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홉스는 틀렸다

by 전영칠

근대 정치철학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토머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비관적이고도 강력한 문장 하나를 남겼다. 바로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는 선언이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며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해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다. 그가 본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추악하고, 야만적이며, 짧은" 것이었다. 이 공포스러운 투쟁을 멈추기 위해 인간은 강력한 국가 권력인 '리바이어던'에게 자신의 자유를 양도하고 복종하기로 계약했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무한 경쟁 사회의 논리는 바로 이 홉스의 전제 위에 서 있다. "옆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산다"는 적자생존의 법칙, "인간은 서로에게 늑대"라는 불신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엔진이 되어 우리를 채찍질해 왔다.

그러나 40년 넘게 진리와 영성의 길을 걸어오며 내가 깨달은 진실은 전혀 다르다. 홉스는 틀렸다. 그는 인간의 껍데기만 보았을 뿐, 그 안에 흐르는 거대한 생명의 본질을 놓쳤다. 경쟁은 본능이 아니라, 분리된 자아(에고)가 만들어낸 지독한 환상이다.



홉스가 보지 못한 '협력의 역사'


토머스 홉즈(1588~ 1679(


홉스가 17세기 영국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목격하며 인간의 악함을 개탄했던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설정한 '자연 상태'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그의 공포가 만들어낸 가상의 시나리오에 가깝다. 현대 인류학자와 진화생물학자들은 홉스의 생각과 정반대의 증거들을 제시한다.


인간이 사나운 맹수들과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아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었다. 초기 인류는 혼자서는 결코 매머드를 잡을 수 없었고, 굶주리는 동료를 외면하고서는 종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사상가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그의 저서 《상호부조론》에서 자연계의 진화 원동력은 경쟁이 아닌 상호부조라고 설파했다. 개미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은 서로를 도울 때 가장 번성했다.



내 뇌속에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는 장치가 있다



거울 뉴런(Mirror Neuron)은 뇌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경세포다. 1990년대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교의 자코모 리졸라티 교수팀이 원숭이의 뇌를 연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이 발견은 현대 뇌과학과 심리학에서 '인간은 본래 공감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생물학적 근거가 되었다.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거울 뉴런은 주로 뇌의 전운동 피질과 하두정엽 부위에 분포한다. 이 부위들은 원래 우리가 몸을 움직일 때 작동하는 곳이다. 인간의 경우, 단순히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영역(전측 대상회 피질 등)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신경세포의 이름이 '거울'인 이유는 타인의 행동을 마치 거울처럼 내 뇌에 비추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바나나를 집을 때 특정한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

그런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바나나를 집는 것을 보기만 해도, 내 뇌의 똑같은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

즉, 뇌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것'과 '남이 하는 것을 보는 것'을 동일한 사건으로 인식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거울 뉴런 시스템은 단순한 신체 동작을 넘어 감정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타인이 바늘에 찔려 찡그리는 모습을 볼 때, 우리의 뇌 속 거울 뉴런은 내가 바늘에 찔렸을 때와 유사한 전기적 신호를 보낸다. 우리가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거나, 누군가 넘어지는 것만 봐도 내 몸이 움찔하는 이유는 바로 이 거울 뉴런이 타인의 경험을 내 뇌 속에 '시뮬레이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공감의 생물학적 기제다.


토머스 홉스가 말한 "인간은 서로에게 늑대"라는 전제는 인간이 철저히 고립된 이기적 존재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거울 뉴런의 발견은 인간의 뇌가 태어날 때부터 타인과 연결되도록 설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읽고 공유하도록 진화했다. 협력과 공감은 교육을 통해 나중에 배우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우리 뇌 속에 이미 장착된 '기본 하드웨어'인 셈이다.


<나는 너를 단 한번도 버린적이 없다> : 08화 '여성적인 것이 구원을 완성하게 한다'의 주제인 '여성적인 것'과 '감성'은 이 거울 뉴런의 기능과 맥을 같이 한다. 논리와 분석을 담당하는 이성은 '나'와 '남'을 엄격히 구분하지만, 거울 뉴런을 기반으로 한 감성은 그 경계를 허문다.

성모 마리아의 자비나 관음보살의 자비심 또한 이러한 공감 능력이 극대화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기에 그들을 구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 그것이 바로 거울 뉴런이 지향하는 인간성의 정점이다.


