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전쟁에서 유래되었다. 현대의 스포츠의 기원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피 흘리지 않는 전쟁' 혹은 '문명화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신체 활동은 '놀이'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다. 적대적인 부족과의 전투에서 이기거나,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들이 고스란히 스포츠의 원형이 되었다.
달리기와 점프는 전장에서 소식을 전하거나 적의 추격을 피하기 위한 필수 생존 기술이 규격화된 것이고, 투척 종목 (창던지기, 원반 던지기, 투포환)은 창을 던져 적을 사살하거나 돌을 던져 공격하던 전투 기술이 규격화된 것이다. 격투기 (레슬링, 복싱)는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적을 제압하기 위한 백병전 기술이 스포츠로 발전한 것이다.
현대 스포츠의 규칙이 정립된 19세기 영국에서는, 혈기 왕성한 학생들의 폭력성을 순화하기 위해 축구, 럭비 등에 엄격한 규칙을 부여했다. 이를 통해 '공정한 경쟁'과 '패배에 승복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현대 스포츠 정신의 시작이 되었다.
스포츠는 우수한 인재를 죽이지 않고도 승패를 가를 수 있고, 인간 내부의 공격성과 투쟁 본능을 규칙이라는 틀 안에서 안전하게 카타르시스를 배출하게 해 주며, 국가간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민족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전쟁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효율적이기에, 현대에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을 통해 국가가 전쟁 대리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스포츠는 1등에게만 금메달을 주는 승자독식의 경쟁 세계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출신의 스포츠 선수가 세계 정상에 서기 위해 뚫어야 하는 경쟁의 벽은 상상을 초월한다. 종목마다 특성이 다르다. 축구와 양궁과 골프의 예를 들어 보자.
1. 축구
축구는 한국에서 가장 저변이 넓은 종목이자, 전 세계적으로 가장 경쟁이 치열한 스포츠이다.
대한축구협회(KFA)에 등록된 엘리트 선수(초·중·고·대학·성인)는 약 10만 명에 육박한다.
그중 프로 리그(K리그)에 입성하는 선수는 매년 수백 명에 불과하며, 그중에서도 국가대표(A대표팀) 23인에 선발될 확률은 약 0.02%이다.
한국이 월드컵 금메달(우승)을 노린다면 상대해야 할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전 세계 축구 인구는 약 2억 5천만 명이다. 한국 축구 선수가 세계 1등이 되기 위해서는 국내 10만 명을 제치고 국가대표가 된 뒤, 전 세계 각국의 '국가대표급' 천재들 수천 명과 매 경기 생존 게임을 벌여야 가능하다.
2. 양궁
한국의 양궁은 사실상 '경쟁'이라는 단어가 가진 가장 잔인하고도 경이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종목이다. 한국 국가대표 선발전이 올림픽 금메달 따기보다 어렵다.
한국 양궁이 세계 최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철저할 정도로 투명하고 가혹한 선발 시스템에 있다.
대한양궁협회에 등록된 초·중·고·대학·실업팀 선수는 약 2,000~2,500명 수준이다. 축구에 비하면 적어 보이나 이들은 모두 '활 쏘는 기계'라고 불릴 만큼 상향 평준화된 정예병들이다.
매년 국가대표를 뽑기 위해 7~8개월에 걸쳐 수차례 선발전을 치른다. 여기서 1,000명이 넘는 고교·대학·일반부 강자들이 맞붙어 단 8명(남녀 각각) 안에 들어야 '국가대표' 타이틀을 얻는다.
국가대표 8명 중에서도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단 3명이다. 이 3명을 뽑기 위해 이전 기록은 싹 무시하고 오직 당일의 컨디션과 실력으로만 다시 서바이벌을 벌인다. 어제의 금메달리스트도 오늘 화살 한 발 잘못 쏘면 바로 탈락이다.
양궁은 종목 특성상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고등학생 천재가 올림픽 3관왕 선배를 과녁판에서 밀어내는 일이 흔하다. 70m 거리에서 지름 12.2cm의 10점 구역을 맞히는 싸움인데, 한국 선수들끼리 붙으면 '10점 아니면 실패'라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9점을 쏘는 순간 "아, 이번 판은 졌구나"라고 생각해야 할 정도이다.
한국 양궁이 독주하다 보니, 전 세계 국가들이 한국인 지도자를 영입해서 한국식 훈련법을 도입했고
기술은 평준화되었다. 이제는 대만, 미국, 인도, 터키 등 세계 강호들의 실력이 한국 턱밑까지 쫓아왔다. 올림픽 본선에 가면 전 세계 64명의 명궁과 싸워야 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 감독 밑에서 한국식 독기를 배운 선수들이다.
양궁에서 1등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활을 잘 쏘는 것을 넘어 '인간의 한계를 지우는 과정'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소음 적응을 위해 야구장에서 활을 쏘고, 담력을 키우기 위해 뱀을 몸에 감거나 번지점프를 하고, 심박수를 조절하기 위해 영하의 날씨에 얼음물에 들어가기도 한다.
