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재의 증거

by 나잘스프레이

반복의 어긋남이 현실을 삼켰다. 부쩍 추운 가을에 담겨 숨이 점점 굳어간다. 늦은 밤을 함께하는 실패한 꿈들은 슬며시 나의 목덜미를 물고 놓지 않는 중이다. 매일 어디쯤에서 무너지고 있는지 가늠조차 못한 채 하루를 건너뛰듯 살아간다. 별일 아닌 순간에도 마음은 자꾸만 불안의 소나기를 뿌려대고, 아무도 모르는 틈에서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어딘지 모를 끝으로 기울고 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버티는 법만 배워왔는지도 모른다. 버틴다는 말이 주는 작은 체념과 얇은 희망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서성거리는 밤이 많아졌다. 나를 지키기 위해 세워둔 말든, 그 말들로도 가려지지 않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땐, 침묵마저 고요한 방 안에 머무르며 나라는 사람의 모서리를 다시 만져본다.


어디가 닮았는지, 어디가 아직 따뜻한지, 무엇이 이렇게 오래 아픈지

천천히 짚어보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직 기울어가는 중이기에.


이런 문장을 적는 동안에도 나는 내 안의 어둠을 흘려보내지 못한 채, 조금은 서툰 숨을 들이키며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아마 이 글도 내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작은 증거 같은 것일 테다.


그러다 문득, 이유 없이 마음이 멈출 때가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이 밀물처럼 몰려와 현실을 잠식한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나에게 너무 무심하게 굴어온 건 아닐까, 어딘가에서 이미 오래전에 금이 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동자를 움켜쥔다. 사람들은 괜찮냐고 묻지만, 사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을 잃었다. 괜찮다는 말과 나아갈 거라는 말은 입안에서 쉽게 피어나지만, 그 말이 내 안에서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날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때때로 말을 아끼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침묵이 길어지면 내 안에 쌓여 있던 것들이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 나를 향해 되돌아온다. 잡히지 않는 그림자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게로만 다가와 온종일 소리 없이 내려앉아 나를 짓누른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아직 붙잡고 있는 것들과 이미 놓아버린 것들을 구분해 보려고 노력한다. 경계는 늘 흐리고, 손을 대는 순간 다시 희미해져 버린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원래부터 뚜렷한 선으로 그려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생각의 연속 속에서 하루를 버티는 일이 곧 나의 역할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며 겨우 균형을 유지한다. 어쩌면 이 흔들림이 모든 것을 완전히 무너뜨릴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