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1일 일기
새해 아침, 벽에 걸린 지난해의 달력을 새것으로 바꾸는 손끝에 빳빳한 종이의 감촉이 전해진다.
숫자는 다시 1로 돌아왔지만, 이 시작의 기분은 늘 낯설다.
해마다 반복되는 새해 앞에서, 체념의 기분도 함께 따라온다.
설 명절은 아직 멀었지만, 1월 1일이 주는 새날의 공기는 분명 다르다.
1이 나란한 11이 아니라, 위에 큰 1 아래에 작은 1.
1월 1일이다.
아내와 마주 앉아 새해 첫 끼니를 먹었다.
쉬는 날은 무조건 내가 점심을 만들어 아내에게 바친다. 오늘도 역시..
아내의 선택은 콩나물 잔치국수였다. 안부를 묻는 작은 딸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새해 떡국이 아니라 왜 국수냐고 되묻는다.
왜 잔치국수를 먹었냐는 물음에 핑계를 대자면,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니 나이 먹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고, 국수를 말아먹은 것은 긴 면발처럼 무병장수 하려 한다는
고도의 숨은 심산이지.
뜨끈한 국물, 아삭한 콩나물.
소박하지만 든든한 온기가 천천히 몸속으로 퍼져 갔다.
식후에 내린 커피 한 잔을 들고 음악을 틀었다.
처음엔 새해답게 경쾌한 곡들로 분위기를 띄웠다가,
문득 마음을 고쳐먹고 정통 클래식을 꺼냈다.
판을 뒤집는 수고가 귀찮아, 오늘은 LP 대신 유튜브를 틀었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스피커에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가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빠밤 빠밤’ 하고 가슴을 두드리는 4악장의 강렬함에 바로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1악장부터 차분히, 전 곡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긴장을 지나 2악장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호른의 구슬픈 첫음이 울리자마자 나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멈췄다.
“미 솔솔 미레도 레미솔미레…
미 솔솔 미레도 레미레도도.”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혀끝에서 계이름이 툭툭 튀어나왔다.
50년 전, 먼지 날리던 초등학교 음악실.
풍금 소리에 맞춰 불렀던 그 노래, <꿈속의 고향>이었다.
“라도도 시솔라 라도 시솔라..
미솔솔 도레미 레도레 라도.”
신기한 일이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세상은 변했고, 나도 변했다.
수많은 정보와 숫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날 음악 시간에 새겨진 선율만큼은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새해 선물처럼, 어린 시절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보내온 편지 같았다.
타향에서 고향 체코를 그리워하며 이 곡을 썼다는 드보르자크의 마음이
이제야 조금은 와 닿는다.
그가 그리워한 것이 과연 지리적인 고향뿐이었을까.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되돌릴 수 없는 순수의 결핍이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낳았을 것이다.
새해 첫날,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나는 잠시 50년 전의 소년과 마주 섰다.
콩나물 국수의 온기, 커피의 향기, 그리고 잊고 지냈던 계이름들.
낡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거는 일은 단순히 날짜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이처럼 사라지지 않은 기억들을 다시 한 번 정갈하게 접어 두겠다는 조용한 다짐에 가깝다.
2악장의 여운이 가시고 다시 강렬한 4악장이 시작된다.
이제 소년의 손을 놓고, 씩씩하게 이 ‘신세계’ 같은 한 해를
걸어 나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