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고통을, 포용하고 같이 울고 싶다.

그들이 삶에서 원했던 건 거창한 게 아니다, 그저 이해를 원했던 거다.

by Lingua Obscura

철학자는 왜 그렇게 자주 불행에 잠기고,

때로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가.


실제로 철학자들 중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들은 적지 않다.

레이프 볼츠만, 오토 바이닝어(1906), 카를로 미켈슈테데르(1910), 폴 라파규,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앤드레 고르츠, 사라 코프만, 길레스 들뢰즈 또한 그 대열에 있다.


자살하지 않았더라도,

루트비히 볼츠만은 교수형을 당했고,

쿠르트 괴델은 투약을 거부하다 굶어 죽었으며,

앨런 튜링은 청산가리 중독으로 사망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평생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그의 친구 버트런드 러셀조차

“내가 멘토로 그를 붙들어 놓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최근 철학자 클랜시 마틴은 자신의 자살 충동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How Not to Kill Yourself》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문제일까?


실제로 학계 전반, 특히 인문·의학계 교수들의 약 20%가

주요 우울증 증상을 겪고 있으며,

자살률도 일반 인구보다 높다는 보고가 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너무 앞서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평생,

이 세상이 도달하지 못한 곳까지 사유하며

고통과 허무,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바뀌지 않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으며,

절망은 반복된다.


그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철학자의 삶이다.

사유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니체는 말의 고통에 공감하며 울부짖고,

결국 광기에 삼켜졌다.

시오랑은 자신을

“살아있는 시체”라고 부를 정도로 삶을 괴로워했고,

게오르크 뷔르크너는 23세에 요절했다.

모두 고통 속에 살았고, 외롭게 사라졌다.


하지만 더 비극적인 것은,

우리가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해석’하려 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들의 철학을 ‘배우고’ 있지만,

그들을 벗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인용되지만,

그들의 눈물은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철학자들이 원한 것은

위대한 명성과 지적 찬사가 아니라,

단지 진심 어린 이해였다.


우리는 이제라도

그들의 고통을 껴안고,

함께 울어야 한다.


그들이 떠안은 절망과 고독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들의 철학만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까지

이해받고 기억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


이해받지 못한 고통은 더욱 날카롭다.


철학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 중,

가장 중요한 유산은 그 고통 자체일지 모른다.


나는 그들과 함께,

조용히 울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