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앤 Mar 07. 2022

비와 소북소북의 이야기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설레는 기쁨이다.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야'라고 말한 어린 왕자 속 여우처럼 말이다. 나에게는 소북소북을 만나는 금요일이 바로 그런 날이다. 내 안에 들어올 새로운 책과의 만남이, 그녀들과의 유쾌한 수다가 늘 기다려진다. 행복한 기다림은 때론 무채색의 일상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이는 마법을 부린다.    




 초록빛이 더해가던 금요일 아침, 하나 둘 떨어지던 빗방울은 여기저기 어둠을 뿌리고 세찬 빗줄기가 되어 쏟아진다. 창문 너머에서 어스름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의 공기가 느껴진다. 깜깜함이 내려앉은 바깥세상의 아침과 달리 우리아침 그녀들의 환한 미소로 반짝반짝 빛난다.


 가벼운 일상 속 이야기에서 시작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초반부터 분위기를 무르익게 한다. 문득 차가운 새벽 공기가 내려앉을 때까지 깔깔거리며 웃어대던 어느 날 밤의 수다가 그리워진다. 언제 또 그런 날이 올까? 기약할 수 없는 지난날의 평범한 일상이 그립다.




 입담 좋은 L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지난날을 향한 그리움의 감정은 금세 잊혀버렸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던 정신없는 수다도 어느새 잠잠해지고 L에게로 시선이 모아진다. 오늘 아침, 빗길에서 마주친 두 여인의 이야기는  편의 드라마 같다.


딸네 집으로 향하던 길에 불청객 같은 비를 맞닥뜨린 어르신.

'이를 어찌한다? 집으로 돌아가 우산을 가져와야 하나? 그냥 딸네 집으로 가야 하나?'

잠깐 동안 어르신은 고민하며 망설였을 것이다.


 저, 우산 좀 씌워 드릴까요?


갈팡질팡하는 어르신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우산을 건넨 그녀. 혹여나 작은 우산 속으로 미처 다 들어오지 못한 어르신의 어깨가 비에 젖을까 마음이 쓰인다. L은 언젠가 보았던 로맨틱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다정히 말을 건넨다.


 제가 살짝 안아 드려도 될까요?


그리고는 어르신의 어깨에 살포시 한쪽 팔을 두른다. 안아준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가 살랑이 꽃잎처럼  마음을 간질인다. 소설과 드라마를 좋아하는 L은 평범한 일상도 한 편의 소설 같고 드라마 같다.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처음 보는 누군가의 몸을 가까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우산 속에서 함께한 L과 어르신의 이야기는 봄볕처럼 따사롭다. 가만히 L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P가 그분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다고 말하자 다들 깜짝 놀란다.

 "어머나?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살면서 종종 느끼지만 세상은 참 넓고도 좁다.


 L과 P, 두 사람의 인연 속에서 이어진 또 다른 우연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문득 이런 마음이 든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다지만 가슴 따뜻한 수많은 L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살만 한 곳이라는 믿음. 차가운 빗방울을 막아줄 우산 같은 존재들이 있기에 홀로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내 마음속 어딘가로 날아든 작은 씨앗에서 희망의 싹 하나가 터져 나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거라는 희망 말이다.



   

 우산 속 두 여인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르디를 만나 더욱 활기를 띤다.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처럼 저마다의 빛깔을 머금은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팡팡 터져 나온다. 같은 책일지라도 성향에 따라 내 삶의 궤적에 따라 다르게 그려지는 다양한 시선이 좋다. 누군가는 목적 지향적인 로빈슨 크루소의 삶에 또 누군가는 방드르디 속 로빈슨의 삶에 마음이 간다. 혼자만의 읽기로 끝났다면 얕은 곳에 발만 담그고 있었을 터인데 함께이기에 작가가 그려놓은 책 속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게 된다. 그 안에서 보이는 세상은 더 넓고 깊고 다채롭다.    


 매일 무언가를 유예하며 사는 우리에게 '인생은 바로 지금'이라고 이야기해준 C, 더 예뻐진 모습으로 오랜만에 소북을 찾은 반가운 얼굴 K, 따뜻한 커피와 맛있는 간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준 고마운 마음, 자리하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늘 소북 안에 있는 사람들.


소북소북과 함께한 오늘,  순간을 콕 집어 영원의 주머니에 넣어두고 싶을 만큼 오래도록 기억하 싶은 시간이었다.



* 그림책 읽어주기 활동에서부터 시작된 '소북소북'은 2019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책 모임입니다.  '물건이 제법 높게 쌓여 있거나 담겨 있다'라는 뜻을 가진 '소복하다'와 북(book)을 합하여 책과 이야기가 가득 쌓여가는 책모임을 만들자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