비로 받기도 한다. 또한, 스타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라진 시간>이 관객들을 쉽게 설득하지 못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 일 수 있다. 공감하기 힘든 종류의 경험. 혹은 알기 힘든 종류의 고통. 설명을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닌데 이해가 안되는 상태. 이 영화는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기에는 명료하게 전개되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기에는 이해가 어렵지 않다. 만약에, 이 영화가 어려웠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쉽게 와닿지 않아서 어려운 것이다. 전환과 그 지속, 조건과 정체성 간의 관계, 세계와 나의 대립.
이야기는 밤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이영(차수연)과 그녀를 걱정하고 곁에서 항상 보살피는 남편 수혁(배수빈)으로부터 시작된다. 빙의 혹은 접신. 그 이름을 뭐라고 붙여야 할지는 모르지만,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매일 밤 불특정한 인물로 변하는 아내는 자신이 누가 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오로지 남편이 그 광경을 보고 말해줄 뿐이다. 그 시간동안 아내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고 오해받기 딱 좋은 현상이기 때문에, 수혁은 이영과 함께 시골 마을로 오게 된다. 알아서 고립된 상황을 자처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누군가에게서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을사람들에게 이런 소식이 빠르게 퍼져서 두려움의 존재가 된다. 그리곤 마을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매일 밤 자신의 집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자신의 공간에 자신이 갇힌다는 이상한 상황을 부부는 받아들인다. 그리고, 둘은 그 상황을 같이 버티면서 더욱 돈독해진다. 자신의 증상으로 인해 아이를 갖는 것이 두려웠던 이영은 갇히는 상황에도 자신의 곁을 지키는 수혁을 보면서 생각을 바꾼다. 수혁에게 아이를 갖자고 한다. 수혁은 그 말에 감동하고 그렇게 둘에게는 희망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리곤, 집에 불이 나 부부는 영화 속에서 사라진다.
매일 밤 다른 사람이 된다는 설정. 그렇게 매번 타인이 되었다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일. 우리는 그 설정에서 배우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수혁의 엄마였다가, 희극인 이주일이었다가, 역도산이었다가. 알 수 없는 이유 속에 매번 다른 사람이 되는 이영의 심정은 1부(부부의 이야기)에서는 드러나지 않다가 영화의 말미, 4부의 이야기에서 초희(이선빈)의 입을 통해 재등장한다.
밤이 깊어지면 저는 다른 사람이 돼요.
아침이 오면, 내가 어젯밤에 뭐였을까 궁금해하며 하루를 시작해요.
그리고 신나게 그 하루를 보내요.
내가 나로 사는 시간은 그때밖에 없으니까.
엄밀히 얘기하면, 다른 사람이 된 상태의 인물도 '나'이다. 영화 속에서는 이영이고, 초희이다. 자신을 이루는 물질적 구성에는 변화가 없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자각하는 인지 능력이 사라진다. 또한, 거기서 비롯되는 기억도 사라진다. 자신이 한 행동과 말을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힘들어진다.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과 말.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 술에 취했을 때 저지른 일에 대해 '내가 왜 그랬지'하며 한탄하고 후회하고 화가 나는 것도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이영도, 초희도,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자각할 수 있을 때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시간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초희는 저 말(대사)을 한 뒤, "이해 안가시죠?"라며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한다. 드문 종류의 경험이기 때문에 애초에 이해받으려는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짖궃은 농담처럼, 유쾌한 이야기처럼 툭하고 내뱉고 사라지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그 말을 듣던 형구(조진웅)가 말을 한다.
나 그거 알아요. 그거 아프죠. 그게 많이 아파요.
