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고토 4
연길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이다.
한통의 문자 메시지가 달콤한 단잠을 깨워 주었다.
휴대폰 화면에 비친 시간은 이미 아홉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다. 늦잠을 잔 것이다.
『선생님, 일어나셨습니까,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은하가 보낸 문자였다.
창문을 열어 객실 안을 환기시키자 화창한 햇살과 함께 짙은 가을 냄새가 확 몰려온다. 정신이 맑아졌다.
간단한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르면서도 아래에 은하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행복한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심장의 박동소리마저 빨라지고 있다.
택시를 타고 십여분 거리에 있는 연길시장에 도착했다.
우리의 재래시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분위기의 연길시장은 그 규모부터가 대단했다.
어제는 저녁 먹는 것도 잊은 채 꼬치 몇 개와 맥주로 과음을 하고 말았다.
마침 시원한 해장국이 생각나던 차에 은하는 그런 내 마음을 용케도 알아차리고 나를 순두부집으로 안내했다.
열 평 남짓한 식당을 들어서자 순두부 찌는 냄새로 홀 안 가득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한국에서도 순두부를 잘한다는 식당은 여럿 다녀봤지만 여기서처럼 식당에서 직접 순두부를 찌는 집은 처음이다.
우리 동포가 운영한다는 이 식당은 새벽부터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콩을 쪄서 순두부를 만든다는데, 인근에 사는 우리 동포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맛집이라고 한다.
은하는 아버지와 함께 이미 식사를 하고 왔다고 하여 한 그릇만 주문한 후 기다렸다.
이때 범상치 않은 청년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내시선이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다.
훤칠한 키의 미남형 청년이 세련된 검정색 양복을 입고 동백꽃 아름송이를 들고 있었다.
은하가 이 청년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하려는지 다소곳한 눈빛으로 인사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은하의 눈빛과 교차하자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그런 심오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은하! 오랜만이다!, 너 북경에 있다며?, 여긴 언제 내려온 거야?”
이렇게 청년이 반갑게 인사하는데도 은하는 앉은 자세 그대로 수줍게 인사했다.
“응, 그저께 내려왔댔어!”
청년은 내가 있다는 것을 의식했던지 나를 바라보며 은하에게 묻는 눈치다.
그제야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참, 선생님 인사하십시오!, 저와 함께 여기 연길에서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친구입니다”
은하로부터 이 청년의 소개를 받고서야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하면서 청년과 인사 나누었다.
“안녕하십니까, 마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하와는…”
이렇게 말하는 청년의 눈빛에서 은하를 보통이상으로 생각하는 어떤 애틋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질문은 내게 했지만 곧바로 은하가 대답했다.
“내가 잘 아는 한국분이신데 윤 선생님이시라고…,
연변에 볼일이 있어 출장을 오셨어!”
은하의 소개가 있고서야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하며 다시 정식으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온 윤준노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여기같이 앉으시죠!”
이렇게 해서 이국땅에서 처음 인사한 청년과 아침식사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고, 마오는 당연하다는 듯이 은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운동 꽤나 한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지만 인상만큼은 선량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마오가 은근한 눈빛으로 은하를 살피며 다시 말했다.
“여전하네?, 몇 년 만에 다시 보는데도 아직도 여전해?”
마오의 이 말에 은하가 영문을 몰라하며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뭐가 여전하다는 것이네?”
마오는 은하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빤히 마주 보며 미소만 보일뿐이다.
은하가 다시 물었다.
“이 꽃은 무엇이네?”
마오가 동백꽃 아름송이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
“오늘이 내 동생 기일이야!, 찾아가 보려고… 동생이 동백꽃을 무척 좋아했었거든!”
은하가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우리 두해 후배였던 너 남동생이…, 왜 그렇게 된 거야?, 사고로…?”
“응, 인민해방군에 입대해서 사고로 그렇게 되었어!”,
마오가 또다시 동백꽃을 또렷하게 응시하더니 더욱 가까이 코를 갖다 됐다.
냄새를 깊게 들이마신 후 동백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선군 개새끼들한테 내 동생 리량이 그렇게 되었어!”
이렇게 말하는 마오의 표정에서는 지금까지의 선량한 이미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적개심으로 가득 찼다.
“오늘부터 꼭 일 년 전이니 작년 10월 오늘이었어!,
리량은 제16집단군 포병여단에 소속된 인민해방군 병사였어!,
그런데 새벽에 중국정보원을 납치하려고 국경을 넘어온 조선군인 다섯 명한테 몽둥이로 맞아서 살해됐던 거야!”
마오의 오른손이 적개심으로 부덜부덜 떨었다.
마오는 동생의 사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첩보수집임무를 맡고 있던 중국정보원을 연변 광핑의 한 별장에서 조선군인들이 납치하려는 것을 리량이 저지하다가 몽둥이로 맞아 죽었어!”
은하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분노에 떨고 있는 마오의 얼굴을 바라봤다.
“미안스럽구나!,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어!,
마오!, 이런 때일수록 용기 잃지 말고 더욱 힘을 내!, 알았지?, 마오는 언제나 씩씩하잖아!”
은하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은 마오의 표정이 일순간 밝아졌다.
