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본 것은 막 엽차 잔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앞에 앉아 있는 두 남자는 옆에 있는 친구의 소개로 시 동인의 모임에 같이 하자는 대화를 마무리 지을 즈음이었다. 먼지 묻은 고동색의 티셔츠에 무릎이 약간 나와있는 양복바지에 구겨 신은 쎄무로 된 운동화도, 구두도 아닌 것을 발에 붙인 것 같은 헐거운 자세로 앞에 있는 두 남자에게 다짜고짜 말을 던지고는 쌩 하고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 영 다방에 있을게." 휘익 돌리는 그의 한쪽 눈만 얼핏 봤는데, 내가 그때까지 사는 중에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날카로운, 훗날 나는 숫돌에서 막 벗어난 칼날에서 그때 그의 눈빛을 봤었다. 그랬구나.
시간을 자르며 같이 해 온 시간들을 토막토막 잘라 마음에 담아 여기까지 왔구나. 같이 만들어 갈 것 같지 않았던 매몰차 보였던 남자와의 이야기가 42년째 이어 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 어느새 칼날 같았던 눈빛은 햇살 같은 눈빛이 되어 있다. 살포시 보듬어 보는 우리의 이야기가 더 정겨운 것은 아직 별일(?) 없이 무난하게 산다는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것을 미리 챙겨 주는 것으로 각자 행복해하는 잠깐을 맛보는 시간. 시월의 중간. 만물이 채워져서 조금씩 비어 가는 들판처럼, 휑 하니 비어 질 것임에도 이미 채워 놓은 것들로 튼실하게 웃을 수 있는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