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정읍의 이야기를 도트 만화로 담다 만화가 선우훈

정읍 사람들 |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저에게 정읍은 작고 조용한 곳, 변하지 않는 둥지 같은 곳이에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마음에 품은 기억의 장소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곳일 수도, 혹은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했던 곳일 수 있죠. 삶의 어느 시기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이라면 그 장소를 ‘고향'이라 생각하며 마음에 품게 될 겁니다.

도트 그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그림 작업을 하는 선우 훈 작가에게는 ‘정읍'이 그런 장소입니다. 그에게 정읍은 어린 시절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한 장소이자 그리운 유년시절의 경험을 안겨준 곳이지요. 선우 훈 작가에게 자리 잡은 정읍의 모습은 <나의 살던 고향은>과 <지역의 사생활 99: 정읍, 샘골 이야기>라는 그의 두 작품에 생생히 표현돼 있습니다.

기억을 구성해 작품을 만들면서 자신 안에서 애정 어린 장소를 다시 발견하는 과정. 그런 의미를 지닌 작품 활동을 해온 선우 훈 작가가 나눠준 정읍의 모습을 듣고 왔습니다.


14화00.png 정읍에서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 <나의 살던 고향은> ⓒ선우훈 작가


고향을 이야기 소재로 삼다



청소년기의 기억을 거쳐 지금의 내 삶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정읍을 담은 두 편의 만화를 그린 작가님을 만나 반갑습니다.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될 사람들을 위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만화가이자 미술작가로 활동하는 선우훈입니다. 2014년 다음 웹툰에 <데미지 오버타임>으로 데뷔했고 2020년에는 버프툰이라는 사이트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을 연재했어요. 두 만화를 그리면서 틈틈이 미술작업을 해왔고, 2017년에 열린 전시를 시작으로 제가 지금 하는 만화 작업 같은 도트 웹툰 형식의 작품을 여러 단체전에서 발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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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은 물론 최근 군산의 지역출판사인 삐약삐약북스를 통해서도 <지역의 사생활 99: 정읍, 샘골 이야기>를 내셨죠. 두 작품에서 정읍을 어떤 방식으로 다뤘는지 궁금해요.

2020년 버프툰에서 연재한 <나의 살던 고향은>은 어머니의 고향인 정읍에서 살게 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담았어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9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1살에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어머니의 고향인 정읍에서 살게 됐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정읍에 있었어요. 청소년기를 그곳에서 보내며 겪었던 따뜻한 순간, 그 순간을 살아가면서 제 삶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한 과정을 담았어요.

<지역의 사생활99 시즌2: 샘골 이야기 편>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나의 살던 고향은'과 달리 학습만화를 그려보고 싶어 작업한 거예요. 교과서에 나오는 백제가요 정읍사와 동학농민운동, 이승만 대통령의 정읍 발언 등을 다루고 있죠. 결국에는 정읍의 역사와 제 가족의 삶이 어떻게 만나는지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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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사생활99 시즌2: 샘골 이야기 편>을 보면서 놀랐어요. 정읍을 배경으로 드라마틱한 역사적 순간이 많더라고요. 예를 들어 정읍에 있는 만석보를 배경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던가 하는 부분이요.

동학농민운동이나 전봉준을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근데 이 부분이 정읍과 바로 연결돼 생각하게 되진 않는 거죠. 혁명이라는 매우 큰 이야기 무대의 시작점인데도요. 정읍에 있는 보 한 곳을 계기로 국민운동이 있었고, 그걸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정읍에 들어왔잖아요. 좀 과장일 수 있지만 만석보 하나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지 싶었어요.


학습만화와 자전적 이야기. 방식은 다르지만 ‘자신이 살았던 곳’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 같은 맥락의 작업으로 보이거든요. 해당 소재로 작업하게 된 계기는 뭐였어요?

서울에 다시 올라가 살게 된 지 10년쯤 됐을 때,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셨고요. 그 과정에서 뒤늦게 할머니에 대한 제 사랑과 할머니가 주신 사랑이 떠올랐어요. 정읍과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만화로 그려둬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작업하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의 장소 ‘정읍’을 바라보는 일


정읍에서의 삶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했어요.

기억을 꺼내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작가님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서울의 미술대학에서 공부했을 때 예고 출신 학생들을 보며 문화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도시 생활과 정읍에서 지내온 삶의 격차가 컸죠. 버스 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수준이었어서 개인적으로는 방황도 했고요. 그럼에도 졸업 후 집을 구하고 결혼하는 과정, 삶의 어느 시기를 거치는 순간 정읍을 다시 보게 되는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정읍에서의 삶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했어요. 그 과정에서 청소년기의 어떤 기억들을 거쳐 지금의 내 삶이 흘러왔는지, 그걸 보여주게 되었어요.


“내게 고향이란 내가 자라던 순간마다 별 것 아닌 일상들이 따뜻하게 기억 한 편에 쌓여 있는 곳”이라고 표현한 작가님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작가님의 유년시절을 돌아봤을 때 정읍은 어떤 곳으로 기억되나요?

저에게 정읍은 정말 작고 조용한 곳, 변치 않는 둥지 같은 곳이었어요. 느리게 변하는 도시보다 제가 더 빨리 자라나는 게 느껴졌지요. 정읍을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큰 도시로 가보고 싶은 마음도 커져가고 있었고요. 그래서 떠나왔지만 그 마음과는 별개로 정읍이 싫었던 게 아니었어요. 떠나기 전부터 그리운 느낌이었어요.

14화31.png 정읍에서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 <나의 살던 고향은> ⓒ선우훈 작가


특히 정읍의 삶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부분은 어떤 건가요?

