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배송작전 1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서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2029년의 마지막 태양도 저물고 2030년의 새로운 태양이 동해 앞바다를 힘차게 솟아올랐다.
국정원의 곽 차장은 아침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스마트폰으로 걸려온 윤 비서관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답답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윤 비서관의 이 말에 곽 차장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잠시 뜸을 들이고서야 말문을 열 수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들도 조선족 자치주의 계엄령이 해제되기를 기다리는 실정입니다,
아직도 위중한 상황이라 현 단계에서 은하 씨를 이동시키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현지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섣부른 행동대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기왕에 기다려주었으니 우리를 믿고서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죠!”
곽 차장은 최대한 성의 있게 말하려고 했지만 윤 비서관의 한숨소리가 스마트폰을 통해서 연거푸 전해지자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그런데 연길에 있는 우리 처남의 메일에 따르면 천지회뿐만 아니라 공안까지 나서서 우리 집사람 행방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공안까지 나선 것으로 봐서는 우리 집사람을 어떤 의도로 활용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만!”
이 대목에서는 곽 차장의 입에서도 무의식적인 작은 한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사실은 우리도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은하 씨를 통해서 윤 비서관을 부각하게 되면 자연히 우리 정부가 드러날 테니까요,
대통령님 환송 행사 때 발생한 만세사건으로 중국이 큰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공안의 자체 집계로도 오만 이상의 중국동포들이 가담한 걸로 확인이 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없던 것으로 그냥 넘길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만세사건을 우리 정부의 기획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아닌지 우리로서도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순간 윤 비서관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널뛰면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은하를 연길로 보냈던 것은 만세사건을 염두에 둔 사전 조치였음은 사실이다.
이제 와서 이것을 사실대로 말하여 불필요한 논쟁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토록 위험한 일에 은하를 끌어들였다는 자책감으로 더욱 심란해졌다.
“계엄령이 언제나 끝날지도 알 수 없고 그렇다고 제가 직접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집사람의 신변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냥 손을 놓고 있는 나 자신이 화가 나서 도통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윤 비서관의 이 말은 따지고 보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국정원에 대한 원망의 말이었다.
이제는 자제력을 잃었던지 곽 차장의 무의식적인 한숨소리가 큰 소리로 새어 나왔다.
“휴∼ 알겠습니다,
제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서라도 은하 씨만큼은 꼭 구출해 낼 테니까 우리를 믿고서 기다려주시죠,
다른 사람도 아닌 은하 씨를 구출하는 일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다 강구해 봐야겠지요,
윤 비서관한테는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만 우리 쪽 중국파트의 역량을 총동원해서라도 최선을 다해볼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곽 차장의 간곡한 말을 듣고서야 윤 비서관의 침울했던 목소리가 다소간 회복되었다.
“네 믿지요! 제가 곽 차장님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차장님께는 늘 제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만 이번에도 차장님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천근만근 무겁게 만 느껴지던 휴대폰을 내려놓은 곽 차장은 내심 걱정이 앞섰다.
며칠 전 선양총영사관에 파견 중인 정 과장의 보고서에서도 배은하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중국당국의 공작 조짐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계엄령하의 현지 상황이 워낙 엄중하여 지금 움직이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는 보고였다.
멍하니 오른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토닥거리던 곽 차장이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지 양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초저녁 대림동 중앙시장의 풍경은 길림성의 연길시장을 통째 옮겨놓은 듯 그 분위기가 판박이다.
시장 안쪽으로 난 좁은 통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가자 가게의 불빛들도 흐릿해지고 사람의 인적도 잦아드는 한적한 곳이 나타났다.
중앙시장의 전체로 보자면 통행량이 적어서 장사가 잘 안 되는 마이너리그 같은 곳이지만 그래도 장사하는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비교적 저렴한 임차료 때문이다.
주로 형편이 어려운 중국동포들이 중고 테이블 몇 개를 들여놓고는 작은 양꼬치구이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2부 리그들의 공통점인 듯 한결같이 흐릿한 불빛과 칙칙한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모퉁이 코너 방면에 자리 잡은 작은 양꼬치구이집,
경태와 기수가 작업복차림 그대로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붉은색 페인트로 볼품없이 써진 ‘길림성 꼬치구이’라는 입간판이 그렇잖아도 휑한 분위기를 더욱 보태는 꼴이다.
두 사람은 오늘 건축공사장에서 일당노무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국정원 요원의 호출을 받고 대기하는 중이다.
지난달 초 은하의 소재를 캐묻던 칼치 일당을 경태와 기수의 기지로 경찰이 체포했을 때 국정원에서 이들을 인계받아 취조했었다.
이들 모두는 장백산천지회에 소속된 패거리들로 밝혀졌고 배은하를 찾아내서 테러를 가하라는 조직의 명령이 있었음을 실토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국정원에서는 경태와 기수를 국정원의 협력자로 포섭하여 대림동 일대에서 활동 중인 천지회의 동향을 파악하는 정보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담당 요원인 홍 반장이 들어서자 경태와 기수는 자리에 앉은 자세 그대로 가벼운 눈짓으로만 인사할 뿐 요란스럽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홍 반장이 두 사람에게 소주 한잔씩을 따라주면서 무심한 말투로 하는 말이다.
“그동안 별일들 없었지요?”
경태가 소주잔을 단번에 털어 넣은 후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조용한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천지회 패들이 모두 잠수를 탄 것 같습니다”
머리를 끄덕이던 홍 반장이 경태에게 다시 소주잔을 채워주었다.
“혹시 배은하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
두 사람의 표정으로 봐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전혀 놀라는 표정이 아니다.
기수가 홍 반장 쪽으로 머리를 최대한 내어 밀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누나가 전번에 연길 간다며 우리한테 전화했었지요,
사실은 얼마 전에 성태와도 연락이 됐는데 만세사건이 터진 뒤로는 천지회와 공안에서 누나를 찾아다닌다고 혈안이 돼 있다네요”
홍 반장이 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성태 씨와도 연락이 된다는 거죠?”
기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홍 반장이 다시 주변을 살피더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만세사건을 주동했던 성태 씨와 청년단원들이 공안의 수배를 받고서 잠적중입니다,
그래서 현지 사정에 밝은 두 사람이 배은하 씨 구출작전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데”
경태가 더 이상은 기다리지 못하고 홍 반장의 말을 끊어먹었다.
“당연히 나서야지요!
그렇잖아도 난 이참에 여기 생활을 청산하고 연길로 돌아가려고 맘먹고 있었는데 잘됐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천지회 놈들의 총탄에 돌아가셨는데 은하누나까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요”
경태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하자 홍 반장이 이번에는 기수 쪽을 바라봤다.
“기수 씨는 한국에서 정착하여 살아보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까?”
홍 반장이 부어준 소주잔을 단번에 털어 넘긴 기수가 홍 반장에게도 잔을 건네려 했지만 홍 반장이 사양하며 말했다.
“업무 중에는 술 안 마시는 거 잘 알면서 또 그러신다?”
기수가 피식 웃으며 경태에게 술잔을 넘겼다.
“그렇죠! 업무 중이시죠, 난 여기가 좋습니다,
물론 지금은 어렵지만 참고 견뎌서 자리를 잡아보려고 합니다,
이제 곧 통일도 될 테니까 내 인생의 미래는 여기 코리아연방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대신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요,
지금은 은하누나를 구출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