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사지는 보령으로 정해졌다.
2023년 6월 10일 토요일.
죽도 상화원, 학성리 해안, 우유창고,
청보리창고를 들러 볼 예정이다.
동참 인원은 33명.
수강 지역은 다르지만
같은 선생님에게 배우고 있는 수강생과
그의 동반인 그리고 운영진 3인이
44인승 관광버스를 타고
다녀오는 하루 여행길이다.
오전 6시 50분 출발예정이었으나,
한 분의 지각으로 20분이 지나서야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출발!
토요일 아침 시각,
버스는 한산한 서울 도심을 관통 중이다.
주중의 피로를 보상받으려는지
도심을 떠나는 자동차의 흐름 말곤
거리 위의 움직임은 거의 없다.
우뚝 솟은 건물들만이 빠져나간 사람들 대신 오전 햇살을 가득 담느라
다이내믹할 뿐이다.
건물숲 속에서 나는 늘 건조함을 느끼지만
때론 건물숲 사이사이에서
나는 복받치는 환희를 느끼기도 한다.
서해고속도로로 접어든 버스는 여지없이
정체와 주행을 거듭하고 있다.
국토 위에 그어진 길은 거미줄처럼 세밀하게 뻗어가는데도 차들은
시원하게 달리지 못한다.
도로를 따라 형성된 도시들이
점점 거대해지고 과밀해지면서
주말이나 공휴일, 휴가철이 되면
피로가 잔뜩 얹힌 도로를
운전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잠깐 졸았나 보다.
안전 운행하는 기사님 덕분에
어느덧 서해대교가 코 앞이다.
평택과 당진을 이어주는 다리와
그 아래 전경을 볼 때마다
나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내가 이뤄 낸 성과도 아닌데
뜬금없이 자부심과 긍지가 느껴져 뿌듯하다.
대한국민의 일원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기업인들의 노고에 무한 감사를 보내며
그들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 한 줄
마음 속에 써 본다.
어느새 상기된 눈으로 사진기를 갖다 대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차창 너머
몇 컷 담아 본다.
행담도 휴게소로 접어드니
이미 주차되어 있는 차들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부산한 걸음으로 화장실을 다녀왔을 뿐
먹거리를 그냥 지나쳤다.
운영진이 나눠 준 떡과 간식으로 버스 안에서 이미 아침 시장기를 잠재운 상태였기 때문에
참새가 방앗간을 순식간 지나칠 수 있었다.
호두과자와 핫도그의 치명적인 냄새에
무념무상 꿋꿋하게 대항하듯 걸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을 때
특히 더 맛있는 이유, 모르겠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사진 수업은
70대 전후인 수강생이 과반수를 차지한다.
버스가 행담도 휴게실에서
정차하고 있는 동안
그분들 중 네댓 명이 모여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일부러 듣자 한 것도 아니다)
커피 원두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어 보였다.
놀라웠다.
그분들의 깊이 있는 앎에 입이 떡 벌어진다.
나이, 성별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문가적인 수준의 식견이 오고 갈 줄
상상 못 했을 뿐.
반면에
나는 산미보단 고소하고 단맛이 느껴지는
원두를 선호하긴 하는데
정확하게 아는 원두는 별로 없다.
상대적인 나의 젊음이 언제나 무기가 될 거란 착각이 산산이 부서진 순간이다.
분발해야겠다.
상화원이 있는 죽도에 도착.
충남 보령시 남포면
남포방조제로 408-52에 위치.
섬 전체가 하나의 정원으로 되어 있고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한국식 정원이다.
2Km 이어진 지붕형 회랑은 세계에서
가장 길다고 한다.
회랑 내부 벽엔 여러 종류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고
회랑을 어느 정도 걷고 나면
숲 속 카페를 만난다.
그곳에서 무료로 나눠 준 차와 떡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거나
지친 다리를 위해 잠시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마저 풍경스럽다.
회랑 나무틀 사이로 바다가 들어온다.
나의 눈에 바다가 들어온다.
조금 더 걸음을 재촉하면
한옥들을 복원해서 이건한 구간에 다다른다.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을 축소 복원했다는
한옥은 복사물임에도 인상적이다.
하천이 아닌 바다를 품은 병산서원도
나름 멋지다.
몰려든 인파에 묻혀서 밀물 되어 섬을
한 바퀴 돌았다.
뱃속에선 빨리 밥 넣으라는 신호를 보내오고.
오후 1시쯤 되었으려나.
인근 예약한 횟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식당은 넓지 않아 우리 일행은 오밀조밀
붙어서 먹어야 했다.
4인 기준 한 상차림이 12만 원.
두툼한 회가 한 접시, 전복, 송화버섯, 해삼, 멍게, 새우, 소라,
매운탕, 밥, 두세 가지 무침류를 포함한
다수의 반찬들.
수북이 상 위에 놓였다.