초희의 말을 다시 들어보면, 자신이 고통스럽다고 얘기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궁금해하고, 신나게 하루를 보낸다고 얘기한다. 재밌는 경험이라도 하듯이 얘기하지만, 형구는 그 속의 아픔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왜냐하면 형구는 누구보다도 그 경험의 고통스러움을 잘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영화는 1부와 4부, 그리고 그 사이에 2,3부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2,3부를 따로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형구라는 인물이 중심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이기 때문이다. 1부 이야기가 끝날 때, 주인공처럼 보였던 부부는 사라진다. 영화를 지켜보던 관객들은 그 지점에서 당황스러울 것이다. 예고없이 잘 쌓아오던 이야기를 한꺼번에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1부의 부부는 집안에 누전으로 일어난 화재 사건으로 사망하고,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형사 박형구가 마을에 온다. 2부의 이야기는 형구가 마을에 일어난 이상한 일을 수사하는 내용으로 이뤄져있다. 형구는 부부가 자신의 집에 갇혀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가봐도 이상한 상황. 더군다나, 마을사람들은 죄 지은 사람처럼 벌벌 떨면서 자신은 사건과 관계없다고 알아서 얘기하는 중이다. 형사가 아니더라도 의심스러운 정황이다. 때문에, 왜 이 부부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갇혔을까, 이 의뭉스러운 지점을 이해하기 위해 발로 뛴다. 이장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이영의 기현상에 대해 설명하지만, 직접 보지 않는 한 그 말을 믿기는 힘들다.
마을사람들이 건낸 술을 마시고 취한 형구는 부부의 집 앞에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의구심. 피해자의 입장에 서보려는 형사. 죽은 자는 말이 없을 때, 형사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형구는 술에 취해서인지 부부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환상을 본다. 그 상상 속에서 수혁은 형구에게 따뜻하게 말한다.
우린 여기서 행복했어요. 다 이해해요.
형구는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혼란스러워한다. 그렇게 잠이 들고 깨면 형구의 삶이 모두 바뀌어있다. 이 지점부터가 3부의 시작이다. 형구는 형사로서의 정체성이 지워진 채, 부부가 가지고 있던 조건을 가지게 된다. 매일 밤 바뀌는 증상이 있고(이영의 조건), 초등학교 교사를 하는(수혁의 조건) 형구로 나타난다. 중요한 점은 형구 자신은 2부에서의 자신을 그대로 이어서 기억하는데, 주변사람들이 조건을 바꾼 채 형구에게로 다가온다.
형구는 상황을 부정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집도 사라지고, 부인도, 자식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하나도 없어진다. 자기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자신을 남에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자신이 형사고, 자식이 둘이 있고, 사건을 수사 중이었고. 이 모든 말이 증명할 수 없는 가벼운 말이 된다.
형구는 이를 일종의 악몽이라고 여기고, 깨지 않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잠에서 깨기 위해서 가장 무서운 순간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자신 스스로에게 주는 공포.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해균을 불태워죽인다. 그리곤 다리가 부서져라 뛴다. 그러나, 마치 단독행동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듯, 해균을 살해한 일은 없던 일이 된다. 악몽은 지속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저주.
주변에서 볼 때는 자꾸 자신이 다른 인물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인물.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리는 인물. 그래서 형구를 걱정하고 보살피고 조언하고 치료하려고 한다. 형구도 그런 세계의 시선과 압박에 남아있는 자신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인식하는 나와 세계가 인식하는 나 사이에 괴리가 자신을 흔들 때, 그리고 자신이 대립하고 있는, 자신에게 요구하는 세계가 너무 거대하고 방대할 때 그런 외부적 조건들에 굴복하며 자신을 맞추게 된다.
자신이 이렇게 변한 세게로 온 것은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유치하지만 더 이상 손 쓸 방도가 없기에 형구는 술을 마시면서 세계가 변화한 시점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려고 한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심정으로, 사실은 체념하고 낙담하는 심정으로 술을 마신다. 그렇게 진탕 마셨음에도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 형구는 그렇게 학교로 출근해서 아이들의 수업을 진행한다. 그 전까지 거부하고, 회피하던 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외부의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형구의 정체성은 변화한다.