“윤 선생님!, 사실은 제가 은하 참 많이 쫓아다녔습니다,
은하아버지가 민족주의 성향이 뚜렷하셔서 그 영향 때문인지 은하가 저 같은 한족아이들한테는 눈길도 안주는 바람에 끝내는 제가 포기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은하가 수줍다며 더 이상은 말을 못 하게 하여 마오의 첫사랑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하지만 마오의 눈빛에서 은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의 사연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마오!, 요즘 무슨 일 하고 있네?”
은하의 이 말에 마오는 쓴 미소를 지으며 주저 없이 내뱉듯 말했다.
“리량 복수하는 일!”
은하가 두려운 눈빛으로 ‘뭐?’하며 다시 물었을 때 마오는 농담이라고 웃었다,
하지만 곧 그의 표정은 누군가를 증오하는 정색의 표정으로 돌변했다.
농담이 아닌 듯했다.
잠시 후 벌건 고추 다진 양념이 순두부 속살 위에서 작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고 있는 순두부 백반이 나왔다.
다진 양념을 풀어 한 숟갈 먹어보니 과연 어릴 적 고향에서 먹던 맛 그대로다.
이제야 어제 과음하여 불편했던 내속이 확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오도 순두부를 한두 번 먹어보는 자세가 아닌 듯 반쯤 남은 공깃밥까지 말아서는 깨끗이 먹어치웠다.
우린 주인아주머니가 냄비채 가져온 구수한 숭늉을 단번에 들이마심으로써 아침식사를 마무리했다.
식사를 마친 마오가 먼저 자리를 일어났다.
내가 먹은 밥값까지 함께 계산한 뒤 또 보자며 인사하는 마오의 표정에선 동백꽃의 사연 속에 숨겨진 어떤 비장감이 묻어났다.
식사를 마친 탁자를 주인아주머니가 깨끗이 정리하고 나자 은하가 길림성관광 안내 지도를 펼쳐서 보여주었다.
뜻밖에도 오늘부터 나의 현지답사 안내를 자청하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오늘부터의 일정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일자별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거리에서 시간도 많이 허비하고 교통비 낭비도 심하단 말입니다.”
여기로 오기 전, 서울에서 짠 일정표는 대부분 이곳 영사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방문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사실 난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던 순간부터 연길에서의 일정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 계획대로라면 고지식한 영사관 직원의 안내로 유적지나 방문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보고서의 내용이 자칫 알맹이가 빠진 수박 겉핥기식의 무미건조한 내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재단사무실에서 협조 차 영사관에 전화했을 때도 담당자는 외교적 마찰을 거론하며 내가 원했던 우리 동포 가정의 탐방이라든가, 연변대학에 재직 중인 우리 동포출신 교수들과의 면담일정도 잡아주지 않았다.
단지 고구려유적지가 있는 집안시와 환인시 그리고 발해의 상경성 탐방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함께 동행을 할 수 있을지는 그날이 되어 보아야 알 수 있다는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은하가 나의 모든 일정을 동행하여 주기로 한 이상 굳이 영사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은하 아버지가 연변대 사학과 교수출신이라고 하니 그분을 만나본다면 이곳 지식인들의 동북공정에 대한 분위기도 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은하와의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도 아버지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렇다면 첫 일정으로 부딪혀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은하에게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아버님을 만나 뵈면 동북공정에 대해서 이곳 동포들의 현장감 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이유 말고라도 어차피 인사도 드려야 하고…”
“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지금 당장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나의 제안에 머뭇거리는 은하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어찌 되었건 사랑하는 남자를 아버지에게 소개하는 일이 아닌가.
그것도 북경에 있던 은하에게 늘 당부하던 말이 한국 남자 조심하라는 말일 정도로 한국 남자들에 대한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아버지에게 말이다.
은하는 머뭇거렸다.
“아버지께서 날 못마땅하게 생각하실까 봐 걱정이 되는가 보군.”
나의 이 말에 은하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버지의 편견이 너무 완고하셔서 그게 걱정입니다. 선생님께서 싫은 소리를 들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에 걸립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모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어깨에 내 손을 가만히 얹었다.
“아마 그러실 거야. 내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시겠지.”
은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이 때문은 아니라는 표정이다.
“선생님께는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최 씨 아저씨의 따님께서 한국으로 시집갔다 소박맞고 다시 연변으로 돌아왔단 말입니다.
그 후로 아버지의 편견이 더욱 심해지셨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선생님께서 싫은 소리라도 들으시면 어쩌나 해서...”
은하의 설명에 따르면 최 씨의 딸은 한국에서도 제법 큰 농장을 소유했다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었다 한다.
연변에 체류하면서 온갖 졸부행세로 최 씨 부녀에게 환심을 샀던 터라 순진한 부녀는 이 남자의 감언이설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시집을 가보니 이 남자는 허구한 날 술타령에 술만 먹으면 손찌검까지 하는 못난 버릇이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농사일은 아예 최 씨 딸에게 맡겨놓은 채 날마다 노름이나 하며 세월을 축내더라는 것이다.
인내의 한계를 느낀 최 씨의 딸은 결국 집을 나와 지금은 연길 시내의 어느 노래방에서 지낸다는데 최 씨도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은하 아버지는 딸에게 당부하는 말이 한국남자 조심하라는 말뿐이라고 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를 소개하기란 사실 은하로서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난감해하는 은하의 고민을 이해하면서도 이제 더는 둘러가지 않겠다는 내 결심은 확고했다.
그래서 거의 강압적으로 나의 의지를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