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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어빵 Apr 18. 2024

아이를 기르면서 이것만은 하지 말자

3가지 다짐

    한창 새벽까지 술 마시던 대학생 때의 일이다. 여느 때와 같이 늦게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문득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니, 아무도 없는 새벽 시장길 위에 한 가족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네걸음 정도 앞서 걸어가고 있었고 그 뒤로 어머니인듯한 여자와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딸이 터벅터벅 뒤 따르고 있었다. 힘없는 걸음으로 천천히 3명은 대열을 유지하며 걷다 문득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지르는 듯이 보였다. 무슨 잘못을 했을까? 무슨 사건이 일어났을까? 그냥 술기운에 호기심이 생겼다. 여자는 뭔가 말을 하고 있었을까? 멀어서 들리진 않지만, 그저 살짝 고개 숙인 모습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가장 뒤에 있던 딸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해결할 힘이 없어 그저 밤하늘을 향해 목놓아 울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남자는 여자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숨이 막혀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같이 술 마시던 친구들까지 걱정할 만큼 나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숨이 가쁘고 토악질이 나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에서 눈물 콧물 쏟으며 변기에 토하고 난 뒤 정신을 추스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것은 공포다. 당시 나는 나의 감정을 그렇게 기억한다. 그렇게 목놓아 울고 있던 그 여자아이에게서 나와 나의 여동생을 투영했다. 그 여자아이의 공포심과 무력감을 안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그 감정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것을 트라우마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옳은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당시 다짐한 것이 있다.

    '아이에게 같은 경험을 주지 않는다. 아이는 고통스럽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당시 없었던 나의 아이를 위해 나 자신에게 3가지 약속을 했다.



    아이 앞에서 싸우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다투셨다. 다퉜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아버지께서 일방적으로 화를 내셨고 어머니는 어깨를 잔뜩 안쪽으로 모아서 몸을 낮추셨다.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는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었다. 어머니께서 말대답이라도 하면 언성은 더욱 높아졌고 낮지 않은 빈도로 폭력도 있었다.


    "아빠, 엄마 때리지 마."


    여동생이 울면서 애원한다. 그 조그만 몸으로 아버지가 무서워 떨면서 무릎 꿇고 빈다. 나는 그저 이 사태가 빨리 끝났으면 한다. 여동생이 오빠보다 낫다.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지면 우리 남매는 못 들은 척, 못 본 척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공포에 떨었다. 그저 사태가 악화되어서 폭력까지 가지 않았으면 하고 소망할 뿐이었다. 단칸방에 우리 남매가 이런 공포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저 구석에서 얌전히 눈 감고 귀 닫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 공포를 기억한다.


    가족 간의 싸움은 공포만을 낳을 뿐인 것을 안다. 덕분에 아내와 나는 연애때부터 싸운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가 태어났고, 나는 아내에게 다시 다짐한다. "혹시 싸우더라도, 우리 딸 앞에서는 절대 싸워선 안돼."



    어른의 잘못을 아이에게 전가시키지 말아라.

    26살 때, 영화 '라디오스타'를 극장에서 봤었다. 영화 내에서 한물간 가수인 최곤은 시골 마을의 지역 라디오 DJ로 나오는데, 영화 말미에 남자아이가 라디오에 출연하여 집을 나간 아빠를 찾는 장면이 있다. 남자아이는 '말 잘 들을게요. 돌아오세요'라고 하고, 이에 최곤이 크게 화를 낸다.


    "야, 누가 그래? 너희 아빠 너 때문에 나갔다고 누가 그래? 야, 정상철(아빠) 너, 당장 돌아와! 당장 돌아와서 호영이 때문에 나간 게 아니라고, 너 때문에 나간 거라고 얘기하고 다시 나가! 지금 애가 울잖아! 빨리 돌아와 이 나쁜 자식아!"


    이 장면에서 나는 영화 속 호영이와 함께 울어 버렸다. 

    어머니는 이따금 집을 나가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 넘게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집 나간 어머니 대신 우리 남매를 챙기러 와주시는 친척과 주변 어른들은 말했다.


    "네가 말 안 들어서 엄마가 안 들어오는 거야."

    "착한 아이로 지내고 있으면 엄마가 안 나갈 거야."


    심지어 어머니도 장롱 속에 있는 큰 여행가방을 가리키며 말 잘 안 들으면 집 나갈 거라고 우리 남매에게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개똥 같은 소리다. 어른들 사이의 문제를 아이 잘못으로 곡해하고 있다. 우리 남매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 전가가 아닌 위로였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마음껏 울며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처음으로 인지했다.



    엄마(아빠)를 낮추지 않는다. 욕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우리 남매에게 자주 이야기 했다.


    "네 아빠는 전라도 사람이라서 그래."


    경상도 사람인 어머니에게 '전라도 사람'은 욕이다. 이따금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도 전라도 새끼'라며 훈계를 시작하셨다. 길고 긴 어머니의 훈계는 쌍욕이 반이다. 부모가 세상의 전부인 시기다. 어머니께서 아버지 욕을 할 때마다 거부감이 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다.

    굉장히 위험한 행위다. 아이 세상의 반을 부정하고 있다. 욕하고, 잘못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올곳이 받아들이면 나는 잘못된 세상에서 나온 불완전한 아이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세상을 더 알게 되면, 부모가 부끄러워진다. 나는 내 아이에게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우리 남매를 한없이 사랑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렸을 때는 의심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고 있다. 1980년대 그때는 물질적으로 한없이 부족하여 마음이 무척이나 가난한, 어려운 때였다. 아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 한 조각이 없던 시절이다. 그래서 나는 이해한다. 오히려 애잔하기까지 하다.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다. 변명이 되지 않는다. 나와 아내는 우리 딸을 위하여 더 많은 시간을 쓰고 마음을 기울이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을 그어 나 자신을 단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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