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송곡에 대하여

모짜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by 대전은하수 고승민


살면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한 번쯤 떠올려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으면 끝난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천당과 지옥, 극락은 정말 존재하는가.

젊은 날,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 남긴 허무 속에서,

학창 시절, 공부에 지쳐 무기력에 잠식되던 밤에,

그리고 경제적 궁핍이 삶을 옥죄는 순간

누구에게나 돌파보다 체념이 먼저 다가올 수 있다.


어느 우중충한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과 함께 떠오르는 음악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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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장송곡은 오래전부터 정해 놓았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클라리넷이 잔잔히 퍼뜨리는 구슬픈 음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는 장면을 나는 늘 상상한다.

격한 통곡이 아닌, 가슴에 조용히 스며드는 슬픔.

그 고요한 선율에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을 빼앗겼다.


오늘은 모차르트의 유작이자 미완의 곡, **‘레퀴엠’**을 듣는다.

‘레퀴엠’은 라틴어 Requiem aeternam, 곧 ‘영원한 안식’에서 유래한 말이다.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고 안식을 기원하는 가톨릭 미사 음악.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쌓아 올리는 웅장한 음향은 마치 죽음의 문턱에서 울려 퍼지는

엄숙한 심판의 목소리처럼 다가온다.

모차르트나 베르디의 레퀴엠이 상징하는 죽음은 신의 심판과 구원,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거대한 애도다.

‘진노의 날(Dies Irae)’의 압도적인 선율은 죽음의 무게를 정면으로 들이민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심판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Adagio)**에 더 끌린다.

그 음악이 말하는 죽음은 다르다.

비명 섞인 통곡이 아니라, 모든 생의 소란을 내려놓고

고요한 호수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수용’과 ‘해탈’의 순간이다.

클라리넷의 선율은 죽음을 ‘끝’이 아닌 긴 휴식처럼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격정적인 슬픔보다 살며시 나를 적시는 잔잔한 선율이 더 아릿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아마도 우리 각자가 마주하게 될 가장 진실한 고독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죽으면 끝일지, 아니면 고단한 여행 끝에 맞이하는 깊은 잠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오늘처럼 좋은 음악 앞에서 죽음의 깊이를 가늠해 보는 이 시간이

삶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과연, 내 마음속의 진정한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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