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통행 4
드디어 11월 10일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새벽부터 경의선도로에는 차량들이 길게 줄지어 서서 남북출입사무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제1차로 개방된 두 곳의 도로 출입로 중 대부분은 경의선출입로로 몰려들었다.
실제로 동해선 출입로에 비해서 이동자체가 편하기도 했지만 개성공단으로 입출경하는 관계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삼통이 자유로워진 개성공단은 그야말로 축제분위기였다.
두 곳의 철도 남북출입사무소는 막바지에 접어든 북한지역 철로 구간의 공사가 끝나는 대로 제2차로 개방될 예정이다.
그리고 항만과 공항을 이용한 일반인들의 여행까지는 실무적인 준비과정을 더 거쳐서 제3차로 개방될 예정이었지만 기업이나 정부차원의 입출경은 오늘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다.
정각 아홉 시가 되자 출입관리사무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일반 차량들은 좌우의 창문을 열고 양방향으로 설치된 검색대 위에 스마트폰을 접촉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스마트폰에 탑재된 모바일 여권을 검색기에 살짝 갖다 대자 곧바로 ‘삐리릭’ 소리와 함께 출입일자의 스탬프가 자동으로 찍혔다.
그런데 대형버스가 들어오자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휴대용 검색기를 지참한 출입사무소의 직원들이 직접 버스에 올라서 처리하려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나마 현 상황에서는 최상의 방안이기는 했지만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는 옥에 티가 분명했다.
대형버스를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이었다.
마치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교통카드로 요금을 지불하는 행위와 같았기에 길게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도 빠르게 빠져나갔다.
예상했던 대로 노인들을 모시고 가는 가족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았고 거의가 북쪽의 고향을 찾아가는 이산가족들이었다.
한국 전쟁 때 무심코 떠나온 고향땅을 팔십 년이 다되어 방문하게 된 실향민들의 설레는 감정은 차량에 가득 실린 선물보따리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서 대기 중인 귀향인들 가운데는 어느덧 사만 명을 웃도는 북한이탈주민들의 행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윤 비서관의 삼일특공대에서는 처음부터 이들을 특별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의 역할 여하에 따라서는 사십 년 전의 동독과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차량행렬들 사이에는 의외로 외국인들도 많았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동토의 왕국을 하루라도 빨리 경험하고 싶은 호기심 많은 세계의 젊은이들이 무전여행지로 선택한 것이다.
이들의 복장은 간편복에 배낭 하나씩을 어깨에 메고 있었을 뿐 자유로움에 방해되는 그 어떤 거추장스러움도 거부했다.
그들의 배낭에는 한결같이 삼각모양의 작은 깃발들이 나부꼈다.
천주교 평양교구 명의로 대량 제작하여 북한으로 출경하는 이들에게 나누어준 예쁜 깃발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평양 대기도회’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만 명의 젊은이들 대부분은 마지막 일정으로 평양대기도회에 합류할 계획으로 북한지역의 들과 산을 마구 헤집고 다닐 예정이었다.
젊음이라는 열정은 대단히 전염성이 빠른 특징이 있어 이들로 인하여 북한의 젊은이들도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천천히 그렇지만 광범위하게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말이다.
윤 비서관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장 팀장과 함께 이 역사적인 장면을 마주했다.
장 팀장의 태블릿 PC를 이용하여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던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의 현재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봤다.
“정 위원장이 대량 탈북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근거는 뭘까요?”
이 말에 윤 비서관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의 왕국을 이미 이십 년 가까이 통치한 지도자라면 인민들에 대해서 가지는 어떤 믿음 같은 것이 있지 않겠어?
자신감의 표현이겠지!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만 제1단계의 한반도 실행계획은 무난히 안착될 거야”
“늦어도 한 달 안에는 결정이 나겠지요?”
“어쩌면 한두 주안에 판가름 날 수도 있겠고…”
북한을 향해서 끊임없이 밀려들어가는 차량들의 물결은 이 시각 현재 전 세계의 이목을 또다시 한반도로 집중시겼다.
경이로운 시선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던 윤 비서관의 감정이 벅차올랐다.
“저 행렬들을 보라고! 한번 터져버린 통일의 물줄기는 이젠 누구도 막을 수가 없을 거야,
저 도도한 역사의 물꼬를 누구라서 막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야.
난 우리 민족의 역량을 믿어! 멋지게 해낼 거야 우리 민족은!”
정작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론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걱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밤 한꺼번에 몰려든 동독인들에 의해서 철옹성과 같았던 베를린 장벽은 일시에 무너졌다.
그런데 사십 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의 북한 주민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초조한 심정으로 자유 통행 3일째를 무사히 보낸 다음날 아침이었다.
민 대통령은 최 실장과 국토부장관을 집무실로 불러서 다시 한번 상황을 점검했다.
대형 벽걸이 TV화면에서는 4일째 자유통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경의선남북출입사무소의 출입경 표정들이 방영되고 있었다.
동시에 개성과 금강산, 평양의 실시간 현장 모습들이 생동감 있게 방영되고 있어 마치 통일이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화면을 골똘히 바라보던 대통령이 뭔가를 발견했다는 듯이 하는 말이다.
“장관! 세계 최강의 IT수준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모바일 여권에 스탬프를 찍느라고 저렇게까지 시간을 허비해야 되는지 고민해 볼 문제 같지 않습니까?”
버스에 오른 출입사무소의 직원들이 휴대용 검색기를 이용하여 일일이 전자스탬프를 찍느라 지체되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던 대통령이 하는 말이었다.
“대통령님의 지시대로 최대한 신속하게 조치한 결과입니다만…”
장관의 이 말에 대통령이 화면을 더욱 뚫어지게 쳐다봤다.
“장관! 하이패스처럼 할 수는 없을까요?
모바일여권을 일일이 수동작으로 확인할 것이 아니라 하이패스처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우리나라의 교통 업무를 총괄하는 국토부장관이 대통령의 질문에 쩔쩔매고 있었다.
어떻게든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서는 대통령의 질책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대통령은 당장의 명료한 해답을 원했기에 장관의 다음 말을 잘라버렸다.
“우리나라의 IT기술 수준이라면 장관의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한 달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실력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장관!”
얼굴표정이 사색으로 돌변한 장관을 바라보며 이번에는 대통령이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
“알아요 장관! 쉽지는 않다는 것을요!
하지만 통일을 향해서 거침없이 질주해야 할 판국에 저런 자잘한 걸림돌들은 우리 정부가 나서서 신속하게 치워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정부의 역할이지 않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저희들의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차후로는 대통령님의 지적에 앞서 선제적으로 대응하도록 더욱 긴장하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모두 더욱더 긴장해서 통일의 문을 활짝 열어젖힙시다,
우린 잘할 수 있어요, 아니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