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묻는다, 왜 이렇게 이직을 많이 했냐며, 왜 좋은 직장을 때려치고 힘들게 사냐고.
맞다. 난 한번도 한 곳에 나를 정착시킨 적이 없다.
첫 직장인 은행에 취헙 후 얼마안가 IMF가 도래했고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 혼돈을 피해갈 수 없었다. 매일 뉴스에 어느 은행이 통폐합 대상인지 조마조마 지켜보았고,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 빚을 내서 우리사주를 사야만 했고, 대리 진급을 앞둔 옆 동료가 남편과 한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로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을 때도, 나는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 상흔은 오래도록 남았다.
여성들이 일하기 좋은 외국계 회사라고 알려진 회사에 이직을 하였을 때이다.
여느날과 다름없는 아침, 인사부 상무님은 나를 조용히 불렀다. "0과장, 들어온지 얼마 안돼서 이런이야기 좀 그렇긴 한대, 회사가 곧 00000랑 영업파트 합병을 할거야. 0과장이 인사팀 소속이니, 명퇴관련 업무에 참여해서 잘 진행해 주길 바라." 이제 이직한지 한달도 채 안돼서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나는 근무경력이 짧아 명퇴 대상도 되지 못했다. 200여 명의 밥줄을 잘라야 하는 일을 이제 곧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맡길 줄이야.. 모든 원망과 눈물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그때였을까? 내가 내 삶에 대한 주도권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게..
나는 '저게 나일 수도 있었겠다' 라는 순간이 많았다. 태도나 실적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이유로..
나는 깨달았다. 노력과 성실만으로는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는 언제든 ‘결정당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 나는 이때부터 실패보다 수동적인 상태를 더 두려워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누군가의 판단으로 밀려나는 것, 조직의 구조 속에서 설명되는 존재가 되는 것, 내 이름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목록에서 지워지는 것.
그래서였을까, 습관처럼 나는 늘 한곳에 안주하지 못했다.
회사원 옆에 수험생을 두었고, 공무원 옆에 대학원생을 두었고, 안정 옆에 배움을 두었다.
내게 플랜 B는 보험이 아니었다.내가 운전석에 앉아 있다는 증거였다. 혹시라도 상황이 나를 밀어낼 때 내가 먼저 핸들을 꺾을 수 있도록.
하지만 주도권을 쥐고 있으려는 삶은 늘 긴장을 동반했다. 어디에도 완전히 기대지 못했고, 어디에도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안정을 원하면서도 행동은 늘 불안에 가까웠다.그래서 나는 쉽게 지쳤다.
요즘은 가끔 묻는다.
나는 정말 주도권을 쥐고 있었을까? 아니면 잃을까 봐 집착하고 있었던 걸까?
인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쩌면 착각에 가깝다. 그날 정리되던 동료도 아마 나처럼 나름의 계획이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변수 속에 있다. 경제 상황, 조직 개편, 시대의 흐름, 나이, 건강.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선택한다.
주도권은 완벽한 통제가 아니라 ‘내가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감각 아닐까?
나는 밀려나기 전에 움직이고 싶었다. 결정당하기 전에 결정하고 싶었다.
안정적인 사람이 되겠다고가 아니라, 결정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주도권은 핸들을 꽉 쥐는 힘이 아니라 필요할 때 방향을 틀 수 있는 유연함일지도 모른다.
플랜 B는 도망치기 위한 구명보트가 아니라 내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닫지 않겠다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명퇴가 결정된 그날,
본인 도장을 신문지에 싸서 가방에 넣던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장면 이후로 안정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결정당하지 않겠다고 선택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현재를 살면서도 조용히 다음을 준비한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방향을 정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
언젠가 떠나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것이 통보가 아니라 내 선택이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