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에게 아들이 생겼다

by 고미사

2025년 6월의 어느 날,

나에게 아들이 생겼다.


아들은 아주 건강하게 태어났다.

새벽 2시에 갑자기 시작된 아내의 진통, 가진통인지 진진통인지 구분할 틈도 없이 바로 응급실로 향했다. 내가 살고 있는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시내 대학병원 응급실까지는 차로 30분 거리였다. 최대한 편하게 아내를 차에 태운 뒤, 나는 속력을 내어 대학병원으로 갔다. 다행히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양수를 바닥에 쏟는 일은 없었다. 응급실 앞에 도착했는데 주차 자리는 단 4자리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꽉 차있어서 응급실 외벽 한 구석에 급하게 차를 대고 아내를 데리고 들어갔다. 아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자 응급실 간호사들은 황급히 방문 목적을 묻고 진료실로 안내해 주었다. 우리 아들의 태명은 '쁘띠 부(Petit bout)'였다. 프랑스어로 작은 조각 혹은 작은 덩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작은 아기를 부르는 애칭처럼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 한국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귀여운 꼬맹이' 같은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아내와 함께 '쁘띠부'를 부르며 이제 곧 네가 세상 밖으로 나올 때가 되었다며 속삭였다. 간호사분들은 우선 아내를 주사실로 옮겨 피검사를 하게 했다. 피검사 후, 분만 대기실로 옮긴 뒤에서야 아내는 겨우 몸을 눕힐 수 있었다. 누워있는 동안에도 규칙적인 진통은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쁘띠 부'를 부르며 함께 잘 출산할 수 있도록 마음 모아 기도했다. 분만 대기실에 들어온 지 약 1시간 가까이 지났을까? 피검사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검사 결과, 자연 분만 하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했고, 본격적으로 분만실로 이동하여 자연분만 준비를 하기로 했다. 분만실로 이동하는데 아내를 부축하여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본래 나 혼자만의 걸음으로 1분 안에 걸어갈 거리를 5분이 넘게 걸어갔다. 그만큼 아내의 고통은 짙어져 갔다. 분만실에 도착하자, 간호사 한분이 들어오셔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병원복을 주셨다. 셔츠 형태로 되어있는 얇은 옷이었다. 몸도 잘 못 가누는 아내에게 도와준답시고 셔츠처럼 입혀주었는데, 알고 보니 셔츠와는 반대로(잠그는 단추가 뒤로 가도록) 입는 옷이었다. 아내에게 오히려 두 번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 해프닝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내는 아픈 와중에도 그냥 크게 웃고 넘겼다. 옷을 다 입고 나서는 아내의 진통이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고 가끔씩 속이 안 좋아지기도 했다.


이 상태로 1시간쯤 지났을 무렵,

나는 "무통주사를 놓아달라고 간호사에게 찾아가 봐야 하나" 하는 생각에 간호사실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바로 그때, 의사 한 명과 간호사 두 명, 조산사 한 명이 분만실로 들어왔다. 이 네 분은 아내의 상태를 확인하고 바로 무통주사를 놓기로 결정하였다. 간호사 한 분은 나에게 와서 '무통주사를 맞아야 하니, 분만실 밖으로 나가달라'라고 했다.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 복도 외벽에 걸린 빨간 LED 시계를 바라보며 초조한 마음으로 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했다. 무엇 보다도 지금 가장 고통을 겪고 있을 아내의 아픔을 덜어달라는 바람과 새로운 세상으로의 출발을 기다리는 우리 '쁘띠 부'가 건강히 태어나게 해 달라는 바람을 담아서 기도했다.

무통주사를 놓는 시간은 의외로 길었다. 나는 거의 40분 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 40분이 지나갈 무렵 문득 분만실 안이 궁금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건, 굳게 잠긴 문과 커튼 쳐진 작은 창문뿐이었다. 그때, "철컥!" 하며 문이 열렸다. 황급히 분만실에 들어가자, 아내는 전보다 훨씬 편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내의 이불 옆으로 링거주사 같은 긴 줄이 이어져 있었고, 아내의 손에는 의사가 위급상황에 누르라고 쥐어준 빨간 버튼이 있었다. 아내의 한결 편해진 얼굴을 보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새벽 2시부터 진통이 시작되어 무통주사를 맞고 한결 편해지기까지 약 5시간이 걸렸다. 조산사는 약 1시간 간격으로 와서 출산이 임박했는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아내 말로는 진통이 심해서 허리 아래쪽에 굵은 무통주삿바늘이 들어가는 데도 크게 아프지 않았다고 한다.