포근하고 아름다운 사계절과 낡은 도시 경관을 좋아해요. 어느 지역이던 아름답겠지만 정읍의 자연이 참 좋거든요. 건물이 낮아서 하늘이 많이 보이고, 천변에는 아기자기한 멋이 있어요. 눈이 많이 오지만 따뜻한 곳이라는 점도 좋아요. 초등학생과 중학생 때 자전거를 타고 내장산 길을 달리고는 했거든요. 어떤 계절의 풍경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는 거, 관광객으로 찾아와 정읍의 자연을 누리는 것과는 다른 부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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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에서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 <나의 살던 고향은> ⓒ선우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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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에서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 <나의 살던 고향은> ⓒ선우훈 작가


그런 시선 때문일까요?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어린 시절 정읍에 대한 기억이 꽤 자세하게 남아 있어요. 그런 어린 시절 속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 어떤 장소인가요?

<나의 살던 고향은> 14화에서 나오는 내용인데요. 호남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바라봤던 자연경관들이에요. 학교 급식실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데, 석양 직전의 황금빛 태양 아래 여우비가 내렸어요. 아주 잠깐 쏟아지는 소나기인데, 석양빛을 반사해서 눈부시게 쏟아지더라고요. 친구와 다리 위에서 석양을 바라본 것도 기억에 남아요. 친구와 천변 다리를 건너는데 제가 살면서 봤던 가장 붉고 하늘을 가득 메운 노을이 펼쳐져 있었죠. 친구와 다리 위에서 해가 질 때까지 석양을 바라봤어요. 고등학교 입시 때 늘 똑같은 일상을 살다 보니 더 기억에 남았나 봐요.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애정 어린 장소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창작자에게 남다른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작업한 정읍에 대한 에피소드 중에 가장 즐겁게 작업한 내용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나의 살던 고향> 5화인 물놀이 편이에요. 중2 때 정읍 고등학교 앞 천변 다리 밑에서 청소년 물놀이장이 개장했거든요. 처음 며칠은 물놀이장에 가서 신나게 놀았는데, 어느새 부모님이 물놀이장 옆에서 컵라면 장사를 시작했고 저도 덩달아 부모님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게 됐죠. 처음에는 싫었는데 익숙해지고 나니 재미있더라고요. 손님이 없을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읽었던 것,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물고기를 잡았던 일들도 재미있어서 기억에 남아요. 그 시절 정읍에 사셨던 분이라면 기억하실 거고, 모르는 분들도 재미있게 보실 에피소드 같아서 신나게 그렸습니다.


소중한 기억의 장소를 나누는 과정


머물게 되는 누구든 정읍을 고향으로 느꼈으면 좋겠어요.

작품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책을 낸 후에 정읍에서 살던 분들이 연락을 주시기도 했어요. 혹은 정읍을 여행하게 된 분이 반가웠다고 말씀해주시는 등 생각지 못 하게 뿌듯한 경험이 많았어요. 고등학교 선배이자 미술작가로 활동 중인 박그림 작가를 만났는데, 정읍에 대한 기억을 함께 갖고 있으면서 같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 정말 반가웠습니다.


기억 속 정읍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최근의 정읍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어릴 적 정읍의 모습과 지금 바라보는 정읍을 비교하면 어떤 부분이 달라진 것 같나요?

최근 좋아하는 선생님과 연이 닿아서 호남 중학교에서 강연을 하러 갔는데 줄어든 학생 수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정읍에 사는 이주 노동자들이 부쩍 늘어난 게 낯설기도 했고요. 할머니 집이 있던 시기동 쪽 시내도 많이 변했고 수성동 거리도 많이 활성화됐어요. 이런 변화된 모습도 있지만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 다니던 문구점의 주인아저씨가 나이 든 지금까지 장사를 하고 계신다거나, 전에 다니던 태권도장도 그때 모습 그대로죠. 예전의 기억이 거리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게 무척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정읍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정읍의 장소를 꼽는다면 어디인가요?

먼저 꼽는 곳은 서울서점이에요. 만화에서도 그렸던 곳이고 저에게는 유명 뮤지션을 발견하는 재미를 안겨준 곳이죠. 제가 기억하던 주인 할아버지는 제가 서울로 떠날 때쯤 돌아가셨고, 지금의 주인 분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네요. 많은 사람이 찾고 기억해주면 좋을 곳이라 생각했는데 마침 조인정읍에서 소개해주셔서 반가웠습니다. 정읍사 공원 위에 있는 정읍시립미술관도 괜찮아요. 제가 어렸을 때 이런 미술관이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을 정도로 잘 운영되고 있더라고요. 미술관을 나와 정읍사 공원 산책로를 내려오면 세월이 느껴지는 정읍사 웨딩홀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거예요.


작품과 인터뷰로 작가님이 품어온 정읍의 모습을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끝으로 정읍이 어떻게 변했으면 하는지, 정읍의 내외부에서 살아온 작가님의 시선으로 들어보고 싶습니다.

정읍에 머무는 누구든 고향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요. 이주 노동자들의 문화도 정읍에 녹아들었으면 좋겠고요. 작은 아버지가 정읍에서 베트남 음식점을 하고 계신데 종업원이 베트남 분이시더라고요. 정읍사 공원이나 충렬사, 동학농민운동 공원처럼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와 외부의 문화가 스며든 지역사회가 공존한다면 더 특색 있고 좋을 거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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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훈 작가 인스타그램


글 | 이상미 에디터

사진 | 백서희 포토그래퍼


조인정읍이 더 궁금하다면? 조인정읍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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