양궁은 토너먼트 방식(세트제)이라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결정적인 순간 화살 한 발이 바람에 날려 8점을 맞히면 수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1등 자리에 있는 선수는 이 '단 한 발의 실수'에 대한 공포를 매일 밤 꿈에서 마주해야 한다.
양궁은 국내 학생부 약 1,500명 중 상위 1%를 위해 어린 시절부터 생존 경쟁을 벌인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국내 최정예 100~200명 세계 랭킹 1~10위가 수두룩하다. 국가대표 8인이 동료이자 적수로 1년 내내 이어지는 무한 경쟁을 벌인다.
올림픽 본선에서는 세계 64강 토너먼트로 바람, 소음, 심리 등을 이겨내며 전쟁을 벌여야 한다.
양궁에서 1등(금메달)을 딴다는 것은 전국 2,000명의 '활 귀신'들을 실력으로 잠재우고, 그중에서도 가장 독한 3명 안에 들어, 다시 세계의 64명을 차례로 꺾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선수는 기계적인 완벽함을 요구받아 조금의 감정 동요도 허용되지 않는 1등의 삶을 살아야 한다.
3. 골프
한국에서 골프 선수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취미로 운동을 시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부모의 재력, 선수의 천부적인 재능, 그리고 군대식 훈련이 결합된 '엘리트 육성 시스템'에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국에 골프 선수를 꿈꾸는 초등부~중고등부의 주니어 선수는 수천 명에 달한다. 이들은 학교 수업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하루 10~12시간 이상을 연습장에서 보낸다. 한 달 레슨비와 훈련비로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 넘게 지출하며, 부모는 '전담 매니저'가 되어 모든 일상을 골프에 맞춘다.
여기서 상위 1% 안에 들어 국가대표나 상비군이 되는 것은 양궁만큼이나 어렵다. 99%의 비국가대표군은 거의 도태된다. 국가대표 마크를 다는 순간 이미 '세계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한국 여성이 LPGA에서 우승하기까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사선(死線)'을 넘어야 한다.
1단계: KLPGA(한국여자프로골프)의 서바이벌
미국에 가기 전, 한국의 프로 무대인 KLPGA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한국 여자 골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선수층이 두껍고 실력이 평준화되어 있다. 1부 투어에 입성하기 위해 3부(점프투어), 2부(드림투어)를 거쳐야 하는데, 여기서 매년 수백 명의 선수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1부 투어에서 우승 한 번 하기가 올림픽 금메달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2단계: Q-시리즈(지옥의 관문)
LPGA 무대를 밟기 위해서는 'Q-시리즈'라는 예선전을 치러야 한다. 전 세계에서 온 수백 명의 천재들과 2주 동안 8라운드(144홀)를 돌아야 한다. 체력은 물론 멘털이 완전히 갈려 나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상위 20~ 45위 안에 들어야 비로소 미국 땅에서 뛸 '풀 시드권'을 얻는다.
3단계: 미국 현지의 혹독한 환경
시드권을 따도 끝이 아니다. 언어, 음식, 이동 거리가 새로운 적이 된다. 한국은 좁아서 차로 이동하지만, 미국은 매주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해야 한다. 시차 적응과 외로움 속에서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이때 많은 선수가 '향수병'과 '번아웃'으로 무너진다.
4단계: '일요일의 압박' (최종 라운드)
대회 마지막 날, 세계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의 괴물들과 챔피언 조에서 맞붙는다. 골프는 멘털 스포츠이다. 마지막 18번 홀에서 단 1m짜리 퍼트를 놓치면 우승컵은 날아간다. 수만 명의 갤러리와 전 세계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실수하면 끝'이라는 압박감을 이겨내야 한다.
한국 골프 성공후보자들은 주니어 단계에서 부모의 올인과 막대한 자본 투입을 발판으로 전국 유망주 약 3,000~5,000명과 경쟁해야 한다.
프로 입문을 하기 위해서는 연간 준회원·정회원 선발전을 소수점 점수 차로 이겨야 한다.
국내 투어로는 KLPGA 정규투어 약 120명이 매주 컷 탈락의 공포와 싸워야 한다.
세계 무대에서는 LPGA 최상위 랭커 144명 넬리 코다 등 세계적 천재들과의 혈투를 벌여야 한다.
이것이 골프의 경쟁세계이다.
스포츠기자가 씨름 분야 천하장사 이만기 선수에게 물었다.
"자녀에게 씨름으로 성공하라고 권하겠습니까?"
"그러려면 수많은 경쟁에서 이겨 최종 1%에 들어야 합니다. 피라미드구조 최종 꼭지점만 성공한다는 이야기이죠. 99%는 성공할 수 없어 도태됩니다. 도시락 싸들고 말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