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강화도 염하가 보이는 함박눈 밤 풍경(26.01.23)
2024년부터 직장 일을 그만두고 집필활동을 목적으로 조그마한 개인 사무실을 얻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사무실을 보려 다녔었다. 몇 군데를 알아보니 보증금, 월세, 관리비 등이 만만치 않아 어떻게 할까 하던 중에, 마침 1일 4시간짜리 직장이 있는 곳을 알게 되어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근무를 하게 되었다.
현재 4시간 일 외는 가급적 외부활동을 하지 않고 집필생활에 집중하고 있다.
금요일.
오늘은 갑자기 일이 있어 오전근무로 일을 마무리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시간이 있으면 가끔씩 가는 곳이 있다.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이다. 강화도는 고조선시대 참성단, 삼랑성, 고인돌과 삼국시대, 고려시대, 이조시대까지 많은 유적이 있다. 서울에 비해 건물들이 높지가 않다. 그뿐인가, 갯벌, 바다도 볼 수 있어 독특한 문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강화도로 운전대를 틀었다.
강화대교를 지나 초지대교 방향으로 염하를 따라 길게 이어진 해안길을 달렸다. 이 해안길은 가을과 겨울에 보기 좋다. 넓은 가을 들판 누렇게 익은 벼들과, 겨울의 황량한 벌판이 보고 싶을 때 드라이브 하기 좋은 곳이다. 눈이 오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오늘 그 눈이 왔다. 그것도 함박눈을 보게 되었다. 초지대교 근처 염하가 보이는 곳에 방을 잡았다. 겨울인 대다 주말도 아닌 금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주위는 한가하고 고요하기까지 했다.
홀로 여행을 다니면서 개인적인 취향으로 제일 여행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은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다. 그럴 때 명상여행에 몰입할 수 있다.
명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학 3년 때 서울 청담동 길을 걷고 있었다. 눈이 왔다. 길가에 인적이 끊어졌고 눈은 펑펑 내렸다. 담장에 눈이 쌓이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1시간가량 가만히 서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무념무상에 빠져 황홀감속에서 그 시간을 보냈다. 그 고요함과 아무런 잡념 없는 집중감, 지극한 평온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초지대교 근처 방 창가에 앉아 얼음이 덮인 염하를 보고 있는데, 오후 7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함박눈이었다.
나는 지극히 깊은 평안함의 맛을 경기도 청평과, 예천 하풍리 청산에서 기도 중에 체험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총 2번이다. '드디어 평안에 이르렀다' 라고 해도 될 법한 경험이었다. 그 지극한 평안함의 맛은 내가 녹고, 세상이 녹고, 우주가 나를 안식시켜주는 맛이었다. 여한도 없고, 아무런 잡념도 없었다.
그 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
초기 불교의 경전에 고디카라 불리는 한 수행자의 서글픈 결단이 기록되어 있다. 부처 생존 당시의 이야기이다. 그는 명상 속에서 대자유의 기쁨인 '사마디'를 여섯 번이나 맛보았으나, 그때마다 육신의 질병이 훼방을 놓았다. 일곱 번째 사마디가 찾아왔을 때, 그는 다시 찾아올 고통의 세계로 추락하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칼을 들어 목숨을 끊는다. 찰나의 순간 집착을 놓아 아라한이 되었다고는 하나, 나는 이 대목에서 못내 아쉬운 한숨을 내쉰다.
힌두교, 특히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불이일원론)에서 말하는 지반묵타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해탈한 자'를 뜻한다.
지반묵타에게는 '육체'가 있느냐 없느냐, 혹은 '고통'이 있느냐 없느냐가 해탈의 조건이 아니다. 그들은 몸이 병들거나 세상이 소란스러워도, 자신의 본성인 '아트만'이 변치 않는 하늘임을 이미 깨달은 자들이다.
초보 수행자는 사마디라는 특정한 '상태'를 얻으려고 애쓰지만, 지반묵타는 모든 상태를 포용한다. 고통이 싫어서 육신을 버리는 것은 아직 '나와 고통'을 분리해서 보는 이원성에 갇혀 있다는 증거이다. 진짜 고수는 "감옥 안에서도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이지, 감옥 벽을 부수고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다.
명상을 한다고 언제나 사마디에 드는 것이 아니다. 경지에 이른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양자역학에서 입자의 상태는 관찰자가 보기 전까지는 확률적인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관찰하는 순간 '입자'로 확정된다.
고통이라는 현상도 하나의 '파동'이다. 수행자가 그것을 '피해야 할 괴로움'으로 확정(관찰)해 버리면, 고통은 무거운 질량을 가진 입자가 되어 수행자를 짓누른다.
고통이 무서워 죽음을 택하는 행위는, 고통을 '실재하는 괴물'로 강력하게 관찰하여 고착화시키는 행위이다. 즉, 관찰자로서의 주도권을 상실한 상태에 이른 형국인 것이다.
진정한 수행자는 고통의 파동이 밀려올 때, 그것을 고정된 실체로 관찰하지 않는다. 관찰자의 시선을 '고통'이 아닌 '무한한 의식의 장'에 둠으로써, 고통이 스스로 흩어지게 만든다.
이 원리를 응용해 잡념과 여러 생각, 혹은 고통을 흩어버리는 명상 방법이 있다. 명상하면서 먼저 '나'를 축구공만한 크기로 이미지화 한다. 그리고, 에드벌룬만하게, 야구장만하게 서서히 키운다. 종래는 지구만하게, 그리고 우주 전체가 나라고 생각한다. 잉크방울을 바가지에 떨어뜨리면 표시가 나나, 야구장만한 그릇에 떨어뜨리면 표시가 나지 않는다. 이런 방법으로 고통과 각종 잡념들을 흩어버리는 것이다.
육체를 버리는 것은 실험 도중 데이터가 맘에 안 든다고 실험실(현생)을 폭파하는 것과 같다.
"힌두교의 성자들이 찬송하는 '지반묵타'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이들이 아니라, 생노병사의 불길 속에서 시원한 그늘을 발견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고통은 해탈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해탈이 증명되는 무대일 뿐이다.
양자역학의 원리로 보자면, 고통은 관찰자가 그것을 '실체'라고 믿는 순간에만 우리를 구속한다. 죽음을 통해 고통을 끝내려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고통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실체로 인정해 버리는 초보적인 관찰자의 실수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육체라는 실험실을 지키며, 고통이라는 파동이 관찰자의 평온한 시선 앞에서 어떻게 정적(靜寂)의 바다로 환원되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수행의 길 위에서 많은 이들이 착각에 빠지곤 한다. 피안(彼岸)의 세계, 즉 저 언덕은 이 고통스러운 언덕을 버리고 도망쳐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生)이라는 거대한 명상 홀에 갓 들어선 초보 수행자의 서툰 발걸음일 뿐이다.
'지반묵타'에게 해탈은 육신의 고통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나라는 본성'이 단 한 번도 훼손되지 않았음을 아는 상태이다. 양자역학의 눈으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고통은 관찰자가 그것을 '절대적인 괴로움'으로 확정하는 순간에만 입자가 되어 우리를 짓누른다. 관찰자의 시선을 무한한 의식의 장으로 돌리면, 고통은 그저 잠시 일렁이다 사라지는 확률적인 파동일 뿐이다.
(202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