조산사가 네 번째 방문했을 때, 조산사는 '드디어 출산 준비를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라며, 장비를 챙겨 올 테니 몇 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아내를 보았다. 아내는 나를 보곤 살짝 웃었다. 몇 분 뒤, 간호사 한 명과 조산사 두 분이 들어와 장비 세팅을 했다. 나는 소리만 들을 뿐, 눈은 아내를 보고 있었다. 아내 머리 옆에 놓인 작은 모니터 안에 보이는 아내의 심장박동파와 아기의 심장박동파. 이 두 파장의 변화를 보면서 힘을 주는 타이밍을 찾는다고 조산사가 말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함께 힘을 주었다.


Un... Deux... Trois! (하나... 둘... 셋!)


아내는 상반신을 들며 힘을 주었고, 나는 그런 아내의 어깨를 받쳐주었다.


Un... Deux... Trois! (하나... 둘... 셋!)


조산사는 조금 더 힘을 주시라고 하며 농담 섞인 대화를 했고, 아내는 스스로 숨을 고르며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Un... Deux... Trois! (하나... 둘... 셋!)


조산사가 거의 다 나왔다고 했다.


Un... Deux... Trois! (하나... 둘... 셋!)


이 네 번째 하나 둘 셋에서 드디어 아기가 보였다. 아기의 뒤통수와 어깨가 아내의 다리 너머로 보였다. 너무 신기했다. 초음파로 볼 때랑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둘 셋을 외치자 우리 '쁘띠 부'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작았다. 그때, 조산사가 나에게 가위를 내밀었다.


"아빠 분, 자르세요!"


나는 마스크나 장갑도 없었는데, 조산사가 내 앞에 대준 탯줄을 잡고 가위로 탯줄을 잘랐다. 한 번에 자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질겼다. 두꺼운 고무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쁘띠 부는 가냘픈 눈으로 수술실의 밝은 조명을 맞고도 엄마품에 안겨 엄마 젖을 찾았다. 그 광경을 잊지 못한다. 엄마 젖을 찾으며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일단 조산사가 아기를 안고 몸을 간단히 닦은 후, 바로 침대 옆에 있는 체중계로 옮겨 몸무게를 쟀다. 3.3kg의 평균체중이었다. 손가락, 발가락이 10개인지,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가 있는지 신체검사 후 바로 모유수유를 했다. 본능적으로 엄마품에 안겨 모유를 먹는 모습이 너무나 신기했다. 우리 '쁘띠 부'는 한 시간 반 동안 첫 모유수유를 하고, 엄마 품에 안겨 회복실로 옮겨졌다. 프랑스는 출산 후, 회복실에서 아기와 항상 같은 방에서 지낸다. 피검사 때를 제외하고는 엄마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없다. 그 점이 너무 좋았다. 함께 '쁘띠 부'를 바라보며 웃고 이야기했다. 회복실에서는 3일 동안 지냈다. 첫째 날에는 모유수유를 규칙적으로 하며 쉬었고, 둘째 날에는 모유수유, 아기 피검사를 하고, 아기 목욕법을 배웠다.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고, 나만 배웠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전문 사진사가 와서 아기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2025년의 6월 아주 더운 여름날, 우리 소중한 아들이 태어났다.


나는 프랑스에 산지 약 7년 째다. 가톨릭 수도자의 삶에서 프랑스인 아내를 만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예상할 수 없는 삶의 파도 속에서 지내다 프랑스인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결혼한 지 1년이 된 시점에 소중한 첫아기를 낳았다. 앞으로 우리 아기는 한국인인 아빠와 프랑스인인 엄마와 함께 프랑스에서 자랄 것이다. 우리 아들의 정체성을 잘 살려주고 올바르게 교육시키고자, 한국과 프랑스의 다른 점에 대해서도 잘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한국과 프랑스가 어떻게 문화적으로, 표면적으로, 내면적으로 차이점이 있는지를. 그래서 이 소소한 브런치북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참고 : 이 브런치북은 전문가의 견해라기보다 한 사람의 수필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20250627_140759.jpg 아들이 태어난 프랑스의 오를레앙 대학 병원 (Orlé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