4부가 되면, 형구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조건을 모두 수용한 채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여태 부정하면서 입었던 옷가지를 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간간히 자신이 옛기억이라고 생각하는, 마치 전생같은 삶의 기억을 가지고는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속에 꽁꽁 숨긴 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3. 전환과 지속
형구는 세계 속에서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배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주장하는 인물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런 사람이라며 꾸며진 세계 속에서 아무리 얘기해봐야 세계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인물일 뿐이다. 형구에게 주어진 역할은 분명하다. 매일 밤 다른 사람이 되는 인물, 초등학교 교사. 즉, 이영과 수혁의 배역을 동시에 받은 인물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형구 집에 설치된 철창은 분명 매일 밤 다른 사람이 되는 증상이 있기 때문에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형구가 잠에서 깬 뒤, 자신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형구가 다른 사람으로, 1부의 이영처럼 다른 인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을 것이다. 영화가 형구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은 영화 속에서 그려내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형구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근데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부에서의 형구를 따라왔을 때는 전자의 추리가 더 그럴 듯해 보이지만, 1부의 이영을 따라온다면 후자의 경우가 더 타당해보인다. 그러니까,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형사 형구가 서게 된 경우와 이영으로, 혹은 초희로 볼 수 있는 인물 안에 형사의 어떤 인물이 들어와 나가지 않는 상태. 어떤 경우든 정체성의 전환은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속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세계 속 조건과 자신의 정체성이 부딪힐 때 결국은 세계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 정진영 배우가 영화를 통해 얘기하는 일종의 배우적 고통이다.
연기하는 캐릭터 속에서 자신을 드러낼 때마다 영화 속 세계가 요구하는 조건에 따라, 배역에게 요구되는 지시사항에 따라, 캐릭터의 맥락과 시나리오에 적힌 지문에 따라 배우는 자신을 지우고 그 안에 타인을 덧입혀야 한다. 자신을 표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낼수록 세계에 부딪힌다. 타인이 되어 본다는 것은 자신이 존재할 때 가능한 일이지만, 자신을 지워야만 타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모순적이다. 그 과정 속에서 겪는 혼란과 불안, 고통과 슬픔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정진영 배우는 이 영화를 통해 이런 종류의 경험을 영화적 언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 같다. 이야기가 4부로 구성되어 계속 장르와 톤을 바꿔가며 전개되는 것도 그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다른 세계에 대한 몰입, 매번 다른 세계를 왕래하는 배우적 경험의 성질이 무엇인지 고민한 결과처럼 보인다. 1부에서 부부 이야기, 2부에서의 수사극, 3부에서 형구의 발버둥, 4부에서 초희가 받는 위로. 이야기는 연결된 듯 그 최소한의 접점을 유지한 채 다른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4. 위로
고통만을 얘기하고자,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이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앞서 얘기한 이영의 존재이다. 형구는 이영과 수혁, 두 역할을 한번에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구성점들. 특히나, 형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체성이 변화하는 3부의 끝자락에 교실에서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이건 전적으로 수혁의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얼핏 봤을 때 두 사람의 정체성의 혼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혁의 정체성을 연기하는 것이다.
4부에서 초희가 등장할 때, 영화는 거의 끝에 도달해있다. 1부에 잠깐 등장한 인물의 재등장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초희는 1부에서 이영을 가르치던 뜨개질 강사이다. 그런데 4부에서는 형구를 보며 아는 체를 한다. 이 지점을 교묘하게 이영과 수혁을 교차해서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형구가 자신을 어떻게 아냐고 묻자, 학교 마치고 뜨개질하러 왔다고 한다. 교사로서의 정체성은 수혁이지만, 뜨개질을 배운 건 이영이다. 두 정체성의 공존.
초희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얘기할 때,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린다. 초희가 얘기하는 경험은 이영의 경험이다. 매일 밤 다른 사람이 되는 나. 그리고 이해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때, 형구는 그 경험을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찍힌 장면은 1부의 장면과 동일하게 찍혀있다.
앞의 1부에서 자연산 송이를 구우면서 수혁은 어릴 적 어머니가 얼마 없는 송이를 나눠먹기 위해 팽이버섯처럼 쪼개서 줬다고, 그게 그렇게 싫었다고 자신의 후회스러운 어릴 적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후회할 때, 이영은 수혁의 어머니가 된다. 그렇게 수혁의 앞에 서서 위로한다. 수혁은 마침내 그때 철이 없었다고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수혁은 이영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언제나 이영의 곁에서 머물면서 그녀의 고통을 나누면서 같이 있는 수혁은 자상한 남편, 좋은 친구이지만 궁극적으로 이영의 고통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형구가 부부의 환각을 볼 때, 수혁이 이해했다는 말은 거짓말에 가깝다.
