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하나 찍고 가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마음

by 유연

첫 수업이 끝나고 작가님이 말씀하신다. “오늘 나눈 얘기는 간단하게라도 오늘 메모해 두세요.” 아이고, 내가 독서모임에서 아이들에게 한 말이 이렇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모임을 신청할 때 숙제로 글을 쓰는 아이들의 마음을 느껴보자는 생각도 있었는데, 역시 경험이 약이다. 지하철 안에서 메모앱을 열고 생각나는 것들을 최대한 적어보지만, 한 때는 전화번호부가 필요없던 내 기억력은 안드로메다로 간지 오래다.


읽는 사람보다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라고 한다. 그러니 글쓰기 수업도 많이 생겨서 종종 염탐했지만, 내가 진짜 글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쓰고 싶은지 확신이 없었다. 소싯적에는 소설을 쓰고 싶었고, 그 마음은 영화로 옮겨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재능에 대한 믿음도, 불확실한 삶을 살아낼 용기도 없었다. 그나마 세상 무서운 줄 모를 때가 용감한 법, 일을 접고 육아에 전념하는 사이 한 세월이 뭉텅 사라지고 나를 드러낼 용기도 작아졌다.(저급한 체력과 게으른 완벽주의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이 모임에 오게 된 건, 모집안내문 중 ‘나를 더 잘 아는 기회를 삼아보고자 한다‘는 문장에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오십춘기인가.


살짝 긴장되는 마음으로 책방계단을 올라가니 벌써 자리가 꽉 차 있어 허둥지둥 남은 한 자리에 앉았다. 세상에, 글 쓰시는 분들은 부지런하기도 하구나. 곧이어 낯선 자리에 간 내향인에게는 내 심장소리가 들리는 자기소개 시간, 다행히 마지막 순서다. 이미 서로를 아는 분들인데도 본인의 성향, 취향,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정성껏 말씀하신다. 말투나 취향은 달라도 진지하고 정확하게 말하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각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긴장도 좀 풀리고, 오랜만에 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는 사생활을 내보이는 것이 불편해서 블로그도 인스타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글을 쓴다는 건 걸음마 하자마자 달리기를 하는 격이다. 또한 가장 무서운 독자는 훗날의 나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오래 전 일기만 발견해도 어머나, 누구신지, 하고 없애버린 적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나의 염려에 공감해주고, 적당하게 드러내는 어려움들을 나누어주셔서 위안이 되었다. 읽고 쓰는 마음들에는 비슷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소설, 영화, 드라마, 이야기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판타지가 아닌, 나와 같은 땅에 발 딛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자주 마음을 뺏긴다. 우연같기도 필연같기도 한 일들, 당연해보이지만 조금만 각도를 틀면 달라지는 일들, 장르를 불문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이야기들을 탐색하고 기록하는 일이 아닐까. 지금껏 용기가 없어 쓰지 못했다면, 쓰는 일이 오히려 숨어 있던 용기를 가져다 줄 지도 모르겠다. 이 수업이 끝나고도 계속 쓸지 아닐지,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나에게 글쓰기는 복잡다단한 인생길에 잠시 쉼표를 찍고 서서, 나를 돌아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수업 후 한 분이 ‘겨울에 시작된 우리 수업이 봄날 마무리 될 거라는 생각에 3개월의 여정이 설렌다’는 말씀을 카톡에 남겨주셨다. 아, 그렇지. 12주는 계절이 바뀌는 시간이었지. 그저 일상을 해치우느라 무감해졌었는데 이렇게 새삼 배운다. 그리고 올해는 이 곳을 오가며 그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게 될 것이고, 또 알게 되겠지.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많고, 내가 만날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