눈이 먼저 요기를 하니 이성을 잃은
식욕이 난리법석이다.
가성비가 좋은 상차림으로 오래간만에
배불리 먹었다.
조리하는 이의 손맛이 예사롭지 않아
평상시보다 더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리필을 여러 번 요청했고
친절한 식당 여사님들은
기꺼이 넉넉하게 채워주었다.
오래간만에 기분 좋게 식사를 했다.
식당 사장님과 여사님들에게 고마웠고
꾸준히 성업하시길 빌었다.
점심 식사 후
버스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학성리 해안으로 이동.
그곳은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라 해서 눈을 부릅뜨고 발자국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실패.
바닷물이 빠지는 시간대를 맞추어
도착한 덕분에 다행히
섬과 육지는 한 덩어리가 되어
우리를 맞이하였다.
드러난 벌 위를 사뿐히 걷다 점점이 박힌
엄청난 양의 고동들에게 홀려서
신발 바닥이 폭폭 빠지는 것도 모르고
바닷물을 머금고 있는 곳까지
빨려 들어갔다가
신고 있던 운동화에 얼룩덜룩한 문양을
입히곤 돌아 나왔다.
잿빛으로 물어 버린 운동화는 집에 돌아온 후 어쩔 수 없이 세탁소에 맡기었다.
이틀 정도 지나고 내 발엔 깨끗하게
부활한 운동화가 신겨있다.
참 편한 세상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해 바다가 좋다고들 하던데
나는 지난해부터 이유 없이
서해바다에 마음이 끌린다.
일상의 틈이 생기고,
시간이 나에게 허락된다면
섬과 어우러진 서해 쪽으로의 여행을
이어가려한다.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 보내듯이 / 송수권. <적막한 바닷가>발췌
갯벌 위의 모든 것이 풍경으로 스며들어
잔잔한 시간이 되면
소금향을 실은 바다내음으로
나의 호흡은 편안해진다.
망망대해로부터 왔을 바람이
나의 살갗을 때릴 때마다
나의 껍데기는 활어가 된다.
오후 4시 50분경 버스는 우유창고에 도착.
보령시 천북면 홍보로 573에 위치.
요즘 핫플레이스로 부상하고 있다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방문객 연령이 비교적 젊다.
우유창고는
건너편 개화목장에서 자체 생산하고
가공한 음료와 베이커리, 아이스크림,
유제품류, 굿즈를 판매하는 카페이다.
개화목장은
서해에서 불어오는 맑은 해풍을 이용한
자연환기,
7만 평의 넓고 푸른 초지에서
직접 유기 재배한 풀을 먹고 자란
젖소로부터 짜낸 원유로
우유와 유제품을 자체 생산, 가공,
판매까지의 모든 공정이 그 곳에서
처리된다.
10년 이상 유기농 원칙을 지키며
축사 환경부터 착유까지 까다롭게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대관령 목장이나 삼양 목장보다는
규모가 작아 보인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 너른 초지 위엔
수 십 마리 젖소 무리가 한가로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다.
'사진은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현실 속에서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결정하는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다.' / 프랑코 폰타나
사진가 프랑코 폰타나는
1960년 회화의 추상주의와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흡수해 사진에 담았다.
형태와 색상에 집중해
그만의 특유의 추상스타일을 만들었다.
폰타나처럼 형태를 단순화시켜 색감으로
표현해 보고자 했으나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우유창고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곳,
청보리 창고로 이동했다.
이곳은 카페로 변신한 폐목장이다.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젖소들도
그 젖소들을 보호하던 울타리도
젖소들이 잠자던 축사도
보이지 않는다.
적막함과 허망함에 카페 주인이
보리를 심었다는데 그마저 없다.
우리가 방문하기 이틀 전에
보리를 수확했다고 한다.
경사진 초지는 언덕에 자리한 카페에서
끝이 났다.
펼쳐진 청보리물결이 멋지다 해서
기대를 잔뜩 했는데
이미 잘려나간 상태였고
마시멜로우통만이 덩그러니 있다.
자연의 순환과 내 삶의 회로가 맞아 떨어지는
행운을 기약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2017년 4월부터 논산 출사를 시작으로
한 달에 한 번씩
국내 절경길을 걸어 보거나
역사적으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을
둘러보거나
당시 핫플레이스로 부상하는 장소를
방문하여 정해진 시간 동안
각기 개성대로 맘껏 사진을 찍는
호사를 누렸다.
3년이라는 코로나19의 강을 건너는 동안
출사여행은 중단되었다가
2022년 10월 대청호 출사로 재개.
지금은 분기별 또는 연 2회로 축소하여
여행을 진행하고 있다.
자주 가길 갈망하는 나에겐
너무나 아쉬운 나들이길이 되고 말았다.
나의 시선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낯선 이들과의 동행에서 느끼는 이질감도
점점 익숙해지니
이제나저제나 지방으로의 출사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