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나눈 따뜻한 밥상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리뷰

by 유연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기세가 예사롭지 않더니 곧 천만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것 같다. 이에 영화계는 고사위기에 처한 영화산업이 살아날 계기가 될지도 기대하는 모양새다. 설 연휴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는 내용인데다, 대중적인 호흡의 (특별하진 않지만)무난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이 어우러진 결과로 보인다. 이미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단종서사가 다루어졌기에 호기심을 부를 소재는 아니었을 터, 이 영화는 무엇이 달랐을까.


단종, 한명회, 수양대군.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영상매체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들이다. 이광수의 <단종애사>로도 잘 알려져 있듯 단종은 열일곱 어린 나이에 유배지에서 죽은 불쌍한 임금. 대다수 관객이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이 영화는 이전과 다른 부분에 주목한다. 바로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알려진 엄흥도라는 인물과(통인으로 기록된 사람과 엄흥도, 둘을 합한 설정이라고 한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백성들, 유배지 마을 사람들이다. 여기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외떨어진 유배지 한복판으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유배생활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여러 번 등장하는 단종 이홍위(박지훈)의 밥상이다. 엄흥도(유해진)가 자신의 마을을 유배지로 자청한 것도 사람들을 잘 먹이고 싶어서였고, 삶의 의지를 잃은 단종에게 다시 힘을 준 것도 그 평범한 밥상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앞날이 어찌 될지도 모르지만 백성들은 애써 밥상을 차리고, 어린 나으리가 밥을 먹었는지 아닌지를 걱정한다. 궁에서 먹던 산해진미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구한 재료로 정성껏 차린 따뜻한 밥상, 그것이 단종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큰 몫을 한다. 밥 지은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하고, 그들을 위하는 나라를 되찾고 싶게 만든 것이다. 단종이 세종대왕의 관심을 받았던 손자라고 하니, 영화에서처럼 백성들을 아끼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것도 있음 직하게 느껴진다.


음식에 대한 고증에는 이견도 있는 것 같다. '기록에 세조는 노산군의 유배길에 각 고을에서 얼음을 바치도록 명했고 과일, 수박, 참외 등을 올리게 했다. 영화는 이런 모습보다는 ‘흰 쌀밥과 고깃국’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조선 전기 강원도 민중의 염원이 쌀밥과 고깃국이었을까? 이는 가난했던 해방기의 정서에 가깝다. 조선 후기가 되어도 닭보단 꿩사냥이 일반적이었고 돼지고기를 거의 안 먹었고 누린내 때문에 통돼지 바비큐를 만드는 모습 또한 전혀 역사적이지 않다.'(심용환 역사학자, 씨네21 1543호)


하지만 허구와 상상일지언정 개연성이 느껴지는 건 '밥정(情)'에 대한 우리네 정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늘 '언제 밥 한번 먹자'가 인사말이며, (맥락은 다르지만)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가 용의자에게 한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말이 명대사로 등극했을 정도니 말이다. 더구나 마주 앉아 나누어 먹는 밥그릇 수가 늘수록 정도 두터워지는 법이라, 이홍위가 백성들과 겸상을 하며 대화하는 장면들이 훈훈해질수록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었다. 아, 이것 때문에 이별이 더 슬퍼지겠구나 하고. 영화 속에서 왕과 함께 산 것은 엄흥도뿐만 아니라, 나물을 캐고 밥을 지어 나누어 먹은 모두인 것이다. 관객도 그 과정에 동화되어, 엄흥도가 마치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줄을 당기고 시신을 수습하는 아픔을 자연스레 함께 하게 된다.


다소 아쉬운 점은 단종의 아내 정순왕후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정순왕후는 단종보다 한 살 많았다고 하니 그 역시 고작 열여덟이었으며, 단종이 죽은 후 노비로 강등된 채 세조의 도움을 받지 않고 64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사후에 묘소가 왕릉으로 복권은 되었으나 사는 내내 얼마나 억울하고 고달팠을까. 이야기가 방만해지지 않으려면 인물도 취사선택이 필요했겠지만 대사 한마디로도 등장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유사 어머니로 여겨지는 궁녀 매화(전미도)의 마지막을 보여 준 것과도 대비되는데, 양반보다 백성의 삶에 집중한 것으로 추측해 본다. (실제로는 궁녀 여섯이 함께 왔고 모두 강물에 투신했다고 전해진다)


장항준 감독은 대중매체를 통해 유쾌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왔기에 영화의 정서가 만든 이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왕과 사는 남자>는 감독 본인의 장점을 잘 살려, 관객으로 하여금 역사적 기록 뒤편에 있는 사람들과 삶을 보게 한다. 밥상처럼 사소한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