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은 단순히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 없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연기(緣起)'의 정수다. 서구 영성에서 말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장' 혹은 '형상 없는 근원'과 일맥상통하며, 스님들에게는 가장 깊은 차원의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님은 공에 대해 일례를 들어 설명한다.
꽃이 있으면 분명 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꽃은 없다. 꽃은 피어나면 반드시 진다. 그러나 예쁜 꽃에만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라는 인간도 분명 존재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공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다.
공은 곧 자유다. 그러면서 공은 고정된 실체 없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연기(緣起)'의 정수다
이에 대해 인도의 불이일원론 사상가 샹카라는 부처의 공사상은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며 신랄한 비판을 했다. 부처의 제자 수보리도 몇 년 동안을 공사상의 허무주의에 빠졌다가 부처의 말을 듣고 허무주의에서 빠져나왔다. 수보리의 공사상에 대한 이해는 공이란 곧 무집착이고 자유이며 연기(緣起)의 원리다.
나는 공을 생활의 지혜와 처세학, 그리고 공은 지상의 원리이면서, 근원세계로까지 연기(緣起)의 원리로 이해하고 있다. 지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지상 모든 것은 변한다. 지상의 모든 것은 공하다.
불이일원론 샹카라의 주장은 선명하다. 공사상은 심오하다. 그러면서 모호하다.
힌두교는 유아(有我)다. 아트만이 브라만이다. 유아로 인해 브라만과 하나가 된다. 불교는 무아(無我)다. 무아를 통해 공을 만난다. 힌두교는 창조와 피조의 관계가 선명하다. 불교는 창조와 피조의 관계가 모호하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인간이 죽으면 육신은 지상에 놓아두고 지상에서 닦은 인격 하나 가지고 영혼으로 영계를 가서 산다. 영혼은 영생불멸이다. 영혼의 발전과 성장도 무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루할 틈이 없다. 영계는 차원급으로 나누어진 세계다. 영계는 자본주의 세계가 아니다. 영계는 진리주의와 사랑주의의 세계다. 깊이를 모르는 진리세계와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분명히 근원인 신이 존재한다.
스님들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는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는 '인격신'은 부정하지만, 우주의 근원적인 질서나 만물에 깃든 절대적인 진리는 인정한다. 한 차원 더 들어가 깊은 수도를 한 스님들과 신이라는 단어 대신, 진여(眞如), 불성(佛性), 법(法),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하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진다. 진리에 대한 도담을 이야기하는데 무리가 없다.
스님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나와 분리되어 나를 심판하는 타자로서의 신'이다. 하지만 '우주적 의식', '근원적 생명력', '만물에 흐르는 법칙'을 이야기하면 위에서 언급한 용어들을 통해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다.