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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앤 Aug 03. 2022

어머니의 칼자국

도마 위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새겨져 있다

"어머님, 저희 왔어요. 어머머? 이게 무슨 냄새예요? 꽈리고추 멸치볶음 하시나 봐요. 정말 맛있겠다."

문 앞에 들어서기 전부터 바람을 타고 들어온 맛난 냄새가 콧속을 간질이고 입안 가득 침을 모으고는 사람을 홀린다. 꽈리고추의 매콤함과 간장과 올리고당을 섞은듯한 달달한 향에 침샘이 폭발한다. 어머님은 막내며느리의 유난스러운 반응이 은근히 좋은지 평소보다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비도 오는데 오느라 고생했다. 근데 너는 냄새만 맡아도 뭐했는지 어찌 그렇게 딱 알아맞히냐? 개코네 개코! 어서 들어와서 맛 좀 봐!"

후다닥 손을 씻고 부엌으로 달려가 어머님이 집어주신 꽈리고추 멸치볶음을 받아먹었다.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에 나는 그만 홀딱 반해버렸다. 그 자리에서 꽈리고추 멸치볶음을 얹은 하얀 쌀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식탁 위에는 빛깔 고운 아삭아삭 숙주나물 무침과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빨간 고구마순 김치가 놓여있다. 한 젓가락씩 맛볼 때마다 맛있다고 호들갑 떠는 며느리 모습에 어머님은 또 한 번 크게 웃으셨다. 고구마순 김치를 좋아하는 첫째는 한 입 맛보고는 환희에 찬 눈빛으로 할머니를 향해 쌍 따봉을 날렸다. 어머님은 '내가 이런 맛에 힘들어도 음식 장만 하지. 암 그렇고말고' 하는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 모녀를 바라봤다. 나이가 들면 미각도 점차 둔해진다는데 어머님의 미각과 손맛은 어째 해가 더할수록 섬세해지고 맛깔스러워지는 것 같다.


어머님이 만들어주신 밑반찬


언제나 그렇듯 어머님은 자식들 온다는 전화에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하셨을 것이다. 더운 날씨에 굴하지 않고 목덜미까지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다듬고 썰고 삶고 볶고 무치고 했을 것이다. 연골이 닳아서 내년에 수술을 하네 마네하는 상황이지만 오늘도 자식들을 위해 아픈 두 다리를 혹사시켰다. 어머님은 자식들 입에, 손주 녀석들 배속에 뭐 하나라도 더 채워 넣겠다는 일념으로 도마 위에 수없이 많은 칼자국을 남겼다. 갖가지 식재료들은 네모난 나무도마 위에 올라가 능숙한 어머님의 놀림에 거침없이 잘려 나갔을 것이고, 깊고 얕은 칼자국들이 나이테처럼 새겨졌을 것이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중략) 어머니는 칼 하나를 이십오 년 넘게 써 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칼질하는 시어머님의 뒷모습을 볼 때면 김애란의 <칼자국> 속 어머니가 생각난다. 작가는 긴 세월 칼과 도마를 놓지 않았던 어머니, 이십여 년간 국숫집을 하며 자식을 키운 어머니의 기억을 소설 속에서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준비하는 동안 그 억척스럽고도 따뜻했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 온 자신의 몸과 마음에 어머니의 무수한 손길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자 끊임없이 손을 놀리고 도마 위에 칼자국을 새기는 주인공 어머니의 모습은 곧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녀들 몸 구석구석에 퍼져있는 거친 주름살 사이사이에는 어린 자식들을 무럭무럭 자라게 한 수고와 인내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거친 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칼질을 하는 소설 속 어머니의 모습에서 시어머님의 지나온 삶이 보인다. 동네 슈퍼를 운영하면서도 살뜰히 집안 살림을 꾸리고, 사 남매를 키우고, 매 끼니마다 정성스러운 음식들을 식탁 위에 올린 억척스럽고 강인한 여장부의 모습 말이다. 평생 동안 해왔던 수십만 번의 칼질이 지겹지도 않은지 어머님은 오늘도 어김없이 자식들을 위해 칼을 들었다.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몇 십만 원이 넘는 장을 보고, 여러 종류의 김치를 담그시고,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의 음식을 장만하시는 어머님의 정성이 감사하면서도 때론 버겁다. 매번 받기만 하고 배불리 먹고만 오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맷돌처럼 무거워질 때가 있다. 자식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은 부모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게 몸을 쓰고 나면 성치 않은 다리는 결국 고장이 나고 만다. 삐걱대던 다리는 더 이상 무리하지 말라고 경고를 날리듯 욱신욱신 통증을 일으킨다. 잠자리에 누워 끙끙대는 어머님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자식들 마음은 쓰라리고 아프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쩌면 자식이란 부모의 아픔과 고단함을 먹고 자라는 괴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시어머님은 다정하고 유려한 말로 사랑을 전하는 분이 아니다.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는 소설 속 어머니의 칼끝처럼 무심하게 누구보다 깊은 사랑을 전한다. 지난 3월, 가족 모두가 코로나 확진으로 아프고 힘들어했을 때도 어머님은 자식들 걱정에 밤잠을 설치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내보였다. 아플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며 포장된 갈비탕과 함께 직접 만든 밑반찬들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와 음료수도 빼놓지 않고 챙겨 넣었다. 어머님의 정성과 사랑 덕분에 우리 가족은 크게 아프지 않고 무사히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 행동으로 자식 사랑을 전하는 어머님의 깊은 애정을 다시금 느낀 순간이었다.