다윈의 '적자생존'이라는 말조차 오용된 측면이 크다. 여기서 '적자'란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 주변 환경과 가장 잘 조화를 이루고 공생하는 자를 의미한다. 홉스는 인간을 고립된 원자로 보았지만,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와의 깊은 연결(여성적 원리)을 통해 생존을 시작하는 존재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는 '거울 뉴런'을 뇌 속에 장착하고 태어난 인간에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본성이 아니라 질병에 가까운 상태인 것이다.



경쟁이라는 환상을 지탱하는 '에고'의 정체


그렇다면 왜 우리는 홉스의 말이 진리인 것처럼 서로를 시기하고 경쟁하며 살아가는가? 그것은 우리가 '나'라는 존재를 육체와 기억 속에 갇힌 독립된 개체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영성에서 말하는 '에고'의 속임수다.

에고는 본질적으로 결핍을 기반으로 한다. 에고는 항상 "나는 부족하다", "저것을 뺏어야 내가 채워진다"라고 속삭인다. 에고에게 타인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쟁자이거나, 나의 우월함을 확인시켜 줄 도구에 불과하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사실 '에고와 에고 사이의 끝없는 충돌'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깊은 묵상에 잠겨본 이들은 안다. 내 안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나'와 '너'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지점이 존재한다. 내가 관음 기도를 하며 한민족의 미래와 나의 미래를 동시에 보았던 체험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의식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바다 위의 파도는 서로 부딪치며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하나의 거대한 바다다. 파도가 옆 파도를 이기려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경쟁이 환상인 이유는, 공격하는 자와 공격받는 자가 본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성의 독단과 감성의 소외


홉스의 철학은 근대 이성 중심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을 기계적인 운동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물질로 규정했다. 여기에는 따뜻한 온기나 영적인 교감, 즉 '여성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성은 계산하고, 분석하고, 비교한다. "저 사람의 성적이 나보다 높으니 나는 패배자다"라고 판결 내리는 것은 이성이다.

우리가 이성의 독단에 휘둘릴 때 세상은 투쟁의 장이 된다. 하지만 감성의 눈, 자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경쟁은 설 자리를 잃는다. 다른 장에서 쓴 글에서 언급했듯,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우리를 포용과 사랑으로 이끈다. 성모 마리아의 자애로움이나 관음보살의 자비는 "너는 나보다 뛰어나야 한다"거나 "너를 이겨야 내가 구원받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너와 나는 하나이니, 너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다"라고 속삭인다.


홉스가 틀린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의 구원이 강력한 국가(이성적 통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연민과 사랑(감성적 연결)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리바이어던이라는 거대한 괴물은 겉으로 평화를 유지시키는 듯 보이지만, 인간 내면의 공포와 경쟁심을 근원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국가 간의 경쟁, 집단 간의 투쟁으로 그 규모를 키울 뿐이다.



경쟁의 환상을 깨고 나아가는 길


우리는 이제 홉스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야", "경쟁은 피할 수 없어"라는 말은 기득권이 만든 환상의 주문이다. 이 환상에 속아 우리는 평생을 불안 속에서 보낸다. 살아오며 내가 목격한 것은,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느끼는 허무함과 패배한 자들이 느끼는 절망감같은 것이었다. 승자와 패자 모두가 고통받는 게임이라면, 그 게임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니겠는가.


경쟁은 환상이다. 우리가 이 진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 타인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완성시켜 주는 동반자다. 내가 잘되는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되고, 네가 기쁜 것이 나에게 축복이 되는 '상생의 원리'가 우주의 본래 질서다.


길상사의 관음상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하고 우리를 인자하게 내려다보는 이유는, 그 어떤 논리나 교리보다 강력한 '사랑의 일체감'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종교의 벽을 넘고, 이념의 벽을 넘으며, 마침내 '나'라는 에고의 벽을 넘을 때 우리는 홉스가 보지 못한 찬란한 빛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는 투쟁도, 경쟁도 없다. 오직 서로를 비추는 따뜻한 생명의 빛만이 가득할 뿐이다.


우리는 한 번도 버려진 적이 없다. 우리가 서로를 버리고 투쟁했을 뿐이다. 이제 그 칼을 내려놓고, 우리를 영원히 이끌어 올리는 '여성적인 자비'의 손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