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통행 5
국토부장관이 돌아가자 대통령은 습관처럼 집무실의 서편 창가 쪽으로 걸어갔고 최 실장도 이내 뒤따랐다.
청와대의 경내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구경하던 꼬맹이를 발견하자 대통령이 익숙한 동작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엄마의 치맛자락 뒤로 재빨리 숨어든 꼬맹이가 3층 창가를 빼꼼히 바라보고 있었을 때 꼬맹이의 엄마가 대통령에게 가벼운 목례로 감사를 표했다.
이렇듯 우리 국민들과 언뜻언뜻 눈길이 부딪칠 때마다 대통령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에너지의 충전이 필요할 때마다 이렇듯 열심히 창가로 걸어갔다.
“최 실장! 잘되겠죠?”
“이제 겨우 삼일이 지났습니다만 지금까지는 대체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이제 겨우 삼일이 지났지요,
그런데 난 어째서 삼 년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요,
매일매일이 피가 마르는 것 같아요”
“정 위원장님을 믿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넘쳐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음 행보를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북경말씀이시죠?”
“그래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되겠지요!
제아무리 크고 강대한 국가라 할지라도 약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굳이 그들의 목덜미에 난 비늘을 움켜 잡아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되겠지요,
그래야만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다면 난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대통령은 마치 그 옛날 고구려의 안시성을 지키던 양만춘 장군의 결기처럼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장군의 마음가짐이 이처럼 단단하지 않았을까?
한반도를 향해서 거의 매일 발진하던 전략폭격기들의 출격 횟수도 남북한의 여행자유화 조치 이후 잠시 뜸해졌다.
하지만 동서해상을 휘젓던 세척의 항공모함은 여전히 주변을 맴돌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동해는 니미츠호가 미일연합훈련을 핑계 삼아 어슬렁거렸고 서해는 레이건호와 루스벨트호가 한반도 인근해상을 왔다 갔다 하면서 주체 못 할 힘을 과시했다.
항공모함 세 척이 한 달 가까이나 한반도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은 뉴프레지 대통령의 경고가 단순한 허풍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미 대통령 뉴프레지가 공언했던 대로 전쟁은 다음 달 성탄절 이브까지만 잠시 유보되었을 뿐이다.
그 안에 북한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크리스마스를 콕 찍어서 폭죽놀이를 개시하겠다는 백악관의 입장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평화를 염원하는 지구촌 사람들이 그토록 오지 않기를 바랐던 공포의 12월은 기어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전쟁이 될지도 모를 북미전쟁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팔십 년 전의 참혹했던 전쟁을 또다시 경험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는 정파와 이념의 구분이 없었다.
전쟁을 회피할 수만 있다면 남과 북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해 보자는 사회적 공감대는 이미 충분히 형성돼 있었다.
이런 와중에 극우성향의 한 야당 정치인이 유튜브 방송에서 했던 말이 큰 논란을 야기했다.
뉴프레지 대통령이 예고했던 ‘크리스마스 폭죽놀이’를 환영한다는 실언을 함으로써 그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급기야 이 정치인은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렸는데 그만큼 전쟁을 회피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내부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한 달 전 도보다리 위에서 민 대통령이 정 위원장에게 전해준 서류는 삼일특공대가 작성한 한반도 실행계획의 제2단계 보고서였다.
정 위원장이 평양으로 돌아가고서 정확히 2주일의 시간이 지났을 때 대통령집무실의 검정색 직통전화기가 또다시 즐거운 비명을 질러 됐다.
“일전에 대통령님께서 전해주신 선물에 대해서는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해 보았더랬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그래요 까짓것 한번 해봅시다!입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대통령님만 믿고 가볼 테니까 우리같이 큰일 한번 저질러봅시다!”
“정말 잘 결정하셨습니다!
위원장님의 결단으로 우리 민족은 이제 올바른 이정표를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두 강대국이 연합하여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민족최대의 위기 상항입니다만 우리가 한 덩어리로 대응한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북과 남이 힘을 합친다면야 그 무엇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우리 공화국은 이제 아무런 의심 없이 대통령님과 함께 갈 테니까 우리가 함께할 통일여정을 잘 안내해 주십시오!”
자유여행을 기반으로 하는 제1단계의 한반도실행계획에 이어서 보다 심화된 제2단계로 넘어가는 결단도 정 위원장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OK’ 싸인으로 화답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 위원장의 결단은 곧장 행동으로 옮겨졌다.
남과 북의 실무진들이 서로 마리를 맞대고 실무준비에 돌입했다.
이미 정 위원장이 삼일특공대의 보고서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터라 핵심사항에 대해서는 특별히 시간을 끌만한 쟁점사항은 없었다.
속도감 있게 준비한 합의사항들이 최종적으로 정리되자 12월의 첫날인 토요일 아침, 남북한 정부가 동시에 중대 소식을 발표했다.
다음 주 월요일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중대 합의사항을 발표한다고 예고했다.
이 소식에 세계의 여론은 또다시 한반도로 집중되었고 서울과 평양에 파견된 특파원들을 잔뜩 긴장시켰다.
최근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뉴스들은 웬만하면 초대형 특종감이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 이 합의내용을 알아내어 특종 보도할 것이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편 은밀히 진행되던 한반도 내부의 일들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던 미중일 세 나라 정부는 태연한 척하던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적전 분열의 조짐마저 보였다.
이미 3주 전에 NEO작전도 마무리되었지만 뉴프레지 대통령이 너무 시간을 끌면서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는 불만이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백악관 내부에서도 튼볼 안보보좌관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지만 대내외의 빗발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뉴프레지 대통령은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치킨게임도 상대가 돼야 짜릿할 텐데 말이야,
이봐! 우리 미국은 대형트럭 나비스타야!
그깟 미니 서브콤팩트 정도를 가지고 무슨 걱정들인가!
내가 한국대통령에게 약속한 크리스마스 폭죽놀이는 지상최대의 불꽃놀이가 될 테니까 두고 들 보라고!”
미국대통령의 자신감 넘치는 나비스타 이론은 천만다행으로 우리 민족에겐 전쟁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팔십 년 전의 참상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남과 북의 팔천만 구성원들은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태세였고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들도 동정 어린 시각으로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