해가 져서 놀러 온 아낙들도 다 떠나고 혼자 긴 잠에 빠져들어 있을 때면, 어디선가 어렴풋이 도마질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날 서울로 떠나는 나를 위해 어머니가 뭔가를 만들고 포장하는 소리였다. 잘 다듬은 갈치와 조기, 얼린 바지락, 어금니 동부, 강낭콩, 한 끼씩 데워 먹기 좋게 포장한 돼지갈비, 달래, 똥을 딴 멸치, 얼린 소족, 열무김치, 햇된장, 멸치볶음, 돌김......

아침 7시, 타다닥거리는 칼질 소리와 달그락 소리에 눈이 떠졌다. 아침밥 먹고 떠난다는 말에 어머님은 자식들 먹일 아침상 차릴랴, 싸서 보낼 먹거리 챙기랴 마음이 급하셨나 보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몸을 놀리는 어머님을 따라 부엌 공기도 빠르게 움직인다. 어머님이 챙겨놓은 커다란 아이스박스는 돼지고기와 등뼈, 오징어와 고등어, 밑반찬, 텃밭에서 기른 부추와 대파, 오이 고추와 가지 등으로 뚜껑이 간신히 닫힐 만큼 가득 찼다. 감사하면서도 죄송스러운 며느리의 마음을 읽었는지 어머님은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고마워할 것도 미안해할 것도 없다. 내가 아직은 건강하고 할 만하니까 해주는 거야. 너희들이 맛있게 잘 먹고 건강하게 지내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해. 나한테는 그게 효도야."

부모와 자식이라는 천륜 지간을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큰 정성과 사랑을 두 손 놓고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두 딸의 엄마지만 어머님의 자식 사랑에 감히 견줄 엄두가 나질 않는다.

 

집에 돌아와 아이스박스를 열고 어머님이 싸주신 것들을, 그 안에 담긴 어머님의 사랑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는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나도 자식들 삶을 위해 어머님이 챙겨주신 식재료들을 도마 위에 올리고 부지런히 칼질을 할 것이다. 도마 위에 새겨진 무수한 칼자국과 엄마의 사랑으로 어여쁜 두 딸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영글어 갈 것이다.


- 글짓는앤  instagram.com / writinganne82

-참고 도서: 소설의 첫 만남-10  <칼자국 > / 김애란 저 / 정수지 그림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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