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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고려연방 (45)

북경선언 7

by 맥도강

칼치의 이 말에 기수와 경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단번에 이해하게 되었다.

장백산천지회가 배은하를 찾는다면 그 목적은 단 하나, 배 교수와 마찬가지로 그의 딸도 해치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탈을 쓴 살인마들이기에 사람목숨을 파리 목숨쯤으로 하찮게 여기는 존재들이다.

지금 이 순간, 동정을 바라는 그 어떤 행위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기수가 태도를 바꿔서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또 뭐라고! 우리한테 볼일이 있던 게 아니고 배은하한테 볼일이 있었구먼,

배은하 사는 곳만 가르쳐주면 되는 거지?

그게 뭣이 어렵다고 닭모가지 날릴 때나 쓰는 칼까지 꺼내 들고 무섭게들 그러는 거야,

우리가 가리켜 줄 테니까 따라와!”


경태도 기수의 의도를 이심전심으로 이해했던 터라 능청스럽게 거들고 나섰다.

“은하 누나는 바로 옆 동네 가리봉동에 살고 있어!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우리가 안내해 주지,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될 일을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지”

기수와 경태가 순순히 협조해 준다고 나서자 얼떨결에 칼치 일당이 뒤따르게 되었다.


시장을 지나 대로변에 들어서자 칼치일당이 초조한 기색으로 두 사람을 바짝 따라붙었다.

이때 앞장선 기수는 느긋한 표정으로 이들을 안심시켰다.

“은하 누나는 빌라에 살고 있는데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

기수가 염두에 둔 목적지 근방에 이르자 기수와 경태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칼치일당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이십여 미터 전방의 대림파출소 앞에는 마침 2인 1조로 순찰 나가던 경찰이 순찰차에 타기 위해 거리에 나와 있었다.

칼치가 걸음을 멈추고 분위기를 살피는가 싶더니 품속의 칼을 기수 옆구리에 들이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돌아서 다른 길로 가!”

다른 패거리 중 한 명도 경태의 옆구리에 칼끝을 들이대고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경태가 다시 능청스럽게 말한다.

“알았어 알았어! 빠른 길 놔두고 굳이 둘러서 가잔 말이지,

난 또 시간이 촉박한 줄 알았지,

그래그래 둘러서 가자고!”

이때 기수가 갑자기 화난 표정으로 큰소리로 말했다.

“아야! 아프단 말이야 새끼야! 그만 좀 찔러!”

이 돌발적인 상황에 칼치 패거리가 짐짓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드디어 기다리던 상황이 만들어지자 경태가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강도야! 강도야!”

이 소리에 순찰차에 오르려던 경찰 두 명이 달려오고 있었고, 긴급 상황을 알아차린 파출소 내의 다른 경찰들도 쏟아져 나왔다.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서 황량한 대로변에서 도망자들이 몸을 숨길만한 공간은 마땅치가 않았지만 그들은 사력을 다해서 도망쳤다.

결국 칼치를 비롯해서 주동급 서너 명은 놓치고 말았지만 삼십여 분의 추격 끝에 칼치의 부하 세 명이 체포됐다.

그런데 수갑을 채우던 이들의 왼쪽 손목에는 예외 없이 산모양의 파란색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이것은 장백산천지회를 표식하는 문양이었다.


사건조사를 받기 위해서 경찰서로 이송 중이던 순찰차 안에서 경태가 어디론가 급히 연락을 취했다.

“누나! 나 경태요, 놀라지 말고 내 애기 잘 들어요,

교수님을 해코지했던 그 천지회 놈들이 방금 누나를 찾았어요,

다행히 몇 놈이 잡히긴 했지만 이 자들이 이쯤에서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가 않소,

빨리 매형한테 연락해서 대책을 세우는 게 좋겠소!”


경태로부터 장백산천지회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은하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사지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아버지 배 교수를 저격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고, 남편인 윤 비서관을 덤프차로 치여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게 한 자들이다.

몸서리쳐지는 두려움으로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었지만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윤 비서관에게 전화했다.


침착하게 은하를 다독거린 윤 비서관은 곧바로 국정원의 곽 차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 같은 사정을 알 리 없던 곽 차장은 평상시와 같이 편안하게 응대했다.

“대통령님을 모시고 중국을 순방 중인 윤 비서관께서 어떻게 전화를 다 주십니까?”

“차장님, 방금 저희 집사람한테서 연락을 받았는데 국내에 잠입해 있던 천지회 패거리들이 우리 집사람을 찾아다닌 모양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아마도 대통령님을 보좌하고 있는 윤 비서관이 표적인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의 북경대 강연에 대한 경고가 목적이었다면 은하 씨에게 큰 위해를 가할 작정이었을 것 같은데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집사람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 자들이 이 정도에서 물러설 작자들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우리 요원들이 은하 씨를 최대한 잘 보호할 테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 실력 잘 알지 않습니까?

여기서의 일은 우리한테 맡기시고 윤 비서관은 남은 순방기간 대통령님 모시는 일에 전력해 주세요,

그쪽 일도 만만치가 않아요!”

“그런데 차장님! 사실은 집사람이 지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됩니다!”

“혹시…”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천지회 쪽에서 은하 씨가 그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급적 이동을 줄여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당분간은 무리하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그쪽에 그대로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곽 차장과의 통화를 마친 윤 비서관은 후들거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에 내장된 단축번호 1번을 꾹 눌렀다.

“여보 난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요,

당신을 노리는 자들은 우리 정부에 앙갚음을 하려는 자들인 것 같으니까 발각되면 큰일이 날 수도 있겠어요,

지금부터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거기서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요”

윤 비서관은 거듭해서 은하에게 주의를 주고 있었지만 은하는 오히려 윤 비서관의 건강을 걱정했다.


이십여 년 전, 윤 비서관의 북경대 유학시절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아직도 애틋한 감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실 배 교수는 윤 비서관을 은하의 배필감으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부 못난 한국 사람들이 연변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우리 동포들을 농락하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었다.

이에 분개한 배 교수는 한국 사람들을 천민자본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결코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은하가 윤 비서관을 데려왔을 때 두 사람을 쉽게 허락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딸의 행복을 바라던 자연인 아비로서의 마음이었을 뿐이다.

끝내 배 교수는 딸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켜보지 못하고 장백산천지회의 테러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지금 윤 비서관은 목전에 닥친 한반도전쟁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국땅에서 동분서주하는 대통령을 모시는 입장이다.

이런 비상한 시기에 한낱 가정사로 자신의 소임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왠지 모를 불길한 조짐 때문에 좀체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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