형구가 자신을 부정하고, 지워내고, 숨겨서 다른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옆에서 바라보며 이해하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깨닫는다. 그러니까 4부에서 그 자리가 뒤바뀌어서 초희의 입에서 이영의 말이 흘러나올때, 형구의 입에서는 수혁의 말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나를 위로해줬던 너를 이제는 내가 위로해줄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영화는 이 이해하기 힘든 경험에 대해 겪고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이야기이다. 둘은 이영과 수혁에서 외피를 바꿔 형구와 초희로 자리에 앉았지만, 그 속의 정체성은 다르지 않다. 거칠게 줄여서 얘기하면 수혁이 이영의 경험을 대신 겪고 이영을 위로하는 이야기이다. 형구가 초희를 위로한 뒤, 한 마디를 덧붙인다.
다들 어쩔 수 없잖아요. 울지 마요. 혼자만 그런게 아니니까.
여기서 다들이라는 것은 주변의 세계 혹은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동료 배우 혹은 타인이 되어야 하는 환경에 사는 사람들 모두. 자신을 가리고 정체성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이런 상황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이 깎아지고, 사라지고, 흔들리고, 부정 당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힘이 되는 건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부는 집 앞 풍경을 보며 계절의 변화에 대해 얘기한다. 날이 짧아졌다고. 그러면서 자연이 얼마나 정확히 변하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이 말은 4부의 시작점에서 형구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 겨울이 올 것 같다고, 바뀌는 게 정확하다고. 세계는 때되면 변화하고 그 변화는 정확히 온다. 거스르거나 바꾸거나 다르게 오지 않는다. 자연은 곧 세계라는 비유로 이해한다면 세계는 나와 관계없이 때 되면 변화하고, 정확히 바뀐다. 때문에, 세계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전지전능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이 그 자연 앞에서 작은 존재라는 점을 생각할 때, 자연으로부터, 세계로부터 주어진 것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불가피하다.
5. 무조건(無條件)
정진영 배우는 똑같은 형구의 모습을 흑백과 컬러 두 가지 버전으로 영화의 처음과 끝을 감싸놓는다. 형구는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이상을 장면에서 보지 못한다. 다만 차이는 색깔의 유무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흑백이던게 보고 난 다음에는 컬러로 보인다. 영화가 전부 컬러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흑백이 의미심장한 선택일 것이다. 또 하나 의문스러운 것은 형구가 자신이 형사라고 인식할 때, 주장할 때 입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이 어느 시점에 존재하는지는 모르나, 우리는 형구가 자신이 형사라고 인식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실을 종합해서 이해했을 때, 영화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처음의 의미는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즉, 이미지를 이해하기 이전에 보는 것은 색깔이 빠진 무의미한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영화의 과정을 거쳐서 이해한 이미지는 형구가 바뀐 정체성과 관계없이 자신을 계속 찾는다는 것이다. 해당 장면은 아무도 형구에게 말을 걸지 않고, 아무도 형구에게 아는 체 하지 않는다.
2부의 마지막 지점에 형구가 술자리에서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박상철의 '무조건'을 부르고 있다. 또한, 3부의 마지막 지점에서 다시 상황을 돌리려고 형구가 송로주를 마실 때도 '무조건'을 부른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상태'. 노래는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지만, 형구가 부를 때는 자신에게 아무런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을 바라고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사회적 지위, 직분, 역할, 지역, 나이, 성별, 외모 등 여러 세속적 조건에 의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세계로부터 재단당하고 제련당하게 된다. 나라고 우기고 싶은 많은 조건들이 있지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상황과 맥락이 뒷받쳐주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이 아닐수도 있게 된다. 때문에, 이렇게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고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간섭은 줄어들지만 자신을 잃어가게 된다.
형구가 형사 옷을 입고 걸어가는 장면으로 영화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것은 세계의 조건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형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로 사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배우 정진영은 배우적 경험의 끝에서 정체성의 변화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나. 그리고 그렇게 인식하는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한다. 때문에, 배우 정진영이 감독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과는 별개로 영화는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경험에 대해 말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일종의 해답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감독으로서의 전환이라기보다 정체성의 변화, 재구